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소인물 (10): 문빙(文聘), 가장 저평가된 삼국명장

중은우시 2019. 1. 18. 20:31

글: 역사대폭작료(歷史大爆炸了)


형주는 명장과 명상들을 많이 배출했다. 제갈량부터 방통까지, 이들 형주의 명사들은 전체 삼국시대의 진전에 영향을 미친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여러번 조위(曹魏)를 위기에서 구해준 형주명장이 있다. 그가 바로 문빙이다.


문빙은 형주 사람이다. 그가 충성한 것은 한왕조가 아니라, 당시 형주를 통치하던 유표(劉表) 가족이었다. 그래서 유표의 후계자가 조조에 투항한 후, 그도 조조에 투항한다. 조조가 그에게 왜 투항했는지를 묻자, 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장탄식을 했다. 자신이 유표를 볼 면목이 없다고. 이 충성스러운 명장에 대하여 조조도 아주 좋아한다. 그리하여 그를 회유하려 애를 쓰고, 문빙도 국사(國士)로 이에 보답했다.


장판파(長坂坡)에서 문빙은 조순(曹純)과 함께 유비의 잔당을 추격한다. 문빙은 형주에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형주인들이 속속 귀순한다. 그리하여 유비는 중도에 손실이 아주 참혹했다. 적벽대전이후, 문빙은 명을 받아 형주를 지킨다. 항장(降將)으로 하여금 이렇게 중요한 지방르 지키게 하는 것을 보면 조조가 문빙을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다.


나중에 관우가 연속으로 조조군을 격패시킨 것과 비교하면, 이전에 관우가 형주를 공격할 때는 참담한 패배였다. 그것은 바로 문빙의 존재 때문이다. 관우가 문빙이 지키고 있는 강하(江夏)등의 군(郡)을 공격했는데, 문빙은 기병(寄兵)으로 이를 격파하고, 관우의 물자와 양초를 불태워 버린다. 그리하여 관우는 철저히 패배한다. 그후 손권이 다시 공격을 해왔다. 손권의 군사지휘수준은 관우에도 못미쳤다. 그 결과 대패하고 만다. 문빙이 있었기 때문에, 형주에는 또 한명의 수호신이 있었던 것이다. 문빙은 형주에서의 전공으로 후작(侯爵)에 봉해진다.


그러나, 손권은 한번의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조위가 건국된 후, 다시 한번 병력을 이끌고 싸운다. 죽어라 달라붙는 손권에 대하여 문빙은 크게 교훈을 줘야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인원수가 자기보다 훨씬 많은 동오군을 맞이하여, 문빙은 의병지계(疑兵之計)를 펼친다. 자신이 군대가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이고, 결국 손권은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대치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양초가 끊기자 오군은 철수한다. 이때 손권은 자신의 지휘수준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빙이 기회를 틈타 쇄도해 들어가자, 손권은 어쩔 줄을 모르고 궤멸한다. 장료(張遼)가 소규모부대로 기습하여 상대방의 군심을 흐트린 것과 비교하면 문빙의 의병지계는 자신의 손실을 더욱 줄일 수 있어서, 후세의 병가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장료의 계책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오군은 방비할 수 있었고, 그가 함부로 출격한 것은 합비에 재난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문빙은 굳게 지키면서 지원을 기다려, 다시 공격했다. 훨씬 더 온당한 전법으로 보인다.


문빙의 가장 큰 공로는 조비(曹丕)를 구해준 것이다. 조비가 동오를 공격할 때, 강동이 긴장한다. 다행히 이때 전선에 손권이 없었다. 서성(徐盛)이 전권을 가지고 지휘하고 있었다. 서성은 화공으로 위군을 격파하며, 오군을 이끌고 반격하여 한때 조비를 포위했다. 다행히 문빙이 구해주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조비는 더욱 참담하게 패배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외부에서 온 형주인인 문빙은 조씨와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지고, 조위가 의지하는 남방의 기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