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새금화(賽金花)의 임종전 매체인터뷰

중은우시 2019. 3. 8. 15:46

글: 반경적(潘京的)


1936년 12월 4일, 새금화가 병사한다. 그녀가 죽기 전에 만주족 언론인인 안의민(顔儀民)은 북평아동신문사(北平亞東新聞社) 사장의 신분으로 그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인터뷰는 경자지변(庚子之變)과 관련한 항간의 그녀에 관한 모든 소문을 다루었다. 그리고 유반농(劉半農)과 비교하면, 안의민의 질문은 더욱 구체적이고, 새금화의 대답도 간명하고 핵심을 말했다.


안의민의 원래 이름은 경의(景毅)이고, 예허안자씨(葉赫顔扎氏)이다. 신문사 사장을 하기 전에, 그는 서십고시민제1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민강보>의 편집인을 지낸다. 나중에 신문기자의 신분으로 북평민국대학신문학과의 방청생이 되기도 했다. 1936년 남경정부에서 사장의 허가증을 받은 후, 바로 이해 겨울, 부사장인 왕종명(王宗明)을 데리고 새금화가 거주하는 천교(天橋) 거인리(居仁里)로 가서 인터뷰를 한다. 안의민이 나중에 쓴 <새금화와 자금성>이라는 글을 보면, 그들의 방문을 새금화는 환영했다고 한다. "같이 살고 있던 여종인 고마(顧媽)는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었다" 이때 새금화는 이미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환갑을 ㅓㅁ겼지만, 그래도 아직 풍운유존(風韻猶存)했다. 그들은 침상머리에 걸터 앉아서 고마가 가져다준 차와 소주과자(蘇州瓜子)를 먹었다. 침상 앞에는 웅크리고 앉아 있는 흑백화의 하바구(哈巴狗)가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얘기를 나눈다.


안의민: 당신이 경자사변때, 북경의 백성을 보호하고 황궁내원을 보호하는데, 일정한 공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해줄 수 있겠습니까?

(안의민은 글에서 "그녀는 나의 말을 듣자, 강심제를 맞은 것처럼 즉시 정신을 차리고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백옥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나는 그게 진짜이빨인지 입힌 가짜이빨인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왕선생(왕종명)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새금화의 흰 얼굴피부를 보면, 거의 주름살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빨도 분명히 잔찌일 것이라고.)


새금화: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을 공격할 때, 나는 아직 천진에 있었다. 듣기로 팔국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발드시(瓦德西)라고 했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문경(文卿, 洪鈞)을 따라 독일 대사관으로 갈 때, 나의 이름은 부채운(傅彩雲)이었다. 그때 독일에서 나는 사교계의 풍운인물이었다. 그래서 상류인사들을 내가 거의 알았다. 발드시가 북경에 오고나서 한간(漢奸)들이 그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나의 상황을 발드시에게 얘기해주었다. 발드시는 알고나서 깜짝 놀랐다. 한간이 나를 데려가서 북경으로 갔고, 발드시와 중남해(中南海) 의란전(儀鸞殿)에 거주하게 되었다.


안의민: 당신은 독일어를 할 줄 압니까? 


새금화: 나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16살때부터 문경을 따라 여러 나라를 갔고, 나는 말은 배웠지만 글은 못배웠다. 먼저 사람을 불러서 외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 매번 한 국가에 가면, 금방 그들의 말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밖에 말을 봇하겠다. 문자는 내가 몇 자 알지 못한다. 외국어신문은 내가 읽을 줄 모른다.


안의민: 북경의 청왕조 유민들의 말을 들으면, 당신이 북경성에 적지 않ㅇ느 공덕을 쌓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두개 얘기해줄 수 있겠습니까.


새금화: 팔국연합군이 막 북경성에 들어갔을 때, 살인 방화, 간음, 약탈을 모두 저질렀다. 북경에 남은 화의대신, 이홍장, 경왕야(慶王爺)같은 분들이 모두 궁녀를 통해 나에게 부타해왔다. 백성을 죽이지 말고, 자금성을 보호해주고, 연합군이 들어가지 말아달라는 등등. 나는 발드시에게 얘기했고, 그는 정말 명령을 내려,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지 말도록 했다. 어떤 때는 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시간을 내서 발드시와 말을 타고 길거리를 다녔다. 그때 팔국연합군은 북경성을 점거하고, 팔국의 군대가 각각 성을 나누어 맡았다. 그래서 각 점령지역을 우리는 모두 순시해야 했다. 몇 개의 번화한 큰길거리에서는 상인들이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북경사람들이 다 봤다. 그리고 영록(榮祿)도 서신을 몰래 궁녀를 통해 보내서 부탁을 해왔다.


안의민: 당신이 영록을 어떻게 압니까?


새금화: 내가 천진에서 기녀로 이름을 걸고 있을 때, 영록이 나를 보러 천징에 왔다. 그는 소문을 듣고 온 것이다. 나중에 그는 나를 그의 공관으로 데려가서 거주하게 했다. 그때 나는 원세개도 알게 된다. 그들은 비밀리에 서태후와 광서제를 천진으로 모셔와서 열병을 하려고 모의했다. 가짜 병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모해하려 했다. 그것도 나는 다 알고 있다. 원세개도 나를 불러서 자죽림(紫竹林)에 가서 춤을 췄었다.


