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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중국에서의 작명법 변천사: 삼국시대 인물은 왜 모두 외자이름일까?

by 중은우시 2019. 1. 23.

글: 비상역사(非常歷史)


<삼국연의>를 보면 이런 문제를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왜 삼국시대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외자이름을 가졌을까? 확실히 그렇다. 역사를 뒤져보면, 전체 동한(東漢), 삼국의 300여년간의 인명을 보면 거의 모두 외자이다. 두자 이름은 극소수이다. <후한서> <삼국지>의 인명 중에서, 간혹 두 글자가 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는 은사이고, 예를 들어 방덕공(龐德公), 등노서(鄧盧敍); 어떤 경우는 아명이고, 예를 들어, 유분자(劉盆子), 정소동(鄭小同); 어떤 경우는 자(字)로 불린 경우이다. 예를 들어 황승언(黃承彦), 구거백(苟巨伯). 지식인, 고관, 유명인사들 중에서 두글자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건 정말 괴이한 일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왕망에게서 찾아야 한다.


서한말기, 왕망은 정권을 찬탈하고,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동중서의 '신학목적론'을 가져와서 미신놀음을 벌인다. 그리고 복고를 부르짖는다. 이것을 핵심으로 하여 일련의 소위 '신정'을 추진하는데, 토지제도에서부터 용인제도까지 화폐에서 지명까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사람의 이름까지도 포함된다.


왕망은 "이름"을 아주 중시했다. 그가 집권하자 바로 개명의 바람이 분다. 먼저, 중앙급 관명을 고쳐버린다. 그 후에 지명도 고쳐버린다. 오늘 바꾸고, 내일 다시 바꾼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심지어 "흉노(匈奴)"는 "항노(降奴)"로 바꾸고, "선우(單于)"는 "복우(服于)"로 바꾼다. 이로 인하여 민족전쟁까지 일어난다. 왕망은 성명에 더욱 공을 들인다. 그는 자신의 성인 "왕(王)"을 특히 중시했다. 많은 유씨성황족과 공이 있는 부하들에게 "왕"씨성을 하사한다. 이를 통해 은총을 보여준다.


<한서.왕망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왕망의 장손은 왕종(王宗)이다. 그가 천천히 기다린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은 후에 왕종이 황제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급했고, 기다리지 못한다. 자신이 천자의 의목, 모자를 준비해서, 입고서 화가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다. 긜고 동인(銅印)도 3매를 만든다. 그리고 외숙과 공모하여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 그러나 수준이 뛰어나지 못해서, 일이 들통난다. 비록 친손자이지만 이 일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종은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자 바로 자살해버린다. 비록 사람은 죽었지만, "정치권력'은 박탈해야 했다. 왕망은 그리하여 이런 명령을 내린다: "종(宗)의 본명은 회종(會宗)이다. '제작(制作)'으로 두자 이름을 버렸는데, 이제 다시 회종으로 이름을 되돌린다."


이 명령은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제작'은 바로 '법령'을 가리킨다. 왕종의 본명은 왕회종이었다. 그후에 법령에 따라 두자 이름을 버리게 되어 '왕종'으로 고쳤다. 지금 법을 어겼으니 다시 원래의 두 자 이름으로 되돌아가서 '왕회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망의 이 명령에서 세 가지 문제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왕망 이전의 인명은 자수에 제한이 없었다. 자신의 손자오 두자 이름을 썼다. 둘째, 왕망이 집권한 후, 일찌기 '두자이름을 없애라'는 '제작(법령)'을 내렸다. 이는 법률의 형식으로 두자이름을 쓸 수 없게 규정한 것이다. 셋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두자 이름을 회복한다. 이것은 처벌의 의미가 있다.


<한서.왕망전>에는 또한 "흉노선우가 '제작'에 따라 두 자 이름을 없앴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은 흉노선우도 왕망의 뜻을 쫓아 두 자이름중의 한 글자를 없앴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두 자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는 법령은 흉노에까지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왕망의 법령으로 그 때부터 사람들은 점점 외자이름을 쓰는 습관이 형성된다. 나중에 왕망의 명령이 효력없어졌음에도, 이는 바뀌지 않았고, 기풍이 되어 버린다. 두자이름을 짓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만일 현재 모든 사람이 외자이름이라면 아마 아주 골치아플 것이다. 왜냐하면 외자이름은 쉽게 중복되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는 인구가 많지 않았고, 사람의 활동범위, 교제범위도 넓지 않아서, 외자이름을 쓰더라도 사회에 크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자이름현상은 연속되어 삼국시대에까지 이른 것이다.


