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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전설의 혈발자교(血脖子敎): 철혁인야(哲赫忍耶)의 전세금생

by 중은우시 2019. 1. 19.

글: 왕승리(王勝利)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 9살된 회족 사내아이 마명심(馬明心)은 숙부와 하주(河州, 지금의 강숙성 임하)에서 출발하여,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그들은 운남을 거쳐 출국하고, 예멘에서 한차례 폭풍을 만나


만간에는 2백여년간 전해져온 신비하고 전설스러운 교파가 있다. 속칭 "혈발자교"('발'은 목이라는 뜻이니, '피흘리는 목'이라는 의미이다)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살벌한 이름의 붙여졌을까?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 9살된 회족 사내아이 마명심(馬明心)은 숙부와 하주(河州, 지금의 강숙성 임하)에서 출발하여,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그들은 운남을 거쳐 출국하고, 예멘에서 한차례 폭풍을 만나 숙질은 흩어진다. 이 9살된 사내아이는 의지할 곳없이 방황하다가 한 도당(道堂)에 거두어진다. 이곳에서 살면서 15년간 공부를 했다. 24살이 되었을 때 그는 스승의 지시에 따라 중국으로 돌아가서, 감숙, 청해 일대에서 이슬람교 "철혁인야"파의 교의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때, 이곳에서 지배적인 교파는 호부야(虎夫耶)파 화사문환(花寺門宦)이었다. 교주인 마래지(馬來遲)가 예멘에서 수도하고 돌아왔는데, 일찍 돌아오기도 하고 나이도 많았다. 마명심은 낯선 땅이지만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여 후래거상(後來居上)하게 된다. 그때 가난한 사람들은 아훈드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종교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철혁인야는 바로 일종이 고행승식의 교파이다. 그들은 종교를 내세워 재물을 모으는데 반대했고, 포교를 하면서 돈과 재물을 받지 않았다. 마명심은 일찌기 정원이 대추나무에서 딴 대추 한접시로 성찬을 대신했다. 그의 집에는 맷돌을 돌리는 당나귀 한 마리 없었다. 일년내내 처가 짜준 낡은 옷을 입고 전도했다. 철혁인야는 가난한 사람의 종교로 불린다. 현지에서 신속히 전파되면서, 신강, 섬서, 운남에서도 모두 모여들었다.


이때, 그의 선교는 모두 비밀리에 진행된다. 관청에서는 모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교와 구교가 서로 평화공존했다. 교주의 능력에 의존하여 자유경쟁한 것이다. 다만 최종적으로 교리가 다름에 따라 신도를 빼앗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갈등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20여년간의 교쟁(敎爭)이 벌어진다. 구교에서는 신교를 '사교(邪敎)'라고 관청에 고발한다. 마명심은 하주, 순화(循化)에서 차례로 쫓겨나 회녕(會寧)으로 돌아온다.


순화에서 싸움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형제 2명이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바람에 모친의 장례식을 놓고 한 명은 신교의 아훈드를 모셔오고, 다른 한명은 구교의 아훈드를 모셔왔다. 형제간의 싸움은 살인사건으로 번진다. 건륭46년, 신교의 살라족(撒拉族) 열의사(熱依斯, 지역책임자)인 소사십삼(蘇四十三)은 사람을 이끌고 구교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를 낸다. 관청이 병력을 파견하여 진압했다. 소사십삼은 신교이 사람들을 이끌고 맞이한다. 병력을 이끌고 온 장군이 물었다: "너희는 신교이나 구교이냐?" 이들은 모두 머리를 굴려서 "구교입니다"라고 말한다. 장군이 말했다: "너희는 무서워할 것없다. 이번에는 너희 편을 들어서 신교만 죽일 것이다." 화가난 교도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날 밤에 장군 2명을 죽인다. 그리고 다시 주관(州官)도 죽이고, 하주성을 점령한다 .이렇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관청은 회녕에서 마명심을 체포한다. 그리고 그를 난주(蘭州)로 압송한다. 그의 살라족 의녀(義女) 새력맥(賽力麥)과 소사십삼은 사람을 이끌고 와서 성을 포위한다. 성안의 병력이 많지 않아서, 관청에서는 마명심을 성벽 위로 끌고 나가서, 그에게 사람들이 퇴각하도록 설득하게 한다. 무슬림들은 교주를 보다 미친 것과 같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인'을 외쳤다. 소사십삼은 그에게 명령을 내려달라고 청한다. 마명심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명령할 것이 없다. 모두 돌아가라." 소사십삼은 말한다: "어르신께서 저희에게 물건을 주십시오" 동문에서 마명심은 지팡이를 던진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빼앗다가 여러개로 쪼개어진다. 다시 서문에서는 두건을 던진다. 마찬가지로 찢어져서 조각이 된다. 무슬림들은 그 조각들을 가슴에 품고 죽어라 성을 공격한다. 그리하여 순무(巡撫) 왕정찬(王廷璨)은 명을 내려, 성벽위에서 마명심을 죽인다.


