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영년(英年): 서태후가 총애한 풍수가

by 중은우시 2019. 1. 20.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시행하는 광서제는 영대(瀛臺)에 연금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최고권력을 다시 장악한다. 기실 1년전에, 대권을 놓칠까 우려하던 서태후는 이미 광서에제게 손을 쓴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칠왕분(七王墳, 광서제의 생부인 순친와 혁현의 능묘)의 앞에 있는 은행나무를 둘러싼 풍수다툼이다.


당초, 칠왕분의 묘지를 쓰고 난 후에 정말 혁현에게 좋은 운을 가져다 주었다. 동치제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후, 혁현의 아들이 새 황제에 오른다. 그러나 복에는 화도 따르기 마련이다. 혁현이 죽은지 4년만에,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제당과 후당의 다툼은 날로 첨예해진다. 광서제는 전쟁을 주장했고, 유신을 주장했다. 이 일련의 거동은 권력을 탐하는 서태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한 풍수선생이 서태후에게 계책을 바친다: 반드시 칠왕분 앞에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를 잘라서, 풍수의 맥을 끊어야 한다. 그래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광서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히 감독하여, 은행나무를 잘라버린다. 광서제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방성대곡한다.


그렇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를 낸 풍수선생이 누구인가? <덕종유사>에 따르면, 그는 바로 당시 유명한 황실 풍수대가 영년이다. 자는 국제(菊儕)이고, 성은 하씨(何氏)이다. 한군정백기(漢軍正白旗) 사람이다. 광서연간에 좌익총병(左翼總兵), 정홍기한군부도통(正紅旗漢軍副都統),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郞)등의 관직을 지낸다. 그는 감여지술(堪輿之術, 풍수)에 정통하고, 이연영(李蓮英)과 사이가 좋아서 관료소서 순조롭게 승진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영년은 두번의 유명한 '감여풍수방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이화원 수선방(壽膳房)의 우물 방위와 길일을 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화원 산문공사착공등의 길일길시를 택일한 것이다. 영년은 시기를 잘 맞추어 서태후에게 은행나무를 잘라버리라는 계책을 올려 서태후가 정적을 누르고 훈정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므로, 그 후에 서태후의 총애를 받는다.


영년이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의화단의 난이 벌어진다. 광서26년, 산동, 하북 일대의 의화단이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걸고 호호탕탕하게 북경성으로 진군했다. 서태후는 그가 광서제를 폐위시키려는 생각을 열강이 반대하는데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의화단을 초무하여 서방열강에 대항하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새황제를 옹립하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이때 영년은 다시 기회를 포착하고, 조야에서 의화단의 법술에 회의를 품고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의화단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년도 의화단과 마찬가지로 풍수를 믿는다. 둘째, 영년은 계속하여 서태후의 안색을 살피며 행동했다. 경사의 의화단운동이 일어날 때, 영년은 이미 서태후가 의화단을 이용하여 외국세력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의도를 간파한다. 그리하여, 영년은 서태후의 총애를 받은 영년은 좌익총병이 되어 우익총병과 협조하여 의화단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이때의 영년은 경진지구 의화단통령으로 장친왕(莊親王), 협판대학사군기대신(協辦大學士軍機大臣)의 바로 다음가는 서열3위가 된다. 이를 보면 지위가 이미 상당히 혁혁해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광서26년 칠월 이십일, 경성이 함락된다. 영년은 서태후를 따라 서쪽으로 도망친다. 관직은 좌도어사(左都御史), 호위행영(護衛行營)이 되어, 힘껏 애를 쓴다. 그러나, 제국주의열강의 '징흉(懲凶)'요구에 서양열강과의 의화를 책임진 이홍장, 장지동의 연명상소로 장친왕 및 영년등이 나라를 망친 죄를 추궁해야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압력을 받은 서태후는 처음에 영년을 삭탈관직한다. 나중에는 다시 영년을 서안의 감옥에 넣는다. 영년은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겪는다 하늘에 청해도 도와주지 않고 땅에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풍수학은 여기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월 초엿새, 영년은 서태후로부터 "참감후(斬監侯)"를 "사자진(賜自盡)"으로 낮춰주는 신년선물을 받는다. 그리고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한다.


나라를 망친 죄를 어찌 영년 혼자서 뒤집어 써야겠는가? 그는 그저 당시 전체 경사의 풍수열기의 조류를 탔을 뿐이다. 당시 조정은 극력 풍수를 조장했고, 황실은 자금성내에 전당을 짓거나, 아니면 교외에 제왕의 능묘를 짓거나, 모두 풍수를 먼저 보았다. 특히 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한 것은 의화단에 신기한 법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문만 외우면 '철포삼' '금종조'의 무공을 익힌 것처럼 도창불입(刀槍不入)이 된다. 서양인의 총포도 막아낼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모르겠는가? 청말의 이 만신창이의 큰 배는 이미 서방열강의 견선이포(堅船利砲)를 당해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