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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호칭으로 본 중국남편의 추락사

by 중은우시 2018. 8. 6.

글: 인본논어(人本論語)


중국에서는 수천년동안 부부간의 호칭이 적지 않게 변화해왔다. 그중 변화가 가장 많고, 가장 비극적인 것은 남편의 호칭이다. 호칭의 변화는 하나의 무정한 사실을 증명한다. 중국남자들의 역사적 지위는 계속하여 추락하였다.


1. 양인(良人)


가장 먼저 처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은 "양인"이었다. 듣기 좋지 않은가? 거기에서 우리는 고대 남편들의 빛나는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고시(古詩)에 이런 말이 있다: "첩가고루연원기(妾家高樓連苑起), 양인지극명광리(良人持戟明光裏)" '양인'이라는 단어는 남녀성별을 구분하지 않았다. 처도 자신의 남편을 '양인'이라고 불렀고, 남편도 자기의 처를 '양인'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남녀지위가 비교적 평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렇게 구분하지 않는 것은 부부간에 서로를 부르는데 많은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다.


2. 낭(郞)


그래서, 나중에 <설문해자>에 따르면, '양(良)"의 글자에 뜻을 표시하는 글을 추가하여 구분했다. 즉 "양"의 오른쪽에 "阝"를 추가하여 "낭(郞)"자를 만들고, 왼쪽에 "女"를 추가하여 "낭(娘)"자를 만들었다. "랑"은 남편을 가리킨다. 이백은 "낭기죽마래(郎騎竹馬來), 요상농청매(繞床弄靑梅)"라는 싯구를 남겼다. 의산(義山)의 시에는 "유랑이한봉산원(劉郞已恨蓬山遠), 우격봉산일만총(又隔蓬山一萬叢)"이라는 싯구가 있고, 화간사(花間詞)에는 "문랑화호농안호(問郞花好儂顔好, 낭군에게 꽃이 예쁜지 내 얼굴이 예쁜지 물어본다)"는 구절이 있다."낭"은 얼마나 친근한 호칭인가?


3. 낭군(郎君)


고인들은 단음절은 너무 달콤하다고 여긴 것일까. 당시에 개략 특이한 사람들 예를 들어 정수(鄭袖), 구익(鉤弋)같은 류를 제외하고 많은 양가부녀들은 남의 앞에서 '낭'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앞에 혹은 뒤에 한 글자씩을 추가시켜 쌍음절의 단어로 만든다. "낭(郞)'의 뒤에는 '군(君)'을 붙이고, '낭(娘)'의 뒤에는 '자(子)'를 부였다. 그리하여 친근한 호칭인 "낭군(郎君)"과 "낭자(娘子)"가 탄생한다. (처음에 '낭자'라는 단어는 청춘묘령의 소녀를 가리켰으나 개략 당나라때 쯤에는 처를 호칭하는 것으로 된다). 처는 남편을 '낭군'이라고 부른다. 즉 남편의 애칭이다. 남편은 처를 '낭자'라고 부른다. 즉 처에 대한 애칭이다.


4. 관인(官人)


송나라때, 남북문화교류가 빈번했다. 부부간의 호칭에서도 당시 궁정에서 '관가(官家, 황제를 가리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평민백성들 중에서도 '관인(官人)'이라는 칭호가 나타난다. 어떤 처는 자신의 남편을 '관인'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민간에서는 신혼부부를 놀리는 말로 "신랑관(新郞官)", '신낭자(新娘子)"라고 부른다. 이 칭호에서는 송나라 이학(理學)이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남자의 가정에서의 지위가 새롭게 올라간 것이다. 관인은 관인(管人)이다. 집안의 관인이면 당연히 집안의 부인을 관리하는 것이다.


5. 외자(外子)


외자는 송나라때 나온다. 처가 자신의 남편을 '외인(外人, 바깥사람)'이라 부른다. 조금 더 우아하게 부를 때는 '외자'가 된다. 남편은 자신의 처를 '낭자'라고 부르는 외에 '내인(內人, 안사람)'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 처를 겸칭할 때는 "천내(賤內)"라고 부른다. 이것은 모두 그 당시 중산계층이 가장 즐겨 부르던 명칭이다. 반금련은 서문경을 달콤하게 "우관인(偶官人)"이라고 불렀을 것이지만, 이청조는 조명성을 분명히 "외자"라고 불렀을 것이다.


