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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강유위(康有爲)의 동생 강광인(康廣仁)의 진실은...?

by 중은우시 2018. 10. 20.

글: 채휘(蔡輝)





"담사동(譚嗣同)은 옥안에서 태연자약하며 하루종일 방안을 걸어서 돌며, 땅 바닥의 석탄조각을 주워서 벽에 글을 썼다.... 임욱(林旭)은 처자처럼 준수했고, 옥안에서 때때로 미소를 지었다. 강광인(康廣仁)은 그러나 머리를 벽에 들이받으며 통곡, 실성하며 소리쳤다: '하늘이시여. 형이 한 일을 왜 동생이 책임져야 합니까!' 임욱은 그가 곡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법인에게 감옥에서 나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강광인은 형을 집행한다고 생각하여 더욱 심하게 곡을 했다. 유광제(劉光第)는 일찍 형부에서 일을 해서 사건처리를 잘 알았다. 그래서 위로하여 말했다: '이번은 심문하는 것이고, 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다. 울지 말라!'"


이 희극화된 이야기는 황준(黃濬)의 <화수인성암척억(花隨人聖庵摭憶)>에 기록되어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왕정위(汪精衛)가 섭정왕 재풍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일찌기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때 일을 했던 옥졸 유일명(劉一鳴)으로부터 들은 것을 나중에 황준에게 얘기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헛점이 너무 많다.


첫째, 당시의 형부주사(刑部主事) 당훤(唐烜)의 기록에 따르면, "한(滿漢)의 제조(提調)가 반을 나누어 남소, 북소에 갇혀 있는 범인을 데리고 왔다. 남소의 3명은 담 및 이양(二楊)이고; 북소는 유, 임, 강광인이다." 담사동과 강광인은 서로 다른 곳에 갇혀 있었다(즉, 남소와 북소). 유일명이 어떻게 두 곳에 나뉘어 갇혀 있는 사람을 모두 볼 수 있단 말인가?


둘째, <청실록>에 따르면, 육군자를 주살하는 조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강광인, 양심수(楊深秀), 양예(楊銳), 임욱, 담사동, 유광제등은 대역무도하여 참형에 처한다. 강의(剛毅)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고, 보군통령아문에서 병력을 보내어 탄압하라." 강광인은 첫번쨰로 거론된다. 그리고 그는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다. 행형때 목에 밧줄을 묶어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분명히 이는 죄괴(罪魁, 우두머리)이다. 어찌 형의 죄를 동생이 대신 지었다고 할 것인가.


1905년이전에, 강광인이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은 모두 강개격앙(慷慨激昻)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5년이후,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강광인을 소인배같은 인물로 묘사한다. 아마도 사람들의 강유위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다. 즉, 강광인은 단순히 강유위의 동생이 아니라, 탁월한 계몽가였다는 것이다.


가약한(嘉約翰, John Glasgow Kerr)은 미국목사이고, 1853년에 중국에 왔다. 중간에 한번 미국으로 돌아간다. 1859년에 광주로 가서 중국최초의 교회병원인 박제의원(博濟醫院)을 만든다. 1866년, 다시 중국최초의 서양의학교육기관인 박제의학당(博濟醫學堂)을 만들었다. 손중산(孫中山) 선생이 바로 이 학교 졸업생이다.


가약한은 일생동안 중국에서 70여만명의 환자를 치료했고, 5만번에 가까운 수술을 했으며, 150명의 서양의사를 양성했고, 의학서적 34권을 번역했다.


1890년, 박제의학당의 학제는 3년이었다. 이는 양계초(梁啓超)의 주장과 일치한다.


박제의학당은 모두 영어로 수업했는데, 숙제도 영어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당시 박제의학당에서 교사로 있던 양효초(梁曉超)의 회고에 따르면, "매주 5일은 책을 외웠다; 매 학생은 매일 2,3과목을 외워야 했다. 토요일은 시범교육, 실험과 현미경사용등등의 시간으로 남겨두었다."


강광인이 이 학교를 졸업한 것이 확인된다면 그의 영어수준은 상당히 높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강광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서양의 약은 정교하게 검토한다. 중국의 약은 실험해서 살피는 것이 없었다." 강광인이 의학을 배우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데 대하여 학자 유방위(劉方瑋)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강광인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그래서 병을 오래 앓으며 스스로 의학지식을 쌓았다.

둘째, 강유위가 일찌기 북경으로 과거시험을 치러 갈 때, 대량의 서양서적을 구매했는데, 그 중에는 영국런던성공회 선교의사 합신이 번역한 <전체신론>이 있었다. 나중에 강유위가 병을 얻었는데, 중의는 속수무책이었고, 그저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강유위는 서양의학서를 뒤졌고, 거기에 있는 방법대로 치료하니 점점 효과가 있었다. 강광인은 이때부터 중국의학이 부족하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1892년, 강광인이 졸업하고, 강유위는 여러번 서신을 보내어 그에게 앞날을 준비하라고 한다. "돌아와서 네가 절강의 하급관리를 해서 살아라. 만일 하급관리는 가난하고 힘들어서 하기 싫으면, 홍콩으로 가서 서양일을 해라. 너에게 다른 생각이 있으면 네 말을 듣겠다."