안의민: 그때 춤이 유행했습니까?


새금화: 천진은 각국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자죽림 댄스홀은 광서제때도 있었다.


안의민: 당신은 흠차부인으로서, 왜 다시 옛 일(기녀)을 다시 시작한 것입니까?


새금화: 문경(홍균)이 죽은 후, 홍씨집안에서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상해로 가서 기녀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상해의 많은 상류인사들은 홍씨집안과 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상해는 소주에서 가까우네, 홍씨집안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다시 천진으로 온 것이다. 이름도 새금화로 바꾸었다. 내가 천진에 오자, 천진의 신문에서는 바로 선전을 해주었고, 다행히 대신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정밀 다 상대할 시간이 모자랐다.


안의민: 당신은 북경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이 무엇입니까?


새금화: 그것은 바로 극림덕(克林德)의 석두패방(石頭牌坊)이다. 듣기로 청나라병사들과 의화단이 독일공사 극림덕을 때려죽였다고 했다. 나는 독일에 있을 때, 극림덕 대인을 알았다. 극림덕이 맞아죽은 후, 경왕야는 궁녀를 통해 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그런데, 발드시도 받아주지 않았고, 독일황제 빌헬름2세도 받아주지 않았다. 청나라조정은 당황했다. 극림덕을 위하여 제단을 만들고, 그 후에 영구를 독일로 운송하고, 대신을 보내어 추도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발드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조정에서 동서패루(東西牌樓)같은 대패루(大牌樓)를 만들어 기념하면 영구히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어떻게 석두패방으로 바뀌었는지 상세한 상황은 내가 모른다. 지금은 중산공원으로 옮겨져 있는 그 패방은 이전에 숭문문대가 서총포후통 서쪽입구에 있던 원래의 석두패방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기억하기로 평행한 3개의 자석좌이다. 패방이 건립되고, 조정은 연합군과 치욕적인 조약을 체결한다. 그 후에 팔국연합군은 철수했다.


안의민: 당신은 발드시와 감정이 좋았는데, 그들이 떠날 때 당신에 대해 정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까?


새금화: 나는 그저 직업적으로 대한 것일 뿐이다. 발드시 본인도 그는 중국에서 머리가 아팠다. 그는 잠시라도 중국에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안의민: 왜 그렇습니까?


새금화: 생각해봐라. 팔국연합군의 총사령관이 얼마나 골치아픈 자리인지. 각국은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 서로 드러내놓고 혹은 숨어서 싸운다. 조정에서 협의할 때, 각각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양보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암중으로 조정과 결탁하여, 영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러시아는 다시 발드시에게 영국이 몰래 이홍장과 교섭하고 있다고 얘기하곤 했다. 한번은 러시아의 한 장군이 뛰어와서 영국이 자신의 국민을 모욕했다며, 반드시 영국이 사과하도록 해야한다고 요구했다. 발드시는 비록 명목상으로 총사령관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안의민: 당신은 의란전에서 얼마나 오래 거주했습니까. 당신도 재물을 적지 않게 나눠받았습니까?


새금화: 나는 중남해에서 반년간 살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양수청풍(兩袖淸風). 내가 돈을 벌려고 마음먹었으면, 나는 문경과 외국에 대사로 나갔을 때 이미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의란전에 거주할 때, 큰 불이 난 적이 있다. 그래서 다시 발드시와 풍택원(豊澤園) 이년전(頥年殿)으로 옮겨가서 거주했다. 광서27년 칠,팔월에 발드시가 중국을 떠날 때까지 나는 북경에 머물렀다.


안의민: 발드시가 중국을 떠난 이후, 당신은 북경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새금화: 광서27년 십월, 서태후가 서안에서 북경으로 돌아와서 황궁내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누가 황궁을 보호해주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홍장이 증명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었다. 북경은 어쨌든 평안해졌다. 많은 왕공대신들은 거의 나를 포위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서 뭔가를 얻으려 했다. 이 기간동안 나는 소주를 한번 다녀왔다. 그러나 내가 소주에 도착하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광서28년 겨울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호부의 육씨성의 어르신의 연회에 내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거기서 한 아가씨가 손님에게 잘못해서 내가 좀 심하게 혼을 냈더니, 그녀는 독약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지방관아에서 나를 체포하여 형부로 보내 심문했다. 형부의 상하는 내가 다 잘 아는 사람들이어서, 나를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깨끗한 방에 혼자 있었고, 매일 고기와 생선을 먹었다. 며칠 만에 나는 풀려났다. 나는 아가씨들을 해산시켰다. 나는 아주 후회했다. 내가 과거에 많은 멍청한 일을 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르게 되었다고.


인터뷰가 끝난 후, 안의민은 새금화에게 말했다: "당신은 과거에 집안이 가난해서 부모가 '불구덩이'로 밀어넣었습니다. 수십년도안, 비록 많은 잘못된 일을 했지만, 한 가지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경자연간에 전화타겁(趁火打劫)하지 않고, 백성들을 도와주고 자금성을 지켜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경자사변때 진화타겁, 조주위학(助紂爲虐)했다면, 자금성은 제2의 원명원이 되지 않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