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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중국본토와 대만간의 7차례 전투

by 중은우시 2019. 1. 21.

글: 양녕양경(兩寧兩京)


제1차전투


삼국시대, 오나라의 군주인 손권(孫權)은 중원의 잔혹한 투쟁에서 벗어나, 이미 해상으로 발전을 시작했다. 227년, 손권은 동치(東治, 지금의 하문)에서 원해작전이 가능한 수군을 훈련시키고, 대형전선 수백척을 건조한다. 230년, 손권은 위온(衛溫), 제갈직(諸葛直) 두 장군으로 하여금 수군 1만여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당시의 이주(夷州, 지금의 대만)를 원정하게 한다. 당시 토착민으로부터 경미한 저항을 받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기후가 맞지 않고, 또한 수천의 장병들이 병사하여, 두 장군은 부대를 이끌고 대륙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토착민 수천명을 데려와서 대만에 대하여 더 잘 이해하고, 대만을 통치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제2차전투


수나라말기, 대신 하만(何蠻)이 수양제에게 유구(流求, 지금의 대만)의 만황지지를 개척하자고 극력 설득한다. 607년, 수양제는 하만과 우기위(羽騎尉) 주관(朱寬) 대장군으로 하여금 같이 수군 만여명을 지휘하여 수나라의 '오아(五牙)'전함 수백척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유구원정을 하도록 보낸다. 그러나 전과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토왕환사(土王歡斯)의 저항을 받는다. 609년 수양제는 다시 호분랑장(虎賁郞將) 진릉(陳棱) 대장군으로 하여금 만여명을 지휘하여 대만동정을 시작하게 한다. 수나라군대는 고풍(高豊, 지금의 광동성 조주)에서 출발하여 먼저 일곤신(一鯤身, 지금의 팽호)에 도착하고, 다시 대만서안의 중부로 상륙한다. 다시 토왕환사가 부대를 이끌고 막았지만, 수차례의 격전을 거치면서, 수군이 대승을 거두고, 토왕환사는 참수당한다.


제3차전투


남송때인 1171년, 남송은 천주(泉州)지부 왕대유(汪大猷)로 하여금 팽호에 건물 200여간을 짓게 한다. 그리고 수천의 장병을 보내어 상주시킨다. 다음 해에 수군 만여명을 보내어 대만본섬을 공격한다. 토착민들의 저항을 물리친후 본섬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주둔군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둔간(屯墾)제도를 시행한다. 그리고 조정관리를 파견하여 관아를 만든다. 이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대만지역에 정식으로 주둔한 것이다.


제4차전투


원나라때인 1292년, 원세조 쿠빌라이는 수전을 잘아는 한군(漢軍) 6천여명으로 하여금 전함 3백여척을 이끌고 팽호(지금의 대만)로 가서, 당시의 토착고산족을 초무(招撫)하도록 한다. 원군이 도착한 후 현지 토착민들이 저항을 한다. 원군은 인원수가 너무 적고, 게다가 기후에도 적응을 못하여 사기가 낮았다. 결국 패전한 후 남은 한군이 대륙으로 도망쳐 온다. 1297년, 쿠빌라이는 다시 복건평장정사 고흥(高興)을 동정대장군(東征大將軍)으로 임명하여, 한군수군 1만5천여명을 이끌고, 전함 수백척으로 다시 대만으로 진격한다. 수개월의 격전을 거쳐 대만본섬을 점령한다.