결국 강유위가 돈을 써서, 강광인은 절강에서 구품의 하급관리가 된다.


절강에서 강광인은 선후로 보갑(保甲, 하층치안을 담당함), 문위(文闈, 하층과거조직)등 업무를 맡았지만, 우울해 한다. 양계초는 그를 절강의 명사 왕강년(汪康年)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강군 광인은 장소(長素) 선생의 동생입니다. 가난하여 절강에서 관직에 나갔고, 양광관에 거주합니다. 서양서적을 읽을 수 있고, 시무를 단련하였습니다. 절강의 어른을 뵙겠다고 하여 삼가 인사드리려 합니다."


왕강년과의 서신왕래에서 강광인은 시국을 비판한다.


첫째, 치수(治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각 부서가 서로 미루기만 하여 수재의 '조력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금(厘金)이 남발된다. 이금은 원래 태평천국의 난 기간동안 군수의 필요로 만들어진 임시세수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난이 평정된 후에 갈수록 더 많이 거두었다.


겨우 1년여동안 일을 하고는 강광인이 퇴직한다. 양계초는 이 경력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강광인은 어려서 혈기방장했고, 장난을 좋아하며 일을 하면서 느슨하거나 선을 넘는 경우가 있었다. 남해선생은 그가 억제할 수 있도록 하려 했고, 그래서 관직에 내보낸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세속의 사정과 위선을 알게 한 것이다. 그는 관리로 일년여있으면서 보갑일, 문위일을 하면서 관료사회를 익혔다. 그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관직을 내던지고 돌아와ㅏㅆ다. 이때부터 진덕용맹하고 기질이 완전히 바뀐다. 마치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같았다."


1897년 2월, 강유위는 마카오등지에서 <지신보(知新報)>를 창간하고, 강광인이 총리(總理)를 맡는다. 이 신문은 인기를 많이 끌었고, 유신파의 여론본거지가 된다.


한편으로, 당시 마카오는 지위가 특수해서 청정부도 직접 간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론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다른 한편으로, 강광인은 번역을 중시해서, "매월 삼십원, 매일 2천자를 번역했다. 항상 4,5기에 쓸 것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쓸 글이 없을 걱정은 없었다."


신문간행에 어느 정도 성적을 나타내자, 강유위는 강광인을 상해로 보낸다. 부전족회(不纏足會)와 중국여학당(中國女學堂)을 만들게 한다.


일찌기 광서9년(1883), 강유위는 여자의 전족을 반대하여 고향에서 '부전족회'를 만든다. 현지관리이 반대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상해에서 강광인은 '과감하고 통찰력있게 진행하여' 부전족회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얼마 후, 당시 양광총독으로 있던 유곤일(劉坤一)의 지지를 받아, 강광인은 경원선(經元善)과 함께 중국최초의 여학교 중국여학당(일명 經正女學堂)을 설립한다.


강광인은 또한 대동역서국(大同譯書局)의 경리가 되어, 처음으로 도서 30여종을 출판하는데, 여기에는 강유위의 <강자개제고(康子改制考)>가 들어 있다.


강광인은 일처리능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 바로 이 때, 양계초는 중병을 앓아서 거의 고치기 힘들 것처럼 보였다. 강유위는 의술에 능통한 동생을 북경의 양계초에게 보낸다. 양계초가 다 나은 후에 강광인은 원래 상해로 돌아가려 했으나, 강유위가 너무 바쁜 것을 본다. 낮에는 강의하고, 손님을 만나고 일을 논의하고, 저녁에는 글을 썼다. 그래서 스스로 남아서 도와주기로 결정한다.


강유위의 상소문은 많은 경우에 강광인이 뒤에서 참모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의 생각이 아주 정확하여 당시 사람들은 강광인을 "소제갈(小諸葛)"이라고 불렀다.


강광인은 급진적인 유신에 반대한다. 그는 교육을 중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양계초의 기록에 따르면, "강군(강광인을 가리킴)은 팔고를 폐하는 것을 중국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밤낮으로 이것을 도모했다." 강광인은 "오늘 중국에 있어서 개혁이란, 무릇 백가지 정치적인 일들은 모두 두번째이다. 첫번째는 바로 과거를 바꾸는 것이다. 팔고로 진사를 뽑는 제도를 없애는 것이다."라고 했다.


1898년 광서제는 조서를 내려 팔고를 폐한다. 강광인은 이를 일생동안 가장 큰 영예라고 여긴다.


강유위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로운 말을 많이 했지만, 실시하는데는 약간 부끄러움이 있었다. 너(강광인)는 말을 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용맹무외했다."


