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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장원부인(壯元夫人)"이 남자라고?

by 중은우시 2019. 1. 25.

글: 포강객(浦江客)


우연히 <수원시화(隨園詩話)>를 읽다가 아주 특이한 단어를 보게되었다. "장원부인", 자세히 읽어내려가니, 청나라때의 한가지 사회현상을 맞닥드리게 되었다. "장원부인"은 여인이 아니라 남자였던 것이다!


청나라때의 대재자(大才子) 원매(袁枚)는 그의 <수원시화.권4,사일>에서 이런 이야기를 실었다.


건륭제 경진과(庚辰科)의 신과장원인 필원(畢沅, 秋帆)은 경성의 곤곡(昆曲) 단각(旦角) 이계관(李桂官)과 사이가 아주 좋았다. 필추범이 과거에 그제하기 전에, 이계관은 그를 아주 잘 보살펴 준다. 필추범이 병들면 약을 달여주고, 문을 나설 때는 옷을 입혀주고 수레를 따랐다. 필추범이 경진년에 진사가 되자, 이계관은 그를 위하여 백지책자(白紙冊子)를 사서 머리카락으로 칸을 만들어, 그에게 전시(殿試)의 시험공부를 하라고 권한다. 과연 그는 장원급제를 한다.


율양상공(溧陽相公)은 강희제 경진년 진사인데, 앵도연(櫻桃宴)에 다시 참석한다. 거기서 필장원이 연회에 출석할 때 그의 애인인 이계관을 대려온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늙어서 침침한 눈을 닦고, 장원부인을 한번 보고 싶다." 이를 보면 그 일은 아주 유명했던 것같다. 무자(戊子)년에 필추범은 섬서로 가는데, 이계관이 그를 만나러 간다. 지나는 길에 금릉을 지나게 되었고, 나이가 서른이 넘었지만 그의 미모는 여전했다. 원매는 장가(長歌)를 지어 그에게 준다. 그리고 그가 필추범으로 하여금 글시연습하게 했던 옛날 일을 칭찬한다: "만일 집안에서 도움을 준 순서를 따진다면, 마땅히 부인의 봉고(封誥)는 계랑에게 양보해야 할 거입니다."


사료를 뒤져보면, 필원(필추범)과 이계관의 동성애에 관한 전설은 당시에 '풍류가화'였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때 야사필기에 여러번 기록이 나온다. 필추범과 이계관의 동성애는 역사상 확실히 존재했었다.


원매는 율양상공 사이직(史貽直)의 제자이다. 필추범과도 교분이 있다. 그래서 <수원사화>의 필추범이 장원급제한 기록은 아주 상세하고 생생하다. 게다가 원매는 직접 이계관에게 시를 지어주었다. 당시 이계관은 이 일을 인정했다. 조익(趙翼)도 이계관의 친구이다. 마찬가지로 시를 지어 이계관에게 주었다. 청나라때의 유명한 소설 <품화보감>에는 이 '풍류가화'가 기록되어 있다. 동시대에 경극 <장원부인>도 이 일을 다루고 있다.


청나라는 원래 '남풍(男風)'이 극성했던 시기이다. 남자들의 동성애는 공개적이었다. 사대부가 몇몇 배우들과 사귀며 동성애를 하는 것을 그다지 무상대아(無傷大雅)의 풍류운사(風流韻事)로 여겼다. 남자배우들이 동성애를 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특히 풍류적이고 잘생긴 단각은 동성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청나라말기 상해의 <신보>에 <새금화우귀이지(賽金花遇貴二志)>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유명배우 우장아(于莊兒)가 좋아한 사람은 입시랑(立侍郞), 여어사(余御史)등이 있다. 모두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며, 수한병진(水旱竝進)하는 사람들이다. 우장아는 처음에 상공으로 즉 '한로영웅(旱路英雄)'으로 입시랑, 여어사와 모두 향화연(香火緣)이 잇었다." 여기에 나오는 '한로영웅'이니 '향화연'이니 하는 말은 모두 남성동성애를 가리키는 말이다. '입시랑'은 당시 내무부대신, 호부상서 입산(立山)을 말하고, 그는 조정의 고관이다. 배우와의 동성애관계가 이렇게 공개적인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이것은 풍아탈속한 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남풍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다.


청나라때 관리들의 동성애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많은 경우 자신의 시동(侍童), 시관(侍官), 시원(侍員), 상시좌우(常侍左右)를 두어 장자리를 보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들과 어울렸다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경사 대신들은 배우를 불러서 밤에 술을 마시고 노는 것을 밤생활중 하나로 여겼다. 이런 동성애활동은 궁중태감, 만주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조익은 <첨폭잡기(檐曝雜記)> 권2 <이원색예(梨園色藝)>에서 이렇게 적었다: 경사의 이원에 색예가 있는 자는 사대부들이 왕왕 서로 압(押)했다....초근 들어 듣기로 촉인(蜀人) 위삼아(魏三兒)라는 자가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끄는데, 왕공, 대인들이 서로 앞다투어서 그와 사귄다."


청나라때 남풍의 풍속은 명나라와 비슷한 전통문화라는 원인 이외에, 정치적인 원인도 있었다. 쳣째는 만주족은 한족과 동화되는 것을 겁냈다. 청나라통치자들은 한족문화의 영향을 받을까 겁을 내어 만한통혼을 금지했다. 그리고 한대는 관리들이 기녀와 놀아나는 것도 엄금했다. 그래서 동성애는 합법적인 욕망배출방식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건륭제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대청에 동성애 기호가 있는 건륭제가 나타나자, 온 조정이 즉시 남풍의 유행을 불러온다. 셋째, 명나라의 유로유소(遺老遺少)는 스스로 타락하고자 했고, 명나라가 망한 후 적지 않은 유신과 문사들은 새로운 군주를 모실 면목은 없고, 그렇다고 이를 되돌릴 힘도 없다. 그러다보니 성색에 빠지고 기녀와 놀아나고 술에 취하는 등의 방식으로 정치를 회피하게 된다. 청나라통치자들은 그저 눈감아주고, 마음대로 하도록 방임한다. 어쨌든 그렇게 놀아나는 것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보다는 나으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