6. 상공(相公)


경극, 월극, 황매희를 보면, 분명이 거기에서 수시로 나오는 단어를 들었을 것이다. 길게 말을 빼면서 가는 목소리로 부른다. "상~~공~~(相公)" 거기에 대한 인삼이 아주 깊을 것이다. 이를 보면 이 칭호는 고대에 유행했었다. 이것은 '관인'보다는 진보한 것이다. 이미 단순한 '관'이 아니라, 최고의 관리인 '상'이 된 것이다. 남자의 가정에서의 지위가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나 태극비래(泰極否來)이다. 부녀해방운동이 가열되면서, 남자의 지위는 계속 내려간다. 남편의 칭호에서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7. 선생(先生)


근대이래 남편을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의 뜻도 있고, 인신의(引申義)도 있고, 통가의(通假義)도 있다. 일반적으로 가르키는데 쓰기도 하고 특별하게 가르키는데 쓰이기도 한다. <사해>의 '선생'이라는 항목을 보면, <예기.곡례상>에 '선생을 따를 때는 길을 넘어 다른 사람과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에 대한 경칭이 된다. 어떤 때는, 널리 상대방에 대한 경칭으로 쓰인다. 이를 보면 이 칭호는 어떤 특수한 신분, 예를 들어 남편을 가리키는 외에, 직업이나 나이의 요소를 품고 있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선생이라는 것은 주로 일정한 학식이 있고 나이가 비교적 많은 사람을 가리킨다. 선생이라고 남편을 부르는 것은 우아하면서 앙모하고 존경하는 뜻을 담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남편이 존엄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해외의 화인들과 홍콩 대만지역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8. 애인(愛人)


애인이라는 칭호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신문학작품에서이다. 1920년대초 곽말약은 시극(詩劇) <상루(湘累)>를 쓸때, "구의산의 흰구름아,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구나. 동정호의 흐르는 물아. 밀려오기도 하고 밀려가기도 하는구나. 나의 애인아, 너는 언제나 돌아오느냐." 소설에서, 연애편지에서는 더욱 많이 보인다. 다만 그때는 처의 남편에 대한 칭호로 널리 쓰인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말 혹은 1940년대초에 해방구의 일부 신문화운동이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애인'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한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남녀평등을 제창하면서, 더 이상 '집안사람(屋裏的)', '밥순이(做飯的)'같은 차별적인 색채의 칭호를 쓰지 않기 시작한다. 해방전에 국민정부지역에서 많이 사용하던 '선생' '장부(丈夫)' '소저(小姐)'는 자산계급의 색채가 있다고 하여 쓰지 않는다. 그리하여 '애인'이 널리 사용된다. 다만, 해외화인은 '애인'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유학을 갔는데, 매번 그가 자신의 처를 부를 때 국내의 칭호대로 '나의 애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가 '정인(情人)'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역한 lover는 '정인'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일본어에서 한자 '애인'의 뜻도 '정인'을 가리킨다. 그래서 현재는 다시 쓰는 사람이 적어진다. 젊은 사람들은 이미 이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9. 노공(老公)


옛날에는 태감(환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공(老公), 현재 가장 유행하는 이 칭호를 얘기해보자. 노공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태감을 부를 때였다. 환관이다. 고대의 관명은 시인(寺人), 황문(黃門), 초당(貂瑭)이다. 존칭은 내관(內官), 내신(內臣), 중관(中官), 중귀(中貴)이고, 비칭(卑稱)은 내수(內竪), 엄환(閹宦), 태감(太監), 엄인(閹人)이다. 민간에서는 속칭 노공이다.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입한 후, '타노공(打老公)"했다는 설이 있다(<조림잡조>), 이렇게 보면 노공의 최초 신분은 원래 태감이다. 여인들이 남편을 노공이라고 부를 때, 뼛속의 잠재의식이 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바로 태감같은 맛이 난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