무슬림들은 목표가 사라지자, 난주성 서쪽에 있는 메마르고 물도 없는 화림산(華林山)으로 들어가서, 몇 달간 버티다가 관병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만다.


건륭제는 처력인야에 대하여 금지교살정책을 시행하고, 사교로 선포한다. 회민들이 다시는 신교를 믿지 못하게 금지한다. 마명심의 아들은 운남으로 유배가고, 처 장씨(張氏)와 세 딸은 이리(伊犁)의 팔기관병의 집안에 노예로 보내어진다. 복수를 위하여 장씨는 음력 십이월 그믐날 야밤을 틈타 팔기관병일가 30여명을 죽이고, 처형당한다.


3년후, 정원(靖遠)에서 다시 전오(田五)와 장문경(張文慶)이 이끄는 철혁인야반란이 일어난다. 내세운 것은 도조(道祖)이 복수와 관청의 멸교(滅敎)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장례식때 시신을 덮는 베를 입고 전투에 들어간다. 건륭은 아계(阿桂)와 화신(和珅)을 파견하여 진압한다. 융덕저점(隆德底店)에서 패배하고 투항한 무슬림의 군내에서 15세이상의 남자는 1천여명을 참수하고, 부녀자들은 노비로 보낸다. 마지막 인마는 통위(通渭) 이북의 석봉보(石峰堡)에서 포위당한다. 관군은 이드알아드하(희생절)에 예배보는 동안에 공격한다. 무슬림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피살당한다. 사상자가 많았고,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청혁인야는 다시 지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된다.


2


철혁인야의 제2대 목륵십덕(穆勒什德, 導師)인 평량태야(平凉太爺) 목헌장(穆憲章)은 평령성 바깥의 한 마른 우물에서 30년간 교를 이끈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는 교의 일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죽을 때, 그는 교권을 영무(靈武)의 마달천(馬達天)에게 넘긴다.


마명심의 전통에 따라, 교주의 지위는 '전현부전친(傳賢不傳親)"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달천때부터 이 규칙은 깨진다. 잔혹한 진압이 지나가자, 무슬림의 종교열정은 다시 일어난다. 그는 신분이 드러나, 체포된 후 동북으로 유배를 가는 도중에 사망한다. 그의 아들 마이덕(馬以德, 유명한 馬化龍의 부친이다)이 교주의 지위를 승계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바로 알라의 뜻이라는 것이다. 너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 네가 이슬람을 부흥시킬 수만 있다면.


청나라정부의 유배는 오히려 철혁인야의 교리를 사방에 퍼트리고, 신도를 늘이게 만들었다. 중국의 절반에 교당이 생기고 마이덕시대에 신교는 다시 발전하게 된다.


"철혁인야"의 아랍어 의미는 "소리높여 찬송하라"이다. 즉, 아침예배후에 큰 소리로 찬송가를 낭송하는 것이다. 교도들은 경전을 읽을 때, "만물에 주인이 없다"는 부분을 읽을 때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흔들어 아니라고 표시하고, '오로지 알라"라고 할 때는 왼쪽의 심장방향으로 흔들어 그렇다고 표시한다. 민간에서는 이를 요두경(搖頭經)이라고 부른다. 예배하는 사람의 낭랑한 낭송소리가 듣기에 좋아서 감염력이 있다.


일찌기 철혁인야는 청나라조정으로부터 금지당했기 때문에, 소리높여 예배한다고 부를 수 없어서 딱딱이를 쳐서 신호를 했다. 이 습속은 이후 전해져 내려가서 하나의 표지가 된다. 마명심이 난주감옥에 있을 때 수염이 태워져 버린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도들은 아랫턱의 약간의 수염을 제외한 뺨의 수염은 모조리 깍아버린다.


