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중국의 사회

타향월(他鄕月): "나는 왜 중국을 떠나는가"

중은우시 2019. 1. 27. 23:44

글: 타향월(他鄕月)


들어가는 말


1개월전의 어느 날,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나는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서둘러 구매했고, 서둘러 수십년간 생활해온 중국을 떠났다. 비행기가 출발하는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약간 놓였다. 나는 원래 도망자가 아니다. 다만 당시 나는 확실히 '도망치고' 있었다. 원래는 스스로 겪은 이상한 일들을 전부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천텐용 선생이 쓴 글 <나는 왜 중국을 떠나는가>를 읽은 후, 겪은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기로 결정했다. 대담하게 그 자매편으로 내고자 한다.


나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나는 60년대생이다. 90년대초에 남방의 모 과기원에서 퇴직했다. 먼저 푸장(浦江)의 한 세게500대미국기업에 취직했다가, 나중에 회사를 창업했다. 회사규모는 크지 않았고, 60여명의 직원이 있었고, 3대의 회사차량으로 매일 출퇴근을 시켜주었다. 2012년에는 거시환경의 영향으로 규모를 줄이고, 그후 겨우겨우 유지해왔다. 사무실은 전후로 샤오루자쭈이(小陸家嘴)에서 강차오(康橋)로 마지막에는 얜쩐(鹽鎭)으로 쪼그라들었다. 최근에 이곳은 아주 패셔너블한 이름이 붙었다. 장장과학성남구(張江科學城南區).


기업을 20여년간 경영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착실하게 일하고, 반듯한 사람이 되자"는 모토를 신봉했다. 세금납부도 지역에서 선진적이었다. 연구원에서 일할 때 나는 민주당파에 가입했으니 정치적인 신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나는 UBC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여러 개의 특허를 얻었다. 그리고 여러 기관의 창업멘토도 맡았다. 아들에게 더욱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기 위하여, 나는 일찌감치 그를 카나다로 보냈고, 나 자신도 영주권이 있는 '메이플 리프 카드(the Card of Maple Leaf, 정식명칭은 Canada Parmanent Resident Card)'를 받았다. 항상 북미와 중국을 오갔다. 어쨌든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잘 지내고 있어서, 나는 만족해 하고 있었다.


가끔 기업을 하는 동종업계의 사람들과 한담을 나눌 때면, 그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은 바로 "중국에서 살려면, 절대로 여하한 정부직능부서의 사람에게도 밉보이면 안된다. 아주 하급관리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가는 겁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항상 가볍게 웃어 넘겼다. 나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큰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다는 것에도 감사했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잘 처리못해서' 그것을 확실하게 경험하게 된다.


잘 처리못해서, 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2018년 8월 20일 그날, 나는 아직 카나다에 있었다. 장저우(江州)회사의 책임자가 인터넷으로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공상국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누군가 우리 회사가 웹사이트에 "수 개의 유럽회사 총대리점"이라고 올린 것이 허위선전에 해당한다고 고발해서 조사하러 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잘 응대하라고 당부했다.


다음 날, 공상국의 1남1녀가 회사로 왔다. 책임자는 급히 외국회사와 체결한 계약원본 몇 부와 ISO품질인증증서 7부를 내놓고 해명했다. 외국회사의 웹사이트에도 우리회사의 연락처가 있어, 총대리점관계가 진짜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영어를 모른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즉시 전문번역회사를 찾아서 이들 자료를 번역하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벌금 20만위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책임자는 어쩔 수 없어, 즉시 2만여위안의 급행번역비를 주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문서를 번역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류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후, 그들은 창고에서 작업용 전기지게차를 보더니, 순간 눈빛을 빛내면서 먼저 사진을 찍었다. 그후에 지게차운전허가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운이 좋았던 점은 우리 직원에게 운전허가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다시 그들은 실망한다. 이어서 그들은 지게차허가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런데, 지게차는 리스해온 것이다. 그러니 라이센스는 당연히 리스회사에 있다. 그러나 그 남자직원은 막무가내로 말했다: '이것은 위험한 설비를 위법하게 운행한 것이다. 벌금3만위안." 놀란 담당직원이 그날로 지게차를 반환했다. 다만 그후에 그들은 내용을 가득 담은 <질문통지서>를 보내어 6가지 종류 수십페이지의 자료를 요구했다.


