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전왕조의 황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지금은 십중팔구 모두 이 네 글자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참초제근(斬草除根). 풀을 뽑을 때는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 소위 "참초불제근(斬草不除根),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 풀을 뽑으면서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봄바람이 불 때 풀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황권의 앞에 모조리 죽여서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중국의 정치전통으로 보면, 정말 이렇게 잔인했고, 정말 이렇게 피비린내 났을까? 정말 조그만치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을까? 실제로 자고이래로 고대중국의 왕조교체시 전왕조의 왕족에 대하여 왕왕 '우대'조치를 해주었다. 800여년전의 쿠빌라이시기에 이르러 이 우수한 정치전통은 무너지고 만다.
관련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단어를 찾아낼 수 있다. "이왕삼각" 당나라때 학자인 두우(杜佑)는 <통전>에서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삼각이왕후(三恪二王后)" 만일 이전 2개왕조의 후예를 봉한다면 '이왕후'이고, 만일 이전 3개왕조의 후예를 봉한다면 '삼각'이다. 이렇게 봉읍(封邑)을 내리고 종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우대'함으로써, 본왕조가 승계한 이전 왕조를 존경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당금왕조의 정통지위를 표명하는 것이다.
상고시대부터 송나라때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이 정치전통을 준수했다. 예를 들어, 하(夏)왕조가 건립된 후에는 요순(堯舜)의 아들을 봉했고, 삼가귀진(三家歸晋)후에는 사마염이 위원제(魏元帝)를 '진류왕(陳留王)'에 봉하고, 남제(南齊)가지 이어진다. 200여년간 지속하여 진왕조보다 수명이 길었다; 당나라는 수공제(隋恭帝) 양유(楊侑)를 휴국공(酅國公)으로 삼아서 후한(後漢)까지 계속된다. 역시 당왕조보다 수명이 길었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은 비교적 간단한 경우이다. 기실 역대왕조에서 책봉할 때, 왕왕 최소 전2개왕조의 후예를 책봉했다. 위에서 언급한 당왕조는 수왕조후손을 책봉한 외에 북주(北周)의 후예도 책봉했다. '이왕후'라고 불렀다. 송나라는 가장 인자로웠다. 전왕조인 후주의 시씨(柴氏)가족후손을 책봉했을 뿐아니라, 수, 당, 오대후손과 오월, 형남, 촉한등 여러 나라의 자손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종묘제사를 책임지게 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왕삼각'은 빈례(賓禮)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조정에서는 이들을 신하로 보지 않고, 손님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신하의 예를 할 필요는 없었고, 그저 손님의 예만 하면 되었다. 이 점이 관건이다. "이왕삼격"은 반드시 이전 2개왕조 혹은 3개왕조의 후예를 책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전1개왕조만 책봉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들을 '손님'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이 정치전통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후덕하다. 그리고 이무 우아하다. 일단 전왕조의 후손을 책봉하면, 모반을 일으키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그들의 행위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들 '소국'의 수명은 심지어 더 길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조위의 후손이 맡은 '진류왕'이나 수나라 후예가 맡은 '휴국공'이 그것이다.
그러나, 쿠빌라이 이후, 이 정치전통은 무너져 버린다. 원군이 임안(臨安)을 점령한 후, 쿠빌라이는 송공제(宋恭帝) 조현(趙㬎)을 영국공(瀛國公)에 봉한다. 이치대로라면 조현이 모반을 일으키지 않는 한, 쿠빌라이는 이들을 먹여살려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도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그를 티벳으로 보내어 출가하여 승려가 되도록 한다. 나중에 다시 문자옥에 연루되어 원영종(元英宗)에게 사사된다.
청군이 입관한 후, 소위 '삼각이왕'의 정치전통은 철저히 사라진다. 예를 들어, 도르곤은 숭정의 아들 주자환을 고의로 독살한다. 그리고 투항해온 명나라 황실인원도 모조리 살륙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명나라황실후손을 찾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옹정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알지 못하는 명나라황실후예 주지련(朱之璉)을 데려다 '패방'으로 삼는다.
전체적으로 '이왕삼각'의 우량한 전통은 쿠빌라이에 의하여 단절된다. 그러나, 역대이래로 소족이 대족을 상대할 때 거의 하나의 예외도 없이 대족을 진압한다. 왜냐하면 대족이 그들믈 전복시킬까 겁냈기 때문이다. 특히 호소력이 있는 전왕조 황실이라면 더더욱 참초제근해야 했다.
"이왕삼각"의 정치전통으로 보더라도, "애산지후무화하(崖山之後無華夏), 명조지후무중국(明朝之後無中國)"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전왕조 황실에 대한 포용조차도 하지 못했으며, 속좁은 마음으로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것이 어찌 진정한 화하문명이겠는가?
지금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고대 중국의 정치전통을 비판하면서, 권모술수와 암흑만 있다고 얘기한다. 기실 이들 전문가들은 진정으로 중화문명의 흉금과 대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공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에 외국인들은 왜 중국을 거란(契丹), 도화석(桃花石)이라고 불렀을까? (1) | 2019.02.11 |
---|---|
무자비(無字碑): 무측천 이외의 황제들도 있었다. (0) | 2019.01.19 |
역사에 기록된 3번의 괄골요상(刮骨療傷) (0) | 2019.01.09 |
고대의 시호(諡號)제도와 규칙 (0) | 2019.01.08 |
봉선(封禪): 황제의 최고 영예 (0) | 2018.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