이슬람교의 '녹색깃발'과는 달리, 철혁인야는 '홍색깃발'을 들었다. "우리의 도조께서 알라로부터 받은 것은 '대대로 붉은 기를 들으라'는 명령이었다. 사망한 사람은 피를 묻힌채로 묻고, 피묻은 옷을 들고 천당에 들어간다!"


교도들 사이에는 이런 노래가 전해져 온다:


사명불사교(舍命不舍敎)

감두풍취모(砍頭風吹帽)

전배도시혈발자(前輩都是血脖子)

아야유개홍호자(我也留個紅鬍子)


목숨은 버려도 신앙은 버리지 않는다

목이 베이니 바람에 모자가 날린다.

선배들도 모두 목에 피를 흘렸고,

나도 피붇은 수염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혈발자교"라는 명칭의 유래이다.


패퇴해서 오자, 그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적보(金積堡)의 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한다.


마이덕시대의 휴양생식을 통하여, 19세기 하반기 제5대 목륵십덕 마화룡(馬化龍)의 시대가 되면서, 철혈인야의 세력은 전성기에 도달한다.


마화룡은 교인들에게서 "십삼태야(十三太爺)"라고 불린다. 그는 회족들 사이에 명망이 아주 높았고, "뇌전귀신과 같이 감히 어기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관직도 샀다. 그는 금적(金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전국에 상점과 교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수출입업무도 했다. 이때 청나라조정은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동남쪽은 태평천국, 염군의 반란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며, 운남에서는 두문수(杜文秀)가 대리국 이슬람정권을 건립한다: 동치원년(1862년), 섬서에 혁명당(赫明堂), 우득언(禹得彦), 백언호(白彦虎)등이 이끄는 "동치회란(同治回亂)"이 발발하여, 서북쪽도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하에서 마화룡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반란의 기치를 내건다.


오충(吳忠)에서 그는 영하도대, 지부등 지방관리를 죽인다. 다음 해, 영무를 함락시키고, "이만여명을 도살한다" 혁명당의 요청을 받아, 낙타부대로 화정, 동지원 일대에서 버티고 있던 섬서회족에게 무기와 양식을 제공해준다. 섬서회족이 패퇴해서 오자, 그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적보(金積堡)의 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한다.


우두산(牛頭山), 와우산(臥牛山)

살득회아만만천(殺得回兒萬萬千)

해당화개새홍과(海棠花開賽紅果)

섬서회회래투아(陝西回回來投我)

장군수복안지리(將軍收服按地利)

차사전정불유기(此事前定不由己)


1866년 그는 일찌기 조정에 투항하며 영주(靈州)등 성을 내놓은 바 있다. 그리고 이름을 마조청(馬朝淸)으로 고치면서 귀순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무장을 해제하지는 않았다. 좌종당의 인마가 섬서회족을 따라 도착했을 때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1869년, 마화룡의 반군은 다시 영주를 점령하여 한족 10여만명을 도살한다. 좌종당은 감숙동부와 섬서북부의 각 세력을 정리한 후, 동치9년 남북중으로 금적보에 대한 삼로포위를 완성한다.


동치9년 십일월 십육일, 막다른 골목에 몰린 마화룡은 스스로를 묶고 동문으로 나와 숙적인 유금당(劉錦棠)의 상군에 투항한다. 일족팔문의 죽음으로 부하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다. 그러나 관군은 그가 성벽에 숨겨둔 무기를 발견해낸다. 그리하여 동치10년 정월십삼일 오충의 북문밖 황하탄에서 마화룡은 능지처참을 당한다. 좌종당은 마화룡이 회족들 사이에 명망이 높은 것을 알고 있어서, 영하에 제2의 이원호가 나타나는 것을 꺼려서, 이번 기회에 그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동시에 처결한 것은 일족 팔가 300여명과 그를 따르던 부하 천팔백여명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유금당은 행형전에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오늘 멸족되는데, 이후 누가 너의 후계자인가?" 마화룡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무릇 '만물비주(萬物非主), 유유진주(唯有眞主)'를 외우는 사람은 모두 나의 후계자이다." 유금당이 말한다: "그러나 이후 누가 너를 위해 복수해 주겠는가?" 마화룡이 말한다: "사십년후 누군가 나를 위해 복수해 줄 것이다."


사십년후에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4


조정은 마화룡의 수급을 전국각지의 회민거주지역을 순회하여 보여준다. 10년후에야 비로소 난주로 돌아온다. 회족들은 그의 수급을 장가천(張家川)에 묻는다.