나중에 우리는 알게 되었다. 국가는 2010년부터 전기지게차의 허가증을 요구했다. 그리고 우리가 리스했던 지게차는 2007년에 생산된 것이어서 허가증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37,000위안의 돈을 써서 새로 지게차를 구하고, 공상국에 관련 허가증과 검사자료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전후로 근 6만위안의 돈을 들여서 이 공상검사를 막았다. 동종업계의 친구들은 그 말을 듣고는 모두 내가 너무 '일처리할 줄 모른다"고 웃었다. 이런 상황을 그들은 자주 만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홍빠오(紅包, 돈봉투)면 해결된다는 것이다. 업계의 일반적인 기준은 1명이면 5천위안, 2명이면 1만위안이라는 것이다. 돈봉투를 건네지 않으면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 그들에게 쉬운 일이다.


하급공무원들이 이렇게 부패했단 말인가? 나는 당시에 그 말을 듣고 너무 분개했다. 그래서 사람을 찾아서 확실하게 물어보려고 했다. 아들이 나를 도와서 질문통보서에 포토샵으로 2줄의 붉은 글자를 덧붙였다: "2명에게 5천위안 돈봉투를 주지 않았더니, 결과는 바로 이런 벌금통지서." 그리고 내가 소속되어 있던 "장저우기업서비스전문가지원다"의 단체위챗에 올려서 도움을 구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단체위챗에는 공상국 사람도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당사자인 남자직원에게 이를 보내준다. 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이 친구가 신통력이 대단해서, 고발한 후에 파출소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몇달 후부터 내가 '일처리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물망을 쳐서 사건을 만들다.


2018년 11춸 28일, 내가 귀국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파출소에서는 경찰차를 몰고 회사에 나를 찾아왔다. 나는 마침 회사에 없었지만, 즉시 전화를 걸었다. 파출소의 저우(周)경관은 공상국에서 고발했다면서 나에게 수사에 협조해서 내용을 얘기해 달라고 했다.


역시 나는 너무 순진했다. 직접 택시를 타고 그날 오후 두시에 파출소로 갔다. 그후 저우경관은 나의 핸드폰을 검사하더니, 사진이 어디서 났는지 물어봤다. 나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개략 4시경, 그는 나에게 종이를 내밀며 서명하면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었다: "아무 일도 아니니다. 이후로 주의하면 됩니다." 내가 서명을 하고나자, 그는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형사팀의 경찰이 나에게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다. 나는 함정에 빠진 것인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따라갔다. 누가 알았으랴. 나는 심문실로 끌려갔고, 일단 들어가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심문용 의자에 앉혀졌다. 무슨 10분이란 말인가. 5,6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였다. 마치 내가 '일처리를 너무 할 줄 모른다'고 불평하는 것처럼.


아마 저녁 9시반이 되자, 탕(唐)씨성의 경찰이 와서, 엄숙하게 나의 문제가 비교적 심각하지만 그들에게 잘 말해주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의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 상세하게 사건의 경과를 말해주었다. 그는 사진이 어디에서 났는지 물었고, 나는 사실대로 카나다의 아들이 나를 도와서 포토샵을 한 후에 컴퓨터로 보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진술을 유인했다: "이런 작은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가. 당신이 인정하면 바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음 이츨간 계속하여 외국회사와 미팅을 해야 해서(원래 11월 29일 스위스의 고객과 합자계약을 위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고,11월 30일에는 이탈리아의 한 회사와 기술양도건을 협의해야했는데, 결국 어쩔 수 없이 취소했다),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들이 시키는대로 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내가 서명을 하자 그들은 즉시 안면을 바꾸었다. 내가 "소란죄(尋衅滋事罪)"를 저질렀다며 즉시 체포하여 포강신구간수소로 보냈다. 소변검사도 하고, 지문도 찍고, 사진도 찍은 후, 내게는 수갑이 채워졌다. 안다의원(安達醫院)에서 신체검사를 하도록 보내어진다. 가는 길에 경관이 말했다. 나같은 경우는 형사체포이므로 3,4일이면 풀려난다고, 그러나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명문대학 박사가, 감옥의 변소청소를 하게 되다.


간수소안의 상황은 천편일률적이다. 먼저 모든 상의, 하의, 양말, 신발을 벗고 맨몸으로 아래 위로 다섯번 쪼그렸다 일어난다. 옷에 붙어 있는 금속단추는 모조리 잘라내고, 바지는 끈으로 허리에 묶는다. 매번 새로운 감방(監舍)에 들어갈 때면, 다시 알몸으로 쪼그렸다 일어서기를 5번씩 반복한다. 그리고 전체 수감인원에게 큰 소리로 자신의 '죄행'을 통보해야 한다.