경성에서, 강광인은 금방 유신파의 처지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강유위에게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육사업을 하다가, 몇년후에 다시 유신을 제창하자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고이래로 황상의 권력이 하나가 아닌 나라가 대사를 이룬 경우가 없다. 비록 담금 황상이 성명하고 에지롭지만, 상벌의 권력이 없다. 전국의 대권은 모두 서태후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그리고 만주족들이 이렇게 시기하고, 수구대신이 원수보듯이 하는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는가? 형님은 급히 경성을 떠나서 힘을 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유위는 급류용퇴를 원치 않았고, "생사는 하늘의 명에 따를 뿐이다."라고 답한다.


친구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강광인은 이렇게 탄식하며 말한다: "형님은 규모가 너무 크다. 뜻이 너무 날카롭다.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았다. 동지는 너무 적고, 일은 너무 크게 벌였다. 이것을 배척하고, 꺼리고, 밀어내고, 비방하는 자가 길거리에 가득하다. 그리고 황상은 권한이 없다.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는가? 동생으로서는 개인적으로 깊이 우려된다." "형님의 생각은 비록 높고 묘하지만, 일처리는 글에 구애되고, 의리에 구애된다. 뜻은 너무 높고 크다. 추진하는데 방해가 많을 것이다. 탁여(卓如, 양계초)는 그저 사람좋고, 일처리는 어린아이같다. 성격은 무르다. 앞으로 어찌한단 말인가."


강광인이 가장 먼저 유신파의 실패를 예언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양계초가 쉽게 변하는 부정적인 성격도 간파한다.


강광인은 '위원겁후(圍園劫后, 이화원을 포위하여 서태후를 납치하는 것)"의 기획자이자 실행자중 하나이다. 그외에 그는 손중산의 혁명당과도 왕래가 있었다. 그는 양파의 합작을 극력 주장한다. 강광인이 추진하여, 강유위는 몇번 손중산의 대표를 만나기도 한다.


무술변법이 실패할 때, 강유위는 북경을 떠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광인이 강권하여 남하를 결정하게 된다.


남해회관의 이웃인 관승훈(關勝勛)의 회고에 따르면, "강광인, 양계초등 4명이 방안에서 마작을 하고 있었다. 청군의 부대사람들이 남해회관을 향하여 몰려왔다....(양계초)는 급히 떠나서, 위험을 벗어난다....강광인의 요리사는 이틀 전에 강광인이 그를 때린 적이 있어서 그앙심을 품고 이 기회에 보복하고자, 청군에 그를 고발한다. 강광인은 그래서 체포된다."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양계초는 이때 이미 북경을 떠나있었기 때문이다.


강광인이 체포된 후, 세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대의늠름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글은 모두 강유위, 양계초의 손에서 나왔다. 그래서 신뢰도가 높지 않다. 둘째는 심문을 받으며 '수백명'을 무고하게 연루시켰다는 것이다. 셋째는 대성통곡했다는 것이다.


기실 무술육군자의 상황은 각각 달랐다.


담사동은 "천하의 군주는 모조리 죽여버리고, 그들의 피가 지구를 가득 채우게 해서, 만민의 한을 풀겠다고 맹세했다."


유광제는 가산몰수때, 그의 집에서 강유위를 탄핵하는 상소문초안이 발견된다. 아직 다 쓰지는 못한 것이다.


양예는 장지동의 밀탐(密探)이었고, 담사동, 임욱에 불만이 있었다. 사적으로 담사동은 "귀유(鬼幽)"라고 부르고, 임욱은 "귀조(鬼躁)"라고 불렀다.


양심수는 원래 최초의 체포명단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전에 아주 기이한 상소문 부본을 제출한다. 거기에서 그는 연구에 따르면, 이화원에는 금고가 하나 있는데, 조상이 물려준 유산이라는 것이다. 변법에는 돈이 부족하니 300명을 모아서 그것을 열자고 했다. 그것은 강유위가 계획한 "위원겁후"계획의 일부분이다. 양심수는 평소에 '모슬총 삼천개면 이화원을 포위하고도 남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동료가 이를 고발하여 체포당하게 된 것이다.


24살의 임욱은 일찌기 강유위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스스로 강유위의 제자라고 칭한다.


확실히 강광인은 유신파의 핵심중 하나이다. 대성통곡을 하더라도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정관응(鄭觀應)에 따르면, "듣기로 그(강광인)는 옥에서 웃으면서 말하고 태연자약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고 별로 바뀌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학문의 바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광인이 죽은 후, 강유위는 노모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강광인이 내몽고로 도망쳐서 화상(和尙)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신을 위조하여 모친에게 보여준다. 모친이 사망한 후, 강유위는 동생의 유해를 가지고 남으로 돌아가서, 모친의 묘 옆에 안장한다. 이때는 강광인이 죽은지 이미 15년이 된 때였다.


강광인이 죽었을 때 나이는 31살이다. 민국초기에 육군자의 유작을 수습할 때, 그의 시를 겨우 한 수 찾을 수 있었다:



조조향해소난간(迢迢香海小欄干)

독립미음일소환(獨立微吟一笑歡)

아역평생유심사(我亦平生有心事)

호화유득여인간(好花留得與人看)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자기 세대의 한계가 있다. 따스하게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 선인들의 분투와 희생을 헛되이 하지않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