제5차전투


명나라때, 왜구가 수시로 중국동남연해를 쳐들어온지 백여년이 지났다. 1602년(만력30년), 명군에게 격퇴당한 일부 왜구가 유구(琉球, 대만을 가리킴)로 도망친다. 명나라의 항왜명장(抗倭名將) 심유용(沈有容) 대장군의 지휘하에, 명군은 대만근해에서 일거에 대부분의 왜구를 섬멸시킨다. 대만백성들은 열렬히 명군의 상륙을 환영한다. 이것은 중국군대가 처음으로 외국침략자의 손에서 대만을 수복한 경우이다. 네덜란드는 무역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1603년 포르투갈인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영토 마카오로 진격하나, 실패한 후 남양으로 물러난다. 1622년, 네덜란드인들은 다시 마카오를 공격하나 성공하지 못한 후, 다시 팽호로 퇴각한다. 1624년, 명나라는 수군 만여명, 전함수백척을 파견하여 네덜란드군을 공격한다. 네덜란드인들은 백기를 들고 투항한다. 그러나 참패한 네덜란드인들은 대만섬으로 도망친다. 당시 명나라는 만주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대문에, 대만의 네덜란드침입자들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1626년, 스페인인들이 대만섬에 상륙하여 북부를 점령한다. 네덜란드인은 스페인인들을 공격하였고, 최종적으로 1642년 스페인인을 몰아낸다. 그리고 전체 대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다.


제6차전투


명말청초인 1657년, 남명의 장수인 정성공(鄭成功)은 당시 대만에서 도망쳐온 하정빈(何廷斌)을 접견한다. 그는 정지룡(鄭芝龍, 정성공의 부친)의 옛부하였다. 대만에서 계속 네덜란드인의 통역으로 있었다. 그가 온 것은 주로 정성공을 설득하여 대만을 정벌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대만은 이미 한화(漢化)된지 수세기가 지났다. 1622년 네덜란드는 계속 대만에 전함을 파견하여 정찰하고 무장소요를 일으켰다. 1642년, 네덜란드는 대만으로 대거 진공하여, 네덜란드대군이 금방 계룡(鷄籠, 지금의 基隆), 담수(淡水)등지를 점령한고, 스페인인을 몰아낸다. 네덜란드인은 대만에서 군사관제를 실시하고, 현지민들의 저항을 피비린내나도록 진압했다. 그리고 대만을 기지로 삼아 연해에서 약탈을 자행했고, 중국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식민자들의 폭력적인 행동은 대만인민의 분노와 원한을 산다.


정성공과 여러 장수들은 반청복명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정성공은 하정빈으로부터 대만의 상황을 들은 후, 바다를 건너 네덜란드인들이 점령한 대만을 수복하기로 결정한다. 1658년, 정성공은 대만을 수복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정성공은 시간을 아껴서 전선을 수리하고, 항로를 탐사한다. 1661년 3월 23일, 정성공은 네덜란드군이 박약하고(1천여명), 계절풍으로 지원군을 보내기 어려운 틈을 타서, 친히 2.5만명의 병사와 수백척의 전선을 제1진으로 출발한다. 하정빈과 항로를 잘 아는 어민의 인도하에 금문(金門) 료라만(料羅灣)에서 출발한다. 정성공의 군대는 팽호에서 출발하여, 사월 초이틀 새벽, 네덜란드군의 방어가 느슨한 녹이문항(鹿耳門港, 지금의 대남시 안평항 북쪽)에 도착한다. 정성공은 정오의 만조를 이용하여, 군대를 이글고 물이 얕은 북항도로 녹이문항으로 들어간다. 수군 4천명으로 하여금 북선미도(北線尾島)를 점령하게 하고, 네덜란드수비군을 섬멸한다. 본인은 주력을 이끌고 대해만을 통하여, 직접 화료항(禾寮港)으로 진입한다. 섬의 수천 동포가 호응해주었다. 사월 초사흘, 정성공은 승기를 틈타 1.2만명으로 적감성(赤嵌城)을 포위한다. 성안의 수원을 끊는다. 성의 주위에 화기를 설치하여, 네덜란드군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가한다. 포로로 잡았던 네덜란드 적감성 수비군의 대장인 Jacobus Valentijn(중문명 描難實叮)의 동생부부를 보내서 투항을 권하게 한다. 초나흘, Valentijn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정성공은 그를 후대해준다. 정성공의 포로우대정책하에 네덜란드군대의 흑인병사들은 정성공에 의탁하여 창을 거꾸로 든다. 정성공이 계룡, 담수에 도착하기도 전에 대만현지인들이 무기를 들고 네덜란드군을 몰아냈다.