삼국시대의 인명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명은 아주 강한 계급성이 있다는 것을. 모든 왕조, 모든 시대에는 작명의 특징이 있다. 이런 것들을 알면, 어떤 사람은 이름만 봐도 어느 시대인지 개략 알아낼 수가 있다.


"사모무정(司母戊鼎)"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청동기이다. 그중의 "무(戊)"는 상나라때의 사람이름이다. 상,주 두 나라에서는 천간, 지지를 사람의 이름에 썼다. 상탕왕이후 상왕은 외병(外丙), 중임(仲壬), 태갑(太甲), 옥정(沃丁), 태경(太庚), 소갑(小甲)등등이다. 주문왕을 보좌한 부정(傅丁), 그리고 나중의 포정(庖丁), 진나라의 명장 백을병(白乙丙)도 천간, 지지를 이름에 썼다. 천간, 지지는 기실 현재로 하면 숫자이다. 일이삼사의 뜻이다.


춘추전국시대 인물은 성명의 중간에 자주 "불(不)"자를 추가했다. 예를 들어 임불제(任不齊), 한불신(韓不信), 신불해(申不害), 진불고(陳不古), 여불위(呂不韋), 소불의(蕭不疑)등이다. 이 습관은 동한까지 이어진다. 그때는 직불의(直不疑), 고불식(高不識), 공상불해(公上不害)등이 있다. 여기서, '불'자는 그저 발성사(發聲詞)이다. 아무런 실질적인 뜻이 없다. 춘추시대에 또 다른 습관이 있는데, 성명의 사이에 "지(之)"를 추가하는 것이다. 얘를 들어, 개지추(介之推), 촉지무(燭之武), 맹지반(孟之反)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다. 자주 물건을 이름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공구(孔丘), 안회(顔回), 공리(孔鯉), 사마우(司馬牛), 이이(李耳), 묵적(墨翟)등이 있다. 이런 이름은 모두 출생하는 순간에 어른이 무엇을 보았는지에 따라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한나라때는 항열을 중시했다. 이름 혹은 자에 자주 "맹(孟)", "백(伯)", "중(仲)", "계(季)", "숙(叔)", "원(元)", "장(長)", "차(次)"등의 글자가 나타난다. 한나라때의 자(字)에는 "자(子)"자를 많이 썼다. 예를 들어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고, 소무의 자는 자경(子卿)이며, 조운의 자는 자룡(子龍)이고, 한안국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불교는 중국에서 흥성하기 시작한다. 사람의 이름도 불교의 영향을 받는다. 여숙상(呂叔相) 선생은 <남북조인명과 불교>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사람은 구담(瞿曇), 실달(悉達), 보리(菩提), 보살(菩薩), 나한(羅漢), 미타(彌陀)등 불교인명 혹은 술어를 직접 사람이름에 쓰는 것만도 36가지에 이른다. 그리고 불교와 관련된 글자들 예를 들여, "불(佛)", "승(僧)", "담(曇)", "법(法)", "도(道)"등의 글자를 다른 글자와 합쳐서 이름을 만든 경우는 더욱 많았다. <남북사표>를 보면 당시에 이름에 "승(僧)"자를 쓰는 것이 유행했고, "지(之)"자 다음으로 많이 쓰였다. 이때 자(字)는 이름에 한 글자를 추가하여 만들곤 했다. 예를 들어, 사안(謝安)은 자가 석(安石)이고, 양병(楊秉)은 자가 병절(秉節)(이며, 범선(范宣)은 자가 선자(宣子)이며, 안연지(顔延之)의 자는 연년(延年)(이었으며, 후경(侯景)의 자는 만경(萬景)이다. 이름에 "지(之)"를 붙이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조충지(祖沖之), 배송지(裴松之), 고개지(顧愷之), 유뢰지(劉牢之)등이 잇다.


