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심보정(沈葆楨): 청나라의 남양대신(南洋大臣)

by 중은우시 2019. 5. 31.

글; 소소우마왕(小小牛魔王)


남양대신, 북양대신은 모두 청나라말기의 중요직위이다. 두 직위는 광서연간에 설립되었고, 외교군정을 장악했다. 일반적인 관리들과 나란히 언급할 수준이 아니다. 북양대신중 명성이 가장 혁혁한 사람은 이홍장(李鴻章)이다. 이홍장은 직예총독으로 북양대신을 겸직한다. 직예총독은 지위가 가장 높은 봉강대리(封疆大吏)이다. 이홍장은 북양해군을 장악하고 있었고, 중외교섭에 참여한다.


당시 이홍장의 지위와 맞먹으며 남양대신에 앉은 인물은 분명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북양과는 달랐다. 청나라조정은 북양해군을 만들면서 대량의 군비를 북양에 투입한다. 왜냐하면 발해 일대는 경성의 문호이고,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양해군의 전함은 기본적으로 모두 직접 해외에서 구입했고, 품질이 뛰어났다.


이와 비교하면, 남양대신의 임무는 더욱 어려웠다. 남양대신은 장강앨대의 경제명맥을 장악하고, 열강이 이곳에 여러개의 통상항구를 개설한다. 그러나 남양수군의 전함과 대포는 모두 국산이다. 성능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남양대신이라는 직위는 맡아서 잘해내기가 어려웠다. 당시 남양대신으로 있던 인물은 바로 심보정이다. (초대 남양대신은 이홍장이었다)


심보정은 출신이 비교적 특수하다. 그는 임칙서(林則徐)의 외조카이면서, 임칙서의 사위이다. 임칙서는 청나라말기에 아주 큰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학설과 사상은 일찌기 양무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리고 임칙서는 사람을 아주 잘 보았다. 그는 일찌기 좌종당(左宗棠)에게 서북의 형세를 주의하라고 맡겼고, 나중에 좌종당은 청나라를 도와 신강을 수복한다. 당시는 부모의 명으로 혼약을 맺던 시절이다. 임칙서가 사위로 고른 것을 보면, 심보정은 인척관계 외에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심보정은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서당 선생이었고, 아이들을 가르쳐서 먹고 살았다. 겨우 일가족의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다만 심보정은 어려서 모친으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서, 나쁜 습관을 버리고 글을 읽는 좋은 습관을 기른다. 그리고 자주 외삼촌인 임칙서의 서재로 가서 책을 읽었다.


임칙서의 여러가지 견해는 당시에 아주 독특했다. 심보정은 전통학문을 익혔을 뿐아니라, 외국의 지식도 많이 익힌다. 그리고 '양무'사상의 훈도르르 받는다. 이것은 모두 심보정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심보정도 과거의 길을 걷는다. 27세때 진사가 되어 서길사(庶吉士)로 한림원에 들어간다. 조정이 중점배양대상이 된다. 도광제때, 심보정은 감찰어사를 맡는다. 함풍제때, 심보정은 외지로 나간다. 처음에는 어사의 직위였으나, 나중에는 점점 지부와 같은 지방관직을 맡았다. 당시 청나라의 상황은 위기일발이었다. 도광제때, 제1차아편전쟁후, 열강이 청나라로 침입하기 시작한다. 도광후기, 태평천국이 광서에서 거병하여 절반의 중국을 석권한다. 함풍제때 청나라의 절반은 이미 태평천국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함풍6년, 심보정은 강서 상요(上饒)로 가서 지부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천국이 강서를 공격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상요가 포위공격을 당한다. 심보정은 마침 외지로 나가서 군수물자조달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상요성은 혼란에 빠진다. 다행히 심보정의 처인 임보청(林普晴)은 명문의 후손으로 큰 일을 당하고도 조급해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성안의 백성들을 다독이며, 다른 한편으로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에 구원을 요청한다. 심보정이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되돌아가서, 원군과 함게 상요성의 포위망을 푼다.


심보정은 금방 공로로 승진한다. 나중에 다시 증국번의 추천을 받아 강서순무(江西巡撫)에 오른다. 다만 3년만에 모친이 별세하고 심보정은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가서 모친상을 지낸다. 이것은 당시의 법도였다. 증국번도 부모가 사망했을 때 역시 고향으로 가서 상을 지냈다. 그리고 심보정은 모친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심조정의 니샘은 아주 비통했다. 다음 해, 좌종당은 친히 심보정의 집으로 찾아가서, 그에게 나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두 번이나 모두 거절당한다. 동치6년, 심보정은 비로소 복건선정대신(福建船政大臣)을 맡는다. 복주선정국의 일을 책임지는 자리인 것이다. 청나라는 이미 변화를 준비했고, 임칙서가 예전에 했던 건의를 조정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복주선정국은 선박과 대포를 만들기 위해 인재를 배양하는 곳이다. 심보정은 이 대 정식으로 양무를 추진한다. 그리고 많은 성과를 거둔다. 그러면서 점점 최고위층의 인정을 받게 된다. 나중에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고, 청나라는 해방(海防)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심보정을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처리하게 한다. 쌍방은 여러번 담판, 무력뤼협을 거쳐 일본이 물러나게 된다. 해방의 국력이 매우 부족하여,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청나라로 하여금 해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이홍장과 심보정으로 하여금 각각 북양대신, 남양대신을 맡아 해방사무를 책임지게 한다.


최초의 계획대로라면, 조정은 각지의 이금(厘金), 관세, 호부, 부고(府庫)등에서 해군을 만들 경비를 조달해야 했다. 그러나 매년 돈이 부족했다. 조정도 방법이 없었다. 심보정은 대국적인 차원에서, 남양의 경비를 전부 북양에 넘겨주는데 동의한다. 그래서 북양해군이 생긴다. 다만, 남양도 경비가 필요했다. 북양이 점차 정상궤도에 들어서자, 심보정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남양의 경비를 다시 남양이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심보정은 자신이 양보했다는 미명을 얻기 위하여 후임자가 쓸 경비도 없도록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심보정에 의해 청나라는 남양해군을 보유하게 된다. 남양의 해방도 정상궤도에 진입한다. 그리고, 심보정은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에도 큰 공헌을 한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 유학생들을 보낸다. 이들 중에는 첨천우(詹天佑), 엄복(嚴復)등이 있었다. 광서5년 심보정은 남경에서 병사하니 향년 6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