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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하북성(河北省)의 성회변천(省會變遷)

by 중은우시 2019. 5. 27.

글: 장계여(張桂如)





역사상, 하북성의 성회역할을 한 도시는 아주 많다. 매번 이전할 때마다 그 배후에는 심원한 경제적 정치적 고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명성조 주체가 북경을 수도로 삼은 후, 하북은 경성을 보위하는 중요한 지역이 된다. 명나라때는 하북지방은 북직예(北直隸)라고 불렀다. 그 뜻은 직접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관리를 받는 곳이라는 뜻이다. 즉 왕조의 중추를 보위하는 가장 핵심의 방어선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의 비용지출을 보장하는 경제자류지이기도 하다.


북직예에는 순천부(順天府)가 있다. 순천부에는 경사(京師)가 있고, 경사에는 3중의 성벽이 있다. 순천부는 명청때 경사의 부속건제였다. 북경은 홍무원년 팔월, 북평부로 개칭되고, 영락원년 정월 북경으로 승격되고, 순천부로 불린다.


청나라때 하북성의 성회는 이미 3번 그 장소를 바꾼다.


순치제때 대명부(大名府)가 하북의 성회였다.


만일 하북을 하나의 단독 행저단위로 대우한다면, 그 역사는 청나라때부터 시작된다. 청나라 초기에 원래의 북직예는 더 이상 중앙직속이 아니게 된다. 그리하여 독립된 지방의 성이 된다. 다만 여전히 "직예"라는 명칭은 유보되어 있었다.


청나라 순치16년(1659년) 정식으로 직예성이 설립된다. 순무는 대명부(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대명현)에 주재했다. 그러므로 대명(大名)은 하북역사상 최초의 성회였다.


하북지도를 보면, 한단시 산하의 대명현은 하북의 변연(邊緣)에 위치하고 있다. 하북성 동북부의 도시들과 연결이 되지 않을 뿐아니라, 경성과의 연락도 아주 불편했다. 그러므로 오랫 동안 유지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마도 가장 먼저 이 곳을 성회로 삼은 것은 많은 정도에서 이전에 직예,산동,하남의 3성총독이 대명부에 남겨둔 관청건물을 그대로 이용하려는 고려에서였을 것이다.


옹정제때 보정(保定)이 하북 성회가 되다


옹정제때부터, 대명부는 위치가 좋지 않아서, 청정부는 새로운 성회 후보지를 찾기 시작한다. 보정은 하북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북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경제도 발달하여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옹정7년(1729년) 청정부는 보정을 직예 성회로 삼는다. 이때부터 보정은 정통성회의 역사를 갖게 되고 보정인들이 자신의 도시역사에 대하여 자신을 갖는 근원이 된다.


화북의 여러 도시들과 비교하면, 보정은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중요도시이다. 보정경내의 토지중 절반은 평원이고, 이는 농업시대에 아주 큰 장점이다. 양식재배, 교통운수, 도시확장등은 모두 평원이 필요하다. 다만 농업도시는 근대에 접어든 후 왕왕 발전의 병목현상에 부닥치게 된다.


보정은 땅도 넓고, 사람도 많은 좋은 땅이다. 그러나 바다로 나갈 수가 없어서, 보정은 청나라말기에 개방이후 신속히 장점을 잃어간다. 보정은 그다지 안정되지도 못했다. 보정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바로 안정을 보장받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아편전쟁이후 천진(天津)이 하북성회가 되다


성부(省府)는 여전히 보정에 남겨두었지만, 아편전쟁이후, 직예총독은 반드시 천진의 해안으로 와서 섭외사무를 처리해야만 했다. 직예성은 천진에 많은 임시사무기구를 설치한다. 점점 천진은 항구가 열리는 봄여름에는 사실상의 직예성부 소재지가 된다. 천진이 하북성회로서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외국세력이 연해에서 점차 상륙하면서, 그리고 중국정부가 해양권익을 점점 중시하면서, 천진의 중요성은 금방 보정을 넘어선다. 만일 직예의 최우선임무가 경사를 호위하는 것이라면, 열강이 해상에서 침입하던 시대에 성회를 천진으로 이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연히 가장 먼저 적을 발해에서 막아야 한다. 팔국연합군이 가장 먼저 천진에 '도통아문(都統衙門)'을 설립하고, 이는 직예 식민통치의 핵심이다. 이 기구는 나중에 원세개가 계승하는데, 천진은 사실상 유일한 하북성회가 된다. 민국초기까지 천진은 계속 직에성회가 된다.


천진은 하북평원 해하(海河) 5대지류가 만나는 곳이다. 동으로 발해를 두고, 북으로 연산이 있으며 해하는 시내를 지나간다. 해하는 천진의 모친하이다. 천진은 자고이래로 조운(漕運)으로 흥성했다. 명나라 영락2년 십일월 이십일일(1404년 12월 23일) 정식으로 성을 쌓고, '천진'으로 이름짓는다. 이는 '천자의 진도(津渡)'라는 뜻이다. 중국고대에 유일하게 축성시기가 기록되어 있는 도시이다. 600여년을 거치면서 천진은 중국과 외국이 합쳐지고, 고금이 겸용된 톡특한 도시풍모를 갖추고 있다.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하북 즉 당시의 직예성의 성회는 이미 3번이나 위치를 바꾼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 파란만장한 성회변천이 그 뒤에 일어날 줄은.


