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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완안입동기(完顔立童記): 청나라말기 가장 아름다운 거거(格格)

by 중은우시 2018. 8. 28.

글: 심초설월(心草雪月)





1965년 11월초, 북경협화병원 입원부


오후3시부터 면회시간이다. 매일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입원부 일상의 정적은 순식간에 입원환자의 가족들에 의해 깨져버린다. 오늘 모든 것은 예전과 같았다. 그러나 가장 동쪽에 있는 병실에서는 확실히 남다른 동정이 있었다.


누군가 싸우고 있었고, 기세는 대단했다.


이 시간에 수간호사는 그 병실을 특별히 신경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주 특수한 환자가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은래 총리는 그를 특별보호대상으로 정했고, 병원의 직원들에게 반드시 잘 보살펴서 그의 병을 치료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수간호사는 그의 병실입구로 달려간다. 병상에 누워있던 부의(溥儀)는 그의 앞에 서 있는 노부인을 향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보고 싶지 않다. 꺼져라. 멀리 꺼지면 멀리 꺼질수록 좋다!"


부의는 얼굴이 붉어져서 마치 독주를 마신 듯했다. 목은 굵어졌고, 핏줄이 드러났으며 화가나서 어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부인은 짙은 남색의 면복(棉服)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고, 용모는 청수했으며 두 눈을 빨개져 있었다. 억울해하고 가슴아파하는 표정이었다.


땅바닥에는 몇 장의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마치 아직 청소를 끝내지 못한 전쟁터같았다.


수간호사는 노기로 부의의 병세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서, "환자께서는 화를 참으십시오"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부인은 몸을 돌려 멀리 떠나갔다.


타닥타닥 걸어가는 소리와 함께 오열하는 소리도 함께 들렸고, 점점 멀어져간다.


부의는 길게 탄식을 하였고, 마치 순식간에 이전의 우아하고 온화한 마음을 되찾은 듯했다. 얼굴색도 예전의 창백한 색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바로 주은래 총리가 잘 보살피라고 당부한 바로 그 특수한 환자이다. 그의 일생은 살아있는 중국근대사이다.


수간호사는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땅바닥의 종이 몇 장을 집어 들었다. 직업적인 민감성으로 그녀는 슬쩍 한번 훑어보고서도 그것이 진단증명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론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처녀임"


성명난에는 3자가 쓰여 있었다. 왕민동(王敏彤)


2


11월초, 남방의 여러 도시들은 아직 따스한 편이다. 북경성에는 그러나 겨울의 한기가 느껴진다. 특히 밤이 되면 차가운 바람이 번화한 고도의 물을 얼어붙게 만든다.


협화병원의 구석에 가까운 화단 위에 한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의 면복, 늙어가지만 그러나 청수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몸은 가볍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바로 왕민동이다. 낮에 부의에게 혼난 그 여인이다.


왕민동은 부의를 깊이 사랑했다. 비록 부의가 당시에 이미 이숙현(李淑賢)과 결혼한 후였지만, 그녀는 한 마음으로 부의가 그녀를 받아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인 것이다. 나이 50이 넘어서 처녀증명을 받은 것은, 그녀가 부의의 앞에서 자신의 충절과 한마음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히려 부의의 염오(厭惡)만 샀다.


아본장심향명월(我本將心向明月) 내 마음은 명월을 향하는데

내하명월조구거(奈何明月照溝渠) 명월은 왜 도랑을 비추는가


밤이 되니 날씨는 더욱 차가워진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목과 소매로 파고 들었다. 그녀의 마음도 몸과 같이 차가워진다. 짝사랑에 빠진 여인은 항상 마음이 왔다갔다 한다. 어떤 때는 날듯이 가볍다가 어떤 때는 쇠처럼 무거워진다. 일단 관계가 완전히 깨져버리게 되면, 유일한 감각은 공허(空)이다.


"백운천재공유유(白雲千載空悠悠)"의 공(空)

"격엽황리공호음(隔葉黃鸝空好音)"의 공(空)

"불견옥안공사처(不見玉顔空死處)"의 공(空)


희망은 산산히 부서져 환상이 되고, 지금의 애상은 추억과 합쳐서 그녀의 눈물가득한 두눈에서 돌아가며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설사 중국의 옛날 황제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대등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청나라에서 혈통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픔다운 거거(格格)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왕민동은 그녀의 한명(漢名)이고 그녀의 원래 이름은 완안입동기(完顔立童記)이기 때문이다.


3


그녀의 어린시절은 정왕부(定王府)에서 지냈다.