대만성은 8개월간 포위당한 후에 정성공군의 제2진이 상륙한다. 십이월 초엿새, 정성공은 대만성 바깥의 중요거점인 오덕륵지보(烏德勒支堡)에 포탄을 쏘도록 명한다. 포탄 2천여발을 쏘고 그날 밤에 함락시킨다. 대만성내에 웅크리고 있던 네덜란드 잔여군 6백여명은 부상과 기근, 질병으로 거의 전투력을 잃었다. 네덜란드식민평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성을 내주기로 결정한다. 십이월 십삼일(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군은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이렇게 하여 네덜란드인들은 38년간 점령했던 대만에서 물러나게 된다. 대만은 다시 중국에 돌아왔다.


제7차전투


청나라때, 강희제는 대만에 대한 전략을 다시 초무로 바꾼다. 이때부터 십여년에 걸친 의화협상이 벌어진다. 그러나, 시종 성과를 얻지 못한다. 1681년(강희20년), 청나라조정은 정경(鄭經)이 병사하고, 아들 정극상(鄭克塽)이 나이가 어리고, 현지인들과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서, 무력으로 대만을 통일하기로 결정한다. 강희21년 여름, 조정의 여러가지 반대를 물리치고, 항장(降將) 시랑(施琅)을 수사총제독(水師總提督)에 임명하고, 복건총독 요계성(姚啓聖)과 대만을 취할 계책을 논의하도록 한다. 두 사람은 명을 받은 후, 적극적으로 군무를 정돈하고, 전함을 건보하며, 병력을 훈련시키고 장수를 뽑는다. 동시에 정찰병을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고, 항로를 탐사한다.



시랑장군상



1683년(강희22년) 육월 십사일, 시랑은 청군수사 2만여명, 각종 전함 2백여척을 이끌고 직접 팽호로 진격한다. 각 전함의 돛에는 장수의 이름ㅇ르 적어서 지휘연락에 편리하게 하였다. 정극상의 수비군은 2백여척의 전함과 근 2만명의 군인이 있었다. 수량으로는 청군과 비슷했다. 육월 이십이일, 청군은 팽호섬을 강공한다. 시랑은 수사를 3로로 나누어, 총병 진망과 동의로 하여금 좌우익을 맡게 하고, 각각 전함 오십척을 지휘하게 했으며, 각각 계롱서와 우심만을 공격하게 하여 견제했다. 시랑은 친히 전함 백여척을 이끌고 중로로 낭마궁(팽호본도 서북각)를 공격한다. 청군은 용맹하게 싸웠고, 정극상군의 전함 190척을 부수고 정극상부의 주력 1만2천여명을 섬멸한다. 그리하여 정극상부의 잔여부대 4천2백여명의 투항을 받아낸다. 정극상군의 총사령관 유국헌(劉國軒)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남은 2,3십척의 전선에 잔여병사 수백명을 태우고, 낭패하여 대만본섬으로 도망친다. 대만내부는 깜짝 놀란다. 유국헌은 투항을 주장하고, 강희제는 승기를 틈타 투항하라는 조서를 보낸다. 칠월 십오일, 대만의 정극상군은 사람을 보내 지도명책과 투항서를 보낸다. 팔월 십삼일, 시랑은 청군을 이끌고 대만섬에 상륙한다. 나중에 청나라조정은 시랑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만에 현, 부, 순도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통치를 강화하고, 정성공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20여년간 정씨일족이 통치하던 시기를 끝내게 되었다. 강희제는 마침내 대만을 중국판도에 편입시키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