그에게는 두 명의 미성년 손자들만이 죽음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청의 법률에 따르면, 12세가 될 때 거세하여야 한다. 형인 마진성(馬進成)은 거세당한 후 개봉의 한 만주족 집에 노예로 보내어진다. 동생 마진서(馬進西)는 서안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에 마원장(馬元章)이 조직한 철혁인야교도들이 구출해준다. 그들은 호송관리를 죽이고, 수레를 부수고 마진서를 업고 전국각지의 철혁인야 교당에 감추었다. 나중에 서안을 거쳐 장가천으로 되돌아온다.


마원장은 자가 운붕(雲鵬)이고, 도조 마명심의 4대손이다. 교민들은 그를 "사구태야(沙溝太爺)"라고 존경해 불렀다. 운남 동구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이슬람경전과 한학에 모두 능통하여 학식이 뛰어났다. 운남의 회족반란후, 동구촌은 삼년반동안 포위된다. 그의 부친과 부하들은 모두 전사했고, 그는 몇몇 심복을 데리고 7리 길이의 비밀지하통로를 통하여 탈출한다. 그리고 한족으로 변장하고, 허리에는 담뱃대를 차고 운남에서 사천을 거쳐 혁철인야의 비밀근거지인 감숙 장가천으로 간다.


동치10년의 참혹한 실패이후, 마원장은 남은 무리를 수습한다. 변량에서 그는 암중으로 마화룡의 손자이자 제6대 목륵십덕으로 추인된 마진성(실제로 교를 장악하지는 못했다)을 십삽년간 따른다. 그를 맞이하여 데려가고자 했으나 거절당한다. 이미 심신이 모두 망가진 이 젊은이는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저 운명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는 25살에 죽는다.


마원장은 사람을 시켜 마진서를 데려오고, 서태후가 서안으로 피난온 틈을 타서, 죽음을 무릅쓰고 글을 올려 사면을 청한다. 그후 조정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이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하여 마화룡의 후손을 남길 수 있게 된다.


마화룡의 옛 신도들의 추대하에, 마신서는 장가천에 남천도당(南川道堂)을 만든다. 중화민국이후 다시 조상들이 살던 금적으로 돌아가서 판교도당(板橋道堂)을 세운다.


교주의 자리를 놓고, 이마(二馬)간의 갈등이 생긴다. 두 사람은 모두 상대 목륵십덕으로부터 구두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철혁인야는 사구, 판교의 두 파로 나뉘게 된다.


마원장은 널리 회족 한족의 각계각층과 어울렸다. 철혁인야의 참혹한 역사를 감안하여, 그는 일처리에서 기민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는 교리를 수정하여, 속해달의(순교자)주의를 약화시키고, 열사가 되기 위해 열사가 되지는 말라고 강조한다. 그의 시대에 철혁인야는 더욱 평화적이 되고 정부와의 화해를 실현했다. 그는 마선인(馬善人), 마상인(馬上人),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불리웠다. 중화민국의 상층부 예를 들어,원세개, 단기서, 소력자, 우우임, 호종남등은 그에게 대련을 보내거나 편액을 써서 보내 회유하려 했다. 민국8년, 그는 독군 장광건의 녹니대교에 앉아 난주성으로 들어간다. 이때가 그의 인생의 최전성기였다.


1920년, 마원장은 서길탄 도당에서 포교할 때, 해원대지진으로 사망한다. 그의 아들 마진무(馬震武)는 사구의 교무를 계승한다. 철혁인야의 목륵십덕은 7대까지만 이어지고, 그 뒤로는 단지 수교인(守敎人)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다시 마열손(馬烈孫)에게 이어진다. 판교쪽은 마진서에서 아홉째아들 마등애(馬騰靄)로 이어진다.


1939년 5월, 국민정부에 대한 서해고 철혁인야 폭동이 일어난다. 지도자인 마원장의 손자 마국서(馬國瑞), 마국린(馬國璘)형제는 전후로 만명을 모아 융덕, 고원을 포위공격하다가 패배하여 사망한다.


1993년, 서길 철혁인야의 내부에 여러차레의 대규모 복수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쌍방은 총기와 대포등 무장을 동원하였고, 사상,실종자가 70여명에 달한다.


1994년, 영하회족자치주 정협부주석, 정국정협 상임위원인 마열손은 군중을 모아서 싸우고 살인을 저지르고, 불법으로 무기를 제조 판매했다느 ㄴ죄명으로 유기징역 15년형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