정왕부는 북경의 서사(西四) 남대가 강와시의 동쪽에 있는 비범한 기세의 저택이다. 홍문과 석사, 날개를 펼친 처마, 높은 문턱, 위엄있는 황실의 기세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왕부의 주인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육랑(毓朗)이다. 그는 건륭제의 6대손이다. 육랑의 장녀인 애신각라 항혜(恒慧)는 내무부 만군상황기 완안입현(完顔立賢)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둘 낳는다. 각각 완안입동비와 완안벽림(完顔碧琳)이다. 육랑의 차녀인 애신각라 항향(恒香)은 나중에 곽포라(郭布羅) 영원(榮源)에게 시집가서 완용(婉容)의 계모가 된다.


즉, 마지막황후 완용과 입동기는 이종사촌자매간이다.


왕부 후원에 있는 장랑(長廊)은 자매들이 가장 좋아하던 곳이다. 눈처럼 하얀 담장 앞에슨 푸른색기둥과 붉은색문틀은 선명하게 대비되었고, 담자락에는 자등(紫藤)이 있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어 있었다. 장랑의 대들보에는 두 개의 철환(鐵環)을 박아서, 그네를 만들었다. 아직 키도 작고 머리는 제류해(齊劉海,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머라모양)로 자른 입동기가 그네에 타고 놀고 있었고, 하인은 곁에 서서 언제든지 거거가 그네에서 내려올 때 엎드려 발받침대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용은 입동기보다 7살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얼굴이 희고 깨끗했으며, 용모가 예뻤다. 부친 영원은 개명한 가장이었다. 남녀평등을 주장했고, 딸에게도 가정교사를 붙여 주었다. 그리하여 완용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금을 타고 그림을 그렸다. 완용은 책을 읽고 이치를 알았으며 성격이 단정했다. 그리고 시사를 깔끔하게 썼다. 입동기의 부모는 자신의 딸이 그녀와 노는 것을 좋아했다.


나뭇잎은 푸를 때 찬 기운을 느끼게 한다. 햇볕이 나뭇잎의 사이로 비쳐들면 점점이 즐거움이 묻어난다. 가을이 오면, 자등화는 말라서 떨어져 버린다. 그러면 복도 앞에 금계(金桂)가 꽃을 피운다.


계수나무향기가 밀려오면 달콤하기 그지없다. 입동비의 순진한 웃는 얼굴처럼.


몇년 후, 완용은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된다. 가족구성원들은 그녀가 대청의 황후가 된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비록 그때 청나라는 이미 망했고 부의는 이미 퇴임한 황제이지만, 그는 유로(遺老)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지고무상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이 외할아버지 육랑에게 전해졌을 때, 일찌감치 병석에 누워있던 노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전에 말했었지. 우리 정왕부에서 태어난 거거는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고, 만일 존귀한 남편이 아니면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외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속속 입동기를 생각한다. 재능이나 집안이나 수양이나 입동기는 완용보다 뛰어나다. 하물며 그녀는 경국경성의 미모를 지니고 있다. 장래 누가 그녀의 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입동기는 아직 그저 꽃을 피우려고 기다리는 꽃망울에 지나지 않았다.


완용이 결혼한 후 반달만에, 육랑은 세상을 떠난다. 전체 정왕부가 곡성으로 가득찬다. 사람들은 눈물 속에서 놀랍게도 육랑이 죽기 전에 얼굴에 만족스럽고 기대에 찬 미소를 띄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편안하면서도 신비스럽게.


4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더나고 부친 완안입현도 병세가 싶었다. 전통가족의 진흥여부는 모두 남자의 능력에 달렸다. 남자가 비실비실하면 전체 가족이 무너지게 된다. 얼마 후, 입동기자매는 모친을 따라 천진의 외할머니에게로 간다.


입동기에 있어서, 외할머니집에서의 생활은 전혀 기죽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여러해가 지난 후, 여동생 완안벽림은 쓸쓸하게 회고한다: "그런 가정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예절을 지나치게 요구한다. 특히 여자아이에게는. 언니는 모든 어른들이 좋아했고, 그녀는 항상 모친을 따라서 먹는 것도 어른들과 같은 식탁에서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말을 잘 들을 뿐아니라, 예뻤기 때문이다. 우리들과든 달랐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입동기의 아름다움은 마침내 빛을 발한다. 그녀는 청나라말기 가장 아름다운 거거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았다. 피부는 하애서 마치 이른봄의 빙설과도 같았다. 눈썹은 멀리서 보는 산자락같고, 입술은 주사와 같이 붉었다. 눈동자는 따뜻한 정이 담겨 있었고, 콧날도 오똑했으며, 검은 머리는 비단과 같았다. 볼에는 보조개도 있었다.


이렇게 출중한 인중지봉(人中之鳳)이라면 당연히 멋진 혼인이 따라와야 한다.


