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이 천경사변후 8년이나 더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by 중은우시 2018. 12. 5.

글: 종횡국사(縱橫國史)


1856년 4월,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는 동왕(東王)의 명령을 받아, 강서 남창 전선에서 4만의 익전(翼殿) 정예병사를 이끌고 천경으로 돌아와,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 진옥성(陳玉成)등과 연합하여, '강남대영'을 격파한다. 흠차대신 향영(向榮)은 단양으로 도망가던 도중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고, 천경의 포위는 이렇게 풀린다. 태평천국은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런데, 같은 해 9월,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는 '주양밀조(誅楊密詔)'를 받은 후, 3000명의 북전(北殿) 인마를 이끌고 강서전선에서 천경으로 돌아와, 동왕부를 공격한다. 그리고 양수청과 그의 일당 5천여명을 모조리 죽인다. 이것이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 '천경사변(天京事變)'이다. 이로써 태평천국은 원기를 크게 상한다. 1857년 여름에는 익왕 석달개가 홍씨형제의 견제를 참지 못하고, 안경(安慶)으로 가서 부하들을 불러모아 자립한다. 그리고 10만 정예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버린다.


'천경사변'과 '익왕출주'의 두 사건이후, 태평천국의 실력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더 이상 옛날의 영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화춘(和春), 장국량(張國梁)은 새로 '강남대영'을 재건하고, 승보(勝保), 덕흥아(德興阿)는 강포, 포구, 양주에서 다시 '강북대영'를 건설한다. 이렇게 하여 천경은 계속 청군의 포위를 당하게 된다. 그외에 호림익과 이속빈은 무창에 대한 포위공격을 강화하여, 위준이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 여러가지 현상으로 보면 태평천국은 이미 액운이 닥쳤고 곧 청군에 멸망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태평천국이 비록 실력이 줄었고, 위기가 겹겹이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1864년 멸망할 때까지   8년을 더 버텨낸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청나라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왜 직접 태평천국을 멸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청군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유리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진옥성, 이수성에게 오히려 맹공당했다. 


건륭 중후기부터 청나라의 두 갈래 정규군인  팔기, 녹영은 이미 부패가 극심했다. 전투력은 급감한다. 백련교의 난, 천리회의 난을 진압할 때, 가경제는 지방단련의 무장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천국이 남경을 도성으로 정한 후, 청나라 팔기와 녹영군은 양주, 효릉위에서 '강북대영' '강남대영'을 건설하여 태평천국을 막았다. 그러나 이후 석달개, 진일강, 진옥성등에게 패배한다. 1858년초, 화춘, 장국량, 덕흥아, 승보는 다시 한번 강남, 강북대영을 재건한다. 그러나 이들 팔기와 녹영은 군기가 산만하고 생활이 부패하여 태평군에 맞설 전력이 전혀 되지 못했다. 외국선교사들은 이렇게 묘사했다: "군대같지가 않았다. 시장에 모여서 먹고 마시고 놀고 아편을 피우고 계집질하고 도박을 했다." 그래서 천경사변후, 이들 군대는 그저 계속하여 '포위'방식을 유지했을 뿐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지는 않았다. 1858년 여름, '강북대영'은 두번째로 파괴된다. 1860년 강남대영이 두번째로 파괴된다. 청나라는 더 이상 쓸 정규군이 없었다.


둘째, 상군(湘軍)도 원기를 크게 상하여, 단기간내에 회복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의 강적이 하나 줄었다.


증국번을 우두머리로 하는 상군집단이 태평군의 극성이다. 설사 양수청시대라 하더라도, 상군과 태평군은 전투때 우열이 명확히 갈리지 않았다. 쌍방은 비슷한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천경사변'후, 대량으로 확충되어 훈련을 거치지 않은 태평군과 전투를 많이 겪어온 상군은 같은 급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중의 안경회전과 우화대결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나, 당시 상군은 원기가 크게 상해 있었고, 게다가 함풍제는 한족지주의 무장세력에 거리낌이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수효(守孝)를 하고 있는 증국번을 다시 불러내어 군대를 훈련시키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강남대영의 화춘, 장국량등 녹영군들도 증국번, 호림익이 공을 빼앗아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경사변'후, 청나라조정은 상군으로 하여금 직접 천경(금릉)을 공격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으로서는 숨을 쉴 여지가 생긴다.


