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역사상 2개의 '장초(張楚)' 정권

중은우시 2019. 6. 3. 20:40

글: 지봉간적역사(指縫間的歷史)


중국역사상 전후로 2개의 "장초(張楚)"정권이 탄생한다. 각각 대택향의거후 진승이 건립한 정권과 북송이 멸망한 후 여진족이 만들어준 장방창(張邦昌)의 괴뢰정권이다. 역사학자들은 양자를 구분하기 위하여 통상적으로 진승의 정권은 "장초"라고 부르고, 장방창의 괴뢰정권은 "위초(僞楚)"라고 부른다.


기실, 중국 수천년의 역사에서 여러개의 같은 이름의 정권이 탄생했다. 예를 들어, 국호를 "한(漢)"이나 "송(宋)"이라고 한 정권은 여러개이다. 이들 정권의 사람들은 스스로 "대한(大漢)"이나 "대송(大宋)"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렇게해서 단순히 국호만 부르게 되면 쉽게 혼동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왕왕 같은 이름의 정권의 앞에 구별하기 위한 문자를 붙인다. 그렇게 하여 역사학상 서한(西漢)과 동한(東漢)(혹은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이라고도 부름), 남한(南漢), 북한(北漢), 촉한(蜀漢)과 남조송(南朝宋), 북송(北宋), 남송(南宋)등의 명칭이 나타나게 된다. 그후 '서한'이라고만 하면 모두가 그것은 유방이 건립한 한왕조라는 것을 알고, '북한'이라고 하면 즉시 오대십국시기의 할거정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혼동이 생길 가능성이 크게 줄어 들었다.


그러므로, 서한, 동한, 남한, 북한, 촉한, 후한과 남조송과 북송, 남송등 정권의 이름은 모두 '사칭(史稱)'에 속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국호 앞에 동, 서, 남, 북등을 붙여서 구분하지 않았다.


진승이 진나라에 항거하여 건립한 정권을 "장초"라고 한 것은 "장대초국(張大楚國)"이라는 뜻이다. 진승도 명실상부한 '초왕(楚王)'이다. 그러나 사학자들은 뒤에 나타나는 초왕 경구, 초회왕 웅심등과 구분하기 위하여, 왕왕 진승을 진왕(陳王)이라고 부른다.


진승의 장초정권은 진나라말기의 난세에 건립되었고, 개략 반년가량 존속한다. 그후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에 의하여 멸망당한다. 진승은 도망치는 길에 차부장가(車夫莊賈)에게 피살당하고, 수급은 진군에 바쳐진다.


진승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반란은 진나라에 반항하는 의거의 서막을 열었고, 동방6국 왕실의 후인, 신료, 농민등이 속속 반기를 든다. 몇년후 항우가 진군의 주력을 멸망시키고, 패공 유방이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는 멸망한다.


장방창의 "장초"는 북송이 멸망한 1127년에 건립된다. 여진인들이 도와서 건립되었으므로, 사학자들은 진승의 장초정권과 구분하기 위하여 통상 '위초'라고 부른다.


위초는 겨우 30여일간 존속했다. 황제 장방창은 스스로 권력을 강왕 조구에게 내놓는다. 위초정권은 그렇게 끝이 난다. 양송교체기의 과도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위초는 존재시간이 너무 짧다. 그리고 역사책에 남을만한 중대한 사건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종 신경쓰지 않고 넘긴다. 대다수인들의 인상 속에서 북송이 멸망한 후, 곧이어 남송이 건립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일정한 역사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나 전문적인 역사학자들은 비로소 위초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장방창의 최후는 불행했다. 나중에 송고종 조구에게 피살된다.


진승의 장초와 장방창의 위초는 시간적으로 1300여년의 차이가 있다. 모두 단명정권이다. 다만 '장초'는 반진의 선봉으로 호소력이 있었고, 후세에 끼친 영향도 괴뢰정권인 '위초'보다는 훨씬 컸다. 그래서 진승의 장초가 사학계에서 언급될 확률은 장방창의 위초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