1929년, 입동기가 17살이 되었을 때, 모친이 그녀를 위하여 천진의 애신각라가문의 남자와 정혼을 해준다. 그러나 모친은 그 남자의 성품은 잘 챙기지 못했다. 정혼한 후에야 비로소 그 남자가 팔기의 환고자제(紈絝子弟)로 형편없는 작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평소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며, 나중에는 경극에 미쳐서 하루종일 경극배우와 어울려 다녔다. 모친은 그 사실을 안 후에 이 혼인을 취소하고, 딸을 데리고 북경 동사삼조 27호의 집으로 옮겨와서 살게 된다.


이 사건을 거치면서, 입동비는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떨어졌을 때의 낙차를 누가 모르겠는가. 공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운명이 다시 한번 그녀를 봐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바로 그 때, 입동기는 경극 여로생(女老生) 맹소동(孟小冬)을 만난다. 맹소동은 막 매란방(梅蘭芳)과 결혼했을 때였는데, 바로 26호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바로 입동기의 옆집이다. 이전에 맹소동은 이미 경극계에서 유명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동황(冬皇)이라고 불렀다. 매란방이 전통적인 사람이어서 결혼후 맹소동은 무대를 떠나서 집에서 조용히 살게 된다


노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맹소동과 입동기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친구가 된다. 매란방도 입동기와 잘 알게 되며 그녀를 "소대거거(小大格格)"라고 불렀다.


맹소동은 입동기를 데리고 희원으로 가서 경극을 봤다. 많이 듣다보니, 입동기도 경극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녀는 맹소동의 지도하에 눈썹을 그리고 경극에서 화단(花旦)의 역할을 한다.





아쉽게도 이런 시간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30년, 매란방의 모친이 사망하고, 맹소동은 장례를 치르러 갔다가, 먼저 매란방과 결혼한 둘째부인 복지방(福芝芳)에게 모욕을 당한다. 매란방은 두 사람의 싸움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맹소동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간다. 그후 맹소동은 <대공보>에 3일동안 연이어 헤어진다는 내용을 공고하고 얼마후 26호를 떠나버린다.


이렇게 둘이 헤어지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5


맹소동이 떠난 후 예전에 배웠던 노래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입동기에게 만족스러운 남편감이 나타난다. 바로 부의의 동생인 부걸(溥傑)이다.


1924년, 부의는 자금성을 떠나야 했고, 먼저 순친왕부에 머문다. 나중에 다시 천진 조계의 장원(張園)과 정원(靜園)에 거처한다. 1931년 부의는 "9.18사변"후에 일본군의 책동으로 완용을 데리고 동북으로 가서 다음해 3월 만주국의 집정이 된다. 1934년에는 '황제'를 칭한다. 당시 부의의 동생인 부걸은 처가 군벌의 아들과 결탁하여 궁중의 재물을 훔쳐내서 이혼하였다. 부의는 일본군에서 부걸로 하여금 일본여인을 부인으로 취하라고 압박할가봐 둘째여동생 온화(韞龢)를 시켜 구귀족의 딸을 골라서 처로 삼게 하려했다. 입동기가 적합한 후보로 떠오른다.


이 혼사에 대하여, 모친은 만족했다. 부의의 동생은 바로 왕야(王爺)이다. 입동기가 시집을 가면 복진(福晋)이 되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집안의 경사이다. 모친은 기꺼이 딸을 데리고 천리 먼길을 북상하여 이 혼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관동군이 이를 알고 난 후에 간섭하여, 결국 뜻대로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된다.


모녀 둘은 쓸쓸히 북경으로 되돌아 온다.


이때 입동기는 이미 스무살이 넘었다. 세월은 기대, 실망을 반복하면서 흘러갔다.


이번에 동북에 갔을 때 그녀는 완용을 만나본다. 완용은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억지로 웃어야 하고 심지어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다. 입동기는 그녀의 누런 이빨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자랐다. 우리는 모두 늙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정왕부에서 태어난 거거는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고, 만일 존귀한 남편이 아니면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녀의 그 존귀한 남편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기다림은 계속되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6.


1959년, 부의는 곡절을 겪으면서 특사를 받고 북경에 돌아온다. 47세의 노처녀는 다시 희망을 가졌다. 이때 완안입동기는 이미 중국식이름인 왕민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부의도 홀몸이었고, 왕민동의 모친은 부의에 셋째여동생 애신각라 온영(韞潁)에게 부탁하여, 부의를 자기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한다.


부의는 반평생을 떠돌아다니면서 굴곡있는 인생을 보냈다. 처첩들은 일찌감치 모두 흩어져 버렸고, 예전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도 이미 없어졌다. 지금은 살아서 다시 자유를 찾은 것만으로도 하늘의 보살핌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신단에서 내려와 왕년의 위엄을 버리고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보통사람의 즐거움으로 살고자 했다.