셋째,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제2차아편전쟁을 일으켜, 청나라조정은 이들을 상대하는데도 힘이 부쳤다.


역사는 왕왕 신기하다. 여러 우연이 겹치게 된다. 그것이 역사의 매력이다. 위창휘가 천경에서 대거 도살을 벌일 때, 영국프랑스연합군이 1856년 10월 광주를 포격한다. 이렇게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후 직접 북상하여, 청정부에게 <천진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박한다. 1860년 8월, '환약노선'으로 충돌하여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다시 한번 천진 백하구로 치고 들어가 상륙한다. 이어서 연합군은 북경을 향하여 출발한다. 9월, 쌍방은 통주 팔리교에서 결전을 벌이고, 불가일세라 불리던 승격림심(僧格林沁)의 몽골기병은 참혹하게 패배하고 반이상의 사상자를 낸다. 함풍제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북경을 포기하고, 승덕 피서산장으로 '사냥'하러 간다. 실제는 도망친 것이다. 이때 청왕조는 내우외환으로 영국프랑스연합군도 막아야 했고, 태평군도 진압해야 했다. 확실히 힘이 딸렸다. 그외에 <북경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서방열강은 태평군을 지지하는 경향이었다. 청왕조는 열강의 힘을 빌어 태평천국을 진압할 수도 없었다.


넷째, 염군(捻軍)이 활약하여, 중원대지를 종횡하고, 청나라는 몸을 나누어 싸우기 힘들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날 때, 양회(兩淮) 일대에서는 '염군'이 일어난다. 염군은 기병을 위주로 한 무장세력인데, 명장 장락행(張洛行), 장종우(張宗禹), 임화방(林化邦)등이 지휘하여 중원각지를 종횡한다. 승보등 청나라장수들과 계속 싸웠다. 태평천국운동이 실패한 후에도, '염군'은 계속 반청이 기치를 내걸고 팔기명장 승격림심을 죽이고, 증국번을 사직하게 내몰 정도로 영향력이 상당히 컸다. '천경사변'후, 석달개는 10만 정예병을 이끌고 혼자서 싸웠다. 그러다보니 홍수전집단에 남은 것은 모두 노약잔병이었다. 그러나, 이수성은 이 기회를 틈타 '염군'과 연락하고, 이소수(李昭壽)라는 통로를 통하여 장락행, 임화방등을 태평천국 휘하로 끌어들인다. 이들은 태평군의 실력회복에 큰 도움을 준다. '염군'이 가입하면서, 태평천국의 환북(皖北, 안휘북부)의국세는 잠시 안정된다. 나중에 진옥성이 '삼하대첩'을 거두어 상군의 6천정예를 섬멸하는 전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염군'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바로 '염군'이 회북 중원일대에서 활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모든 정예병을 태평천국을 진압하는데 투입할 수 없었다. 알아야 할 것은 '염군'이 전성기때는 두번이나 병력을 북경교외까지 밀고 들어왔고, 놀란 청나라황제게 하마터면 동북으로 도망갈 뻔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천경사변후, 태평천국이 8년이나 버티며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원인이 바로 청나라의 정규군이 부패하고 무능하며, 내우외환의 엄중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래서 병력을 나누어 싸우는데 힘이 부쳤다는 것때문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태평천국의 지휘부가 '천경사변'후에도 계속하여 내분을 벌이고, 장수들간에 서로 공격하며 지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군에게 각개격파당하고, 결국은 패망했다. 만일 태평천국이 제2차 아편전쟁의 유리한 시기를 이용했다면, 적시에 원기를 회복하고, 전력을 다하여 북벌하면 명나라말기의 틈왕 이자성처럼 직접 '연경'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