석가장(石家莊)이 하북성회가 되다.


민국초기 하북은 여전히 직예로 불리웠고, 먼저 천진에 성회가 있다가, 나중에는 북평(北平, 즉 북경)에 설치한다.


1928년 6월, 국민혁명군이 천진을 점령한다. 남경국민정부는 천진특별시를 설립한다. 1930년 6월, 천진특별시는 남경국민정부 행정원직할의 직할시가 된다.


1930년 11월, 하북성 성회는 북평에서 천진으로 돌아온다. 천진직할시는 성할시(省轄市)로 고쳐진다.


1935년 6월, 하북성 성회는 다시 보정으로 옮겨간다. 천진은 다시 직할시가 된다.


1945년 항전이후, 국민하북성정부는 다시 여러번 이전한다. 잠시 보정에 있으면서, 일부 사무기관과 기록자료를 남긴다.


신중국성립 전날, 진찰기(晋察冀), 진기노예(晋冀魯豫)의 양대해방구는 하나로 합쳐진다 이때, 중공중앙은 보정에 하북성위 성정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화북국의 안배하에, 보정은 하북의 신중국시기의 제1대 성회가 된다.


1949년 1월 15일 새벽5시, 인민해방군 동서돌격집단이 금탕교에서 만난다. 17일 당고를 해방시키고, 천진이 모두 해방된다. 천진은 순조롭게 직할시가 된다.


1958년, 대약진운동이 일어나면서 아직 정식으로 직할시로 확정되지 않았던 천진은 다시 하북성 지도자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 당시는 일을 크게 벌이던 시대이다. 보정의 안정된 발전노선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성회를 더욱 활력있는 도시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적 필요이다. 그리하여 1년만에, 막 안정된 하북성위 성정부를 다시 천진으로 옮긴다.


1958년 2월 천진은 하북성에 들어간다. 1958년 2월부터 1967년 1월까지 천진은 하북성회였다.


1967년 1월 천진은 직할시의 지위를 회복한다. 천진은 간칭 진(津)이고, 중화인민공화국 직할시이며, 국가중심도시, 초대형도시, 환발해지구의 경제중심, 최초의 연해개방도시, 전국선진제조연구개발기지, 북방국제항운핵심구, 금융혁신운영시범지역, 개혁개방선행지역이다. 천진의 빈해신구는 '중국경제제3성장극'으로 불린다. 천진은 여름에 다보스포럼의 상주개최도시이기도 하다.


성회가 직할시가 되면서, 하북성의 성회를 옮겨야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모택동 주석이 석가장시 평산현 서백파(西柏坡)에서 국내외를 놀라게 만든 3대전투를 지휘하였으므로 석가장시 평산현 서백파는 '신중국의 요람'이라는 명성이 있었다. 그래서, 당과 국가지도자들은 하북성 성회를 석가장에 두자고 건의한다.


석가장은 간칭이 '석(石)'인데, 1967년 하북성 성회가 된다. 하북성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고, 옛 명칭은 석문(石門)이다. 아마도 석문이라는 이 이름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겨서인지, 석가장이 석문 부근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합병후에 석가장으로 불리게 된다.


석가장이 성회가 되면서, 하북성의 정치경제문화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크게 변화한다. 석가장 관할구역의 총면적은 15,848평방킬로미터이고, 시구면적은 2,206평방킬로미터이다.


석가장시는 하북성의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환발해만경제구에 속한다. 동으로는 형수(衡水)와 접경하고 있고, 남으로는 형대(邢臺)와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산서성과 만난다. 북으로는 보정과 만난다. 수도 북경에서는 273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경석, 석태, 석황, 석안고솓도로와 107, 207, 307, 308번 국도 및 2개이 성도, 42개의 현도가 석가장시를 종횡으로 교차한다. 도로의 총거리는 6,379킬로미터이다. 석가장은 전국 철로운수의 주요 허브이다. 경광, 석태, 석덕, 삭황의 4개 철로노선이 이곳을 지난다.


석가장은 화북평원과 태행산산지의 두 가지 지형을 보인다. 전국의 양식, 채소, 고기, 달걀, 과일의 주산지중 하나이다. 농업집약화와 산업화수준이 비교적 높다. 생산규모는 전국 36개 중점도시중 1위이다. 국가에서 확정한 소맥생산기지이고, 일찌기 '북방양창(北方糧倉)"으로 불리고 있다.


2016년 2월 23일, 석가장으 CCTV '중국경제생활대조사'에서 2015년도 10대행복감을 느끼는 도시 중에서 8위를 차지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