위진남북조는 민족문화의 대융합시기이다. 북방16국의절대다수는 소수민족이 세웠다. 북위때, 선비족의 효문제는 일찌기 명을 내려 선비족에게 한성(漢姓)을 쓰게 하면서, 먼저 자신의 성 '탁발(拓跋) '원(元)'으로 바꾼다. 모두 144개의 선비족성이 한성으로 바뀌는데, 하갈(賀葛)은 갈(葛)로, 시류(是類)는 고(高)로, 거근(去斤)은 애(艾)로, 굴돌(屈突)은 굴(屈)로, 독고혼(獨孤渾)은 두(杜)로 바뀌었다. 선비족 우문각이 북주를 건립한 후, 다시 한성으로 바꾸었던 선비족은 원래의 성으로 되돌리게 한다. 그리고 선비족의 성을 한족 신하들에게 하사한다. 그리하여, 일련의 새로운 성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장손(長孫), 우문(宇文), 도하(徒河), 보육여(普六如), 대야(大野)등이 그것이다.


당나라때 인명은 남북조의 습관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당나라의 돌출된 특징은 자신의 항열내의 순서로 칭호를 삼았다는 것이다. 당나라시의 표제를 보면 볼 수 잇다: 원이(元二), 장십팔원외(張十八員外), 유십구(劉十九), 구이십이원외(丘二十二員外), 공손대낭(公孫大娘), 황사낭(黃四娘). 고대인들은 대가족이 같이 항열내에서 순서를 얘기하기 때문에, 이이십오(李二十五)", "조삼십이(趙三十二)"도 잇다. 당나라때 인명에서는 "기(己)", "여(予)", "언(彦)"이 이전보다 많이 쓰이기 시작한다.


당나라는 중국봉건시기의 전성기이다. 이족과 외국인들도 앞다투어 찾아왔다. 이백의 부친은 서역에서 왔고, 안록산, 사사명도 모두 호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족성을 썼다. 많은 외국인들도 성을 '이(李)'로 했다. 어떤 사람은 황제와 같은 성을 써서 득을 보려 한 것이고, 어떤 사람은 황제에게 사성으로 받았다.


당나라사람과 송나라사람은 항렬순서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을 뿐아니라, 민간에서 이름을 지을 때도 숫자를 자주 썼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이름은 "사륙(四六)"인데, 원래 출생때 부친이 24살, 모친이 22살이어서 합치면 46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모친이 23살, 부친이 25살이면, 낳은 아들의 이름으 "사팔(四八)"이 된다. 송나라때부터 두자 이름이 외자이름보다 많아진다. 그후에는 두자이름이 더욱 많아지게 된다.


요, 금, 원은 소수민족 정권이다. 이는 중국의 작명사상 특수한 시기이다. 첫째, 이름에 "가(哥)" "노(奴)"와 같은 글자가 많이 쓰인다. 둘째,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 언어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요태조(遼太祖)는 아골타(阿骨打)인데 한명(漢名)도 있다. 금나라때의 올술(兀術)은 종필(宗弼)이라는 이름도 있다. 금세종은 이름이 합라(哈喇)인데, 다른 이름도 잇다. 동시에 어떤 한족은 소수민족 이름을 갖기도 했다.


현대 사람들의 이름에서의 시대적 특징은 더욱 명확하다. 중국문자개혁위원회와 산서대학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전국 7개지역의 인명을 가지고 통계를 냈다. 여성인명에 쓰이는 글자의 빈도가 가장 높은 네 글자는 각각 다음과 같았다:


북경: 숙(淑), 수(秀), 영(英), 옥(玉)

상해: 영(英), 화(華), 방(芳), 명(明)

요녕: 옥(玉). 계(桂), 영(英), 화(華)

섬서: 영(英), 방(芳), 수(秀), 옥(玉)

사천: 화(華), 수(秀), 영(英), 명(明)

광동: 아(亞), 영(英), 화(華), 명(明)

복건: 려(麗), 수(秀), 화(華), 명(明)


신중국이전에 사용빈도가 가장 높았던 여섯 글자는: 영(英), 수(秀), 옥(玉). 진(珍), 화(華), 란(蘭)이고,

1949년부터 문혁까지는  화(華), 영(英), 옥(玉). 명(明), 수(秀), 국(國)이며,

문혁때는 홍(紅), 화(華), 군(軍), 문(文), 영(英), 명(明)이며,

문혁후에는 화(華), 려(麗), 춘(春), 소(小), 연(燕), 홍(紅)이된다.


인명에 쓰이는 글자의 변화는 완전히 사회의 변혁과 사람의 생각과 의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