이때 친척의 정은 그에게 귀한 것이다. 그는 친척들에게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했다. 그날의 식사자리는 요리도 풍성했고, 술도 있었다. 술이 몇잔 돌자, 모두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부의는 왕민동과 얘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 모친은 왕민동의 눈동자에 춘광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 여러해동안 보지 못한 것이었다.


정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담담해지지만, 겨울에 보관해놓은 꽃처럼 봄이 되여 필 때가 되면 돌연 터져버린다.


모친은 잘 알았다. 왕민동이 이번에는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딸은 이미 반평생을 그냥 보냈다. 이제는 자리를 잡아야 할 때이다. 모친은 부의의 셋째매부인 윤기(潤麒)에게 중간에서 나서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부의는 그 말을 듣고는 크게 불쾌해 한다. 당시 그는 이미 개조를 받았고, 이전이 신분을 벗어나기로 결심한 때였다. 그는 왕민동이 결혼하려는 그 황제는 현재의 그 보통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재혼한다면, 그의 이상적인 반려는 사회의 신여성이어야 하고, 대청귀족과 관련되는 여자라면 절대로 안되었다.


1962년, 모택동은 중남해에서 부의를 데려와 연회를 연다. 모주석은 반농담조로 진지하게 말한다: "너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 않느냐. 황상에게 마마가 없으면 되겠는가. 재혼해라." 그리고 같은 해, 부의는 이숙현과 결혼한다. 왕민동은 그 사실을 안 후에 대성통곡한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1965년, 부의가 신장병으로 입원하자, 당시 환자를 면회할 수 있는 것은 3시 이후에 허가증을 받아서 한번에 한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매번 부의 병실의 면회허가증은 왕민동이 가장 먼저 받아갔다.


그녀는 부의가 싫어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병실에 그냥 앉아 있었다. 부의는 화가 나도 뭐라고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산부인과에서 받은 처녀증명을 보고서 온화했던 부의도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게 그녀에게 소리치게 되었던 것이다.


부의에게 욕을 먹은 그녀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마침내 정신을 차린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하여, 그저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려왔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정왕부의 거거는 모두 가장 존귀한 남편을 만나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녀는 보통사람의 행복조차도 누리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정말 부의를 사랑했을까? 아마도 그녀가 사랑한 것은 그저 이전 구귀족의 관념 속에 있는 구오지존, 황제였을 것이다.


당년불긍가춘풍(當年不肯嫁春風)_

무단각피추풍오(無端却被秋風誤)


7


나중에 모친이 죽고, 문혁때, 왕민동은 북경 동사삼조 8호의 작은 집으로 쫓겨나서 거기에서 혼자 산다.


분혁이 끝난 후, 부의의 또 다른 동생인 부임(溥任)이 친히 그녀를 찾아와서 완민동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거절한다: "첫째는 그의 나이가 나보다 작고, 둘째는 나는 평생 북부형제들 사이에서 놀아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을 살고서야 그녀는 깨달은 듯하다. 


운명은 그녀에게 장수를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최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완용은 결혼 후에 부의와 사이가 나빠져서 시종과 사통하였다. 나중에 부의가 냉궁에 넣고 매일 아편으로 지내다가 1946년 6월 연길감옥에서 죽는다. 나이 겨우 41살이고, 시신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부의는 1967년에 신장암으로 죽는다. 그의 유골은 북경팔보산혁명공묘에 모셔진다. 1995년에는 하북역현 화룡황가능원으로 옮겨진다.


이숙현은 부의와 6년간의 생활을 지내다가 1997년 홍콩의 주권회복전에 사망한다.


노년의 왕민동은 집안이 망하는 바람이 누추한 소옥의 1/3공간은 연탄을 가득 쌓아 놓았다. 그는 생활능력이 없어서 일상생활을 모조리 외조카가 돌봐주었다. 그녀가 생활여건을 개선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건륭시기의 골동화병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80만위안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100만위안이 아니면 팔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아마도 그녀는 20만위안이 더 필요해서가 아니라, 팔기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떤 때는 이웃사람이 놀러 와서 그녀에게 옛날 얘기를 물으면, 그녀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뜨며 손을 흔든다: "잊었다. 다 잊었다!"


8


2003년, 이미 90세의 고령인 왕민동은 외조카의 권유로 마침내 양로원에 들어간다.


떠나기 이틀전에 그녀는 그 골동화병을 외조카에게 건네준다. 한푼도 받지 않고서.


이때부터 그녀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양로원에는 따뜻한 밥도 있고, 목욕도 할 수 있었다. 여건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1달여가 지난 후, 왕민동은 만두를 먹다가 돌연 사망한다. 병원에 데려갔을 때는 이미 운명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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