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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무릉도원(武陵桃源) 후보지를 찾아라.

by 중은우시 2019. 4. 10.

글: 노지진비(路之盡菲)


"세외도원(世外桃源)"은 동진(東晉)의 전원시인(田園詩人) 도연명(陶淵明)이 그의 작품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묘사한 이상세계이다. 도연명의 글에 따르면, 계곡물의 발원지에 복숭아나무숲이 있고, 복숭아나무숲의 끝에는 세상과 격리된 사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 작은 마을에는 인구가 많지 않지만, 좋은 밭이 널려 있고, 사람들이 편안하게 생활하고 만족하며, 아무런 분쟁도 없다. 더구나 사람들은 이 곳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런 이상적인 세외도원을 아주 그리워했다. 그래서 현실사회에서 여러 지방이 스스로가 도연명이 묘사한 도화원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이 많아지니, 사람들은 진위를 가리기 어렵게 되었다. 만일 도연명의 말대로라면 중국의 세외도원은 너무나 많다. 그냥 약간 막혀있는 산간분지는 모두 세외도원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한 지방이 세외도원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4가지 핵심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총분히 높고, 충분히 많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외부인들이 들어오기 어려워야 한다.

둘째, 중화의 핵심문화권과 너무 멀어서 원시사회여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너무 가까워서도 안된다. 너무 가까우면 전쟁의 포화에 휩쓸려 들어간다.

셋째, 기후가 중원지구와 크게 차이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기후로 인한 병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가 충분히 내리고, 토지가 비옥해야 한다.

넷째, 내부의 지세가 평탄해야 한다. 그래서 농사지을 땅이 충분해야 한다.


이상의 4가지 점으로 보자면, 중국에서 진정으로 세외도원이라 칭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최소한 4곳이 있다: 한중분지(漢中盆地) 안강곡지(安康谷地), 죽계분지(竹溪盆地)와 방현분지(房縣盆地).


한중과 안강은 한강(漢江)연안의 산골짜기이고, 일찌기 고대인들이 사천과 섬서를 출입하는 교통요지였다. 진,한이후 자주 전쟁에 휘말려서, 이 두 지방은 배제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호북 경내에 위치한 죽계와 방현이다.



방현분지는 호북성 서북지역의 십언시(十堰市) 경내에 있다. 신농가(神農架)를 등지고 있어, 높이가 수천미터에 달하는 원시삼림이 백리에 이어져 있다. 지금도 넘어다닐 수 없는 천연의 험준한 산이다. 이 지역은 중원지역의 남양분지(南陽盆地)에서 서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중간에 무당산(武當山), 형산(荊山)등 대파산(大巴山)에서 갈라져 나온 산맥들이 가로막고 있다. 유일하게 외부로 통하는 하류인 한강의 지류 남하(南河)가 있으나, 이 강물은 화중지구의 최대 단열지대인 청봉단열지대 위에 놓여 있어서, 하곡의 지세가 험중하고, 지형이 복잡하여 사람들이 지나가기는 어렵다.


내부지형은 기후 측면에서 조건이 아주 우수하다. 방현분지의 면적은 약 230평방킬로미터인데, 그중 개략 절반이 비옥한 평원이다. 지세는 평탄하고, 관개가 쉬워, 양전만경(良田萬頃)이라는 말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


전국시대에 방현지구는 지리적 특징으로 방릉(房陵)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종횡천리(縱橫千里), 산림사색(山林四塞), 기고고릉(其固高陵), 여유방옥(如有房屋)"(가로 세로가 천리에 이르고, 사방이 산과 숲으로 막혀 있으며, 단단하기는 높은 구릉과 같고, 마치 집과 같다." 당나라때, 당중종 이현(李顯)은 무측천에게 쫓겨나서 방릉으로 와서 여릉왕(廬陵王)이 된다.


당중종은 이곳으로 쫓겨온 후, 마음 속으로 불만이 커서, 현지에서 대거 향용(鄕勇)을 끌어모아 무측천에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러나 산도 높고 길도 멀어서, 무측천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만년에 이현을 불러들여 황위를 넘겨주게 된다. 지금까지도 방현 경내에는 "괘방암(掛榜巖)"이라는 유적지가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당중종이 병력을 모아서 거병한 장소라는 것이다. 그외에 방현은 황주(黃酒)와 표고버섯이 유명한데, 전해지는 바로는 고대 궁중에서 가져온 기술로 만들고 재배했다고 한다.




죽계현의 옛 이름음 무릉(武陵)이다. 기원전206년, 한고조가 이곳에 무릉현을 설치한다. 이곳은 진나라때 유일하게 무릉이라고 불리던 지역이다. 또한 도연명이 말한 무릉원에 들어맞는 가장 설득력있는 장소이기도 한다. 죽계는 호북성 십언시에 예속되어 있고, 지형의 특징은 방현과 아주 가깝다. 다만 방현보다 더욱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안강시에서 40여킬로미터 떨어진 이평현 방향에서 찾을 수 있고, 방현에서는 계속 서쪽으로 100킬로미터를 가야 이곳에 도착한다.



고대에 안강과 방현만 해도 이미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죽계는 다시 이곳에서 백리를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를 보면 이곳이 얼마나 감추어져 있는 곳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도연명이 쓴 도화원은 바로 이곳의 지형특징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죽계분지의 면적은 약 80평방킬로미터이고, 그중 약 40%가량은 평탄한 평원이다. 방현분지와 비교하면 죽계의 수자원과 평원규모는 모두 떨어지지만, '세상과 력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죽계가 더욱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