첫째날 간 감방은 약40평방미터이고, 침대의 자리는 30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38명에서 40명이 있었다. 저녁에는 모로 누워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규정에 따르면 새로온 사람은 3일간 벽을 보고 앉아 있어야 하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비록 감옥규정에는 8시간수면을 보장한다고 되어 있지만, 안에는 24시간 등이 켜져 있어서, 보통사람은 편안히 잠들 수가 없다. 게다가 새로오면 매일 심야와 새벽에 3시간식 '당번'을 서야 한다. 제대로 잠자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감옥규정에는 "아침 점심때 각각 한번 바깥에 나가고, 매번 1시간씩"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갇혀 있던 반달동안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다.


안에는 뜨거운 물이 없다. 설사 12월의 한겨울이라 하더라도, 세수는 찬물로 해야 한다. 당연히 말릴 수도 없다. 아침, 정심, 저녁은 모두 철합에 찐밥을 벅는다. 위에는 몇 개의 자차이(榨菜)를 얹어 준다. 가끔 불고기와 생선이 나온다. 여하한 움직임 소변, 물마시기는 모두 보고해야 한다. 대변은 규정시간까지 참았다가 해결해야 한다. 못누면 다음 날까지 참아야 한다. 그리하여 변비가 걸려 고통이 심했다. 매전 심문을 받을 때마다 감옥에서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아 큰 소시로 보고해야 한다. 같은 감방의 동료들은 심리적인 문제들이 있어서, 자주 폭력적이 된다. 감방우두머리는 새로 온 사람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알아듣도록' 교육시킨다. 그런데 감옥의 벽에는 "범인의 합법적인 권익을 보고하고, 범인의 인격존엄을 존중한다"고 쓰여 있다. 나는 묵묵히 모든 것을 참아냈다. 마음 속으로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살아남자. 짐승처럼 살아남자.


4일후, 나는 새 감방으로 옮겼다. 약 20평방미터인데, 침대는 15명분인데, 실제로는 23명이었다. 들어갈 때는 역시 규칙에 따라, 뺨을 얻어맞고, 꿀밤을 맞았다. 감히 반항했다가는 일반적으로 감방우두머리의 발씻은 물을 억지로 마시게 한다. 다행히 나는 한번도 마시지 않았다. 이것은 이것은 앞에 4일동안 있던 곳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철권하에 세계관을 개조해서 비교적 '알아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후에 나는 매일 5번 감옥화장실의 대변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리고 반드시 칫솔로 변기를 닦아야 한다. 조그만큼의 때도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하나를 발견하면 체벌을 한번 받는다. 이것은 그래도 괜찮은 임무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정좌하고 앉아서 움직일 자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당국의 지식분자정책에 감사한다. 현재 나는 지금 나는 대변을 처리하는데, 마치 아이들이 고무찰흙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협조하면, 잘해준다?


기실, 들어간 다음 날, 즉 11월 29일 아침, 담당자가 신입생과 면담을 할 때, 나는 관할 검찰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변호사를 선임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감옥에는 검찰관이 없고,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다음 번 심문때 말하라고 했다.


우리 수감인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심문이다. 심문을 하면 수갑을 차고 심지어 족쇄까지 차고 공안이나 검찰에 가는데, 이것은 자신의 사건에 진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낮으로 기다렸는데, 마침내 12월 3일, 저우성을 가진 경관과 한 나이많은 경관이 와서 심문을 했다. 이것은 나의 제3차심문이다. 그들은 먼저 나에게 죄를 인정하는지 여부를 물었다. 나는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공안에서 상황을 분명히 조사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들에게 강제조치를 취한 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전에 회유해서 했던 허위진술을 뒤집었고, 그들에게 확인해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변호사르 선임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은 가족에게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 이렇게 위협했다: "진술을 뒤집으면 죄가 더 무거워진다. 지금 즉시 가족도 함께 잡아올 수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확실히 12월 3일 나의 가족을 찾아간다. 그러나, 내가 변호사를 선임해달라고 요구했다는 말은 전혀 전하지 않았고, 감옥에 면회도 허가하지 않았다.


12월 4일, 저우경관과  또 다른 쥐(鞠)경관이 와서 심문을 했다. 나에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냥 일을 내가 했다는 것만 인정하면 그들은 행정처벌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러면 깨끗해 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석으로 풀려나더라도 출국금지를 시켜서 해외로 나갈 수 없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 며칠간은 온도가 내려가서 나는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팠다. 그리고 밤새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가래가 기관지를 막았는데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화장지도 하루에 3장만 주어서, 콧물을 닦는데도 부족했다. 나는 생각했다. 오십여세가 되어서,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들의 뜻대로 서명했다. 그들은 내일이면 석방될 것이라고 했지만, 당연히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인 12월 5일, 저우경관이 다시 새로운 경찰을 데려 왔다. 나에게 상황설명서를 한 장 쓰라고 했다. 그들의 상사가 행정처벌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검찰원으로 보내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검찰원은 일반적으로 체포하지 않는다고(기실 그들의 목적은 검찰원에서 체포한 후 재판을 통해 형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설사 체포되지 않더라도 최대한 유치기간을 연장하고자 했다. 왜냐하년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래할 카드를 늘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글도 있으니,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그들은 다시 나의 핸드폰을 가지고 왔다. 핸드폰을 열어서 발송한 정보를 그들이 검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그들이 4번째로 핸드폰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증거대응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백업데이터는 그저 고증(孤證)일 뿐이다. 현재는 발송한 증거도 없고, 정보의 발송장소와 발송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니 유효한 증거를 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검찰에 송치하기에는 확실히 증거가 부족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정보는 국외의 컴퓨터에서 발송한 것이다. 핸드폰이 아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그만 두었다. 그동안 나는 의문을 제기했다. 어제 이미 석방하는데 동의했는데, 지금 왜 검찰원에 보내어 체포하라고 건의하는가. 내가 왜 당신들에게 협조해야 하는가. 너희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왜 인정하라고 하는가. 그러자 그들은 조금 더 참으라고 했다. 즉시 검찰원에 보내어 지시를 받아오면 나를 석방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서명했다. 그러나 역시 속임수였다.


9일 검찰원이 와서 심문을 할 때 나는 실제상황을 얘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검찰관의 뜻은 나에게 진술을 바꾸지 말라는 것이었다.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1주일을 더 고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미하고 증거도 부족한 사건을 위해서 나는 이미 최악의 결심을 했다. 나는 마음 혹으로 죽지만 않는다면, 설사 체포되거나 재판을 받더라도, 그때 진상을 얘기해도 된다. 그저 시간만 좀 더 연장될 뿐이다.


다시 하늘을 보게 되었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전체 과정에서, 나는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없었고,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다. 사후에 알게 된 바로는 공안에서 그들이 원하는 증거를 얻기 위하여, 한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다행히 나중에 검찰원이 나를 무죄로 인정했고, 검찰원문서가 내려온 12월 12일, 그날 오후 3시에 석방된다. 다만 이미 그 안에서 꼬박 15일간 갇혀 있었다. 일반적인 형사사건은 14일이 넘으면 반드시 기소하거나 석방해야 한다. 보기에 나는 일반적인 형사사건이 아니었던 것같다. 그러면 최대한 30일간 구속하고 7일을 추가할 수 있다. 그들은 나에게 추가버전을 제공했다. 아마도 나에게 더욱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 것일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석방시에, 파출소는 나에게 행정처벌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위에 쓴 것은 "행정구류7일"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행정소송포기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갈 수 없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제 당연히 '잘 알아서 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원시원하게 서명해 주었다.


이 사건에서 기묘한 점은 파출소에서 이미 행정처벌 7일로 결정했으면서 왜 검찰원으로 보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행정처벌 7일이면, 나머지 8일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공안은 입건부터 종결까지, 소위 행정처벌을 진행했고, 여하한 그럴듯한 관련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가장 핵심증거는 바로 단체위챗에 올린 사진인데, 그것도 외국에서 컴퓨터로 올린 것이다. 그리고 발송인이 내가 아니다. 공안은 관련물증을 확보할 수 없었고, 제3자증인도 없었다. 서술한 상황, 사유, 시간에는 헛점투성이이다. 겨우 속여서 얻어낸 진술조서만 있다. 그것만으로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가둬둔 것이다. 이번은 '소란죄'인데, 다음에는 무슨 다른 죄명으로 엮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약간만 법률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소란죄'가 어떤 것인지를. 나의 사건에서 위챗에 사진을 받은 대상은 내가 소속된 내부의 폐쇄된 업무단체위챗방이다. 물어본 것도 나의 회사에서 실제 발생한 사건이다. 그리고 아무런 실질적인 결과도 없다. 그런데 무슨 소란인가.


더욱 기이한 일은 내가 막 구류되자마자 가족은 낯선 변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10만위안의 변호사비를 주면 나를 풀려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나의 가족도 '잘 몰라서' 단칼에 거절했다. 이미 '잘 알게 된' 나는 안에서 어떻게 지시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10만위안을 지급하고, 자기들끼리 나눠가지면 괜찮았을텐데.


12월 12일 오후 3시, 무고하게 15일간 갇혀 있던 나는 마침내 석방된다. 세수하고 수염을 깎은 후, 나는 거의 거울 속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카락은 하얗고, 흐트러져 있었으며, 수염은 몇센티 자라 있었다. 머리는 매일 얻어맞아서 부어 있었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영양불량으로 이빨이 전부 흔들렸으며, 잇몸에서는 염증이 생겨 씹을 수가 없었다. 그저 죽같은 것을 마셔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감옥에서 식사를 할 때 찐 밥에 물을 부어서 직접 마셨다. 동시에 감기가 심하여, 목구멍이 아파서 성대가 부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다시 하늘을 보게 된 후, 내가 한 첫번째 일은 즉시 그날 밤의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것이었다. 이 악마들이 날뛰는 인간지옥을 벗어나고 싶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데 미치겠는게 그날 밤에는 1등석까지도 꽉 차있었다. 나의 머리 속에서는 오로지 한 마디 말 뿐이었다: "노아의 방주, 표 한장도 구하기 어렵구나!" 다행히 나는 다음 날 정오의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감옥에서 나온 후 중국에 24시간도 머무르지 않고, 12월 13일 오후 1시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떠났다.


나는 아주 잘 알았다. 카나다에 도착한 후, 처음 한 일은 즉시 카나다국적을 신청하는 것이었다. 비록 여러해전에, 이미 국적취득조건을 갖추었지만, 계속 미루고 있었다. 나는 계속 자신은 어쨌든 중국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국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멍청하게도 천조국의 순민으로 사는 것이 아주 행복하다고 여겼다. '위광정(偉光正, 위대, 광영, 정확한 공산당이라는 말로, 공산당을 비꼬는 말로 쓰임)'의 우민정책은 실로 너무 깊이 마음 속에 박혀 있었다.


악몽후의 생각


친구들이 내가 겪은 일을 들은 후에 난리가 났다.


시검찰원에서 일하는 옛날 학교동창은 나를 도와서 사건내용을 자세히 알아봐 주었다. 그리고 잘 아는 파출소 소장과 함께 분석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파출소가 당시에 형사구류의 강제조치를 취한 것은 이미 심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확실히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민주당파의 영도들도 열심히 알아봐 주었다. 나를 도와 법률위원회의 형사전문가에게 자료를 보게 했는데, 초보적으로 소란죄가 되지 않는다고 의견을 냈다. 형사구류조건을 잦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통전부에 보고하여, 공안측에서 해명하도록 요구할 것을 건의했다. 변호사친구도 열심히 나를 도와서 감찰위원회에 이렇게 명백하게 위법위규한 행위는 고발해야 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해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심사숙고후 모두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서방민주국가에서 같은 류 사건의 피해자라면 소송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라면? 이곳은 언제든지 말한마디로 자유를 잃을 수 있는 나라이다. 설사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국가배상법>에 따르면 기껏해야 1000여위안을 배상받는다. 이는 장저우에서 사람에게 한번 식사접대하는 비용되 안된다.


서방의 철인은 이렇게 말했다: 존재가 합리다. 확실히 천텐용 선생이 말한 것처럼, "공권력이 제약을 받지 않아서 관리들이 권력을 이용해 돈을 벌고 마음대로 괴롭힌다. 이것이 중국기업의 가장 큰 부담이다." 정부부처에서는 높은 기준으로 입법하고, 선택적으로 법을 집행하며, 관리들은 수시로 찾아가서 괴롭힐 수 있다. 그들에게는 뒤집어씌울 수 있는 죄명이 수두룩하다. 언제든지 감옥에 집어넣고, 분신쇄골하게 할 수 있다.


"돈을 내놓아라. 돈을 못내놓으면, 목숨을 내놓아라!" ""옛날에는 멸문시키는 지현(知縣)이 있었다면, 오늘은 언제든지 문을 닫게 할 수 있는 서리(胥吏)가 있다. 더욱 엉망인 것은 민영기업이 공권력의 침해에 대하여 아무런 구제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네가 과학자이건, 기업가이건 심지어 스타이건 간에. 그러니 아무런 권세도 없는 도시의 소기업주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악몽이 끝난 후, 나는 천여우시(陳友西) 변호사가 여러해 전에 쓴 <중국기업가는 모두 감옥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글을 회고해보았다. ㅜㅇ국에서 기업가는 마음대로 뜯긴다.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추세라면, 몇년이 지나지 않아, 그렇듯한 먹이감도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 방대한 안정유지비용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많은 '약취'하는 관리가 있다 그들이 손이 다음 번에는 누구에게 뻗을 것인가. 설마 그래도 모른단 말인가?


결국, 공민사회의 역량만이, 국가의 깡패화를 막을 수 있다. 현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같다.


2019년 1월 21일 밴쿠버에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