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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장덕성(張德成): 한 의화단 두목의 죽음

by 중은우시 2018. 7. 28.

글: 기차시도(汽車視圖)


19세기말, 유럽열강이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해외식민지를 개척할 때, 중국인민은 권법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직예 고비점(高碑店) 조장촌(趙張村)의 어부인 장덕성은 어느 날, "왕후장상에 씨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어, 가족을 내버려두고 의화단의 대사형, 대사저를 따라 권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1900년 봄, 서태후는 서강열강이 광서제를 옹립하고, 자신을 내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면서도 두려었다. 그리하여 머리를 굴린 다음에, 경진지구에서 날로 활약하고 있던 의화단(義和團) 권민(拳民)의 도움을 받아 외국인을 치고자 한다. 그리하여, 서방 외교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을 보호하는 조령을 내린다.


1846년 장덕성은 고비점 백구하(白溝河 변에 있는 가난한 선부(船夫)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8년 10월 조삼다(趙三多), 염서근(閻書勤)등이 산동 직예경계지구에서 의화단의 난을 일으킨 후 , 화북평원의 각지에서는 설단연권(設壇練拳)의 기풍이 점점 일어난다. 1900년 4,5월에 장덕성은 천진 정해현의 독류진으로 가서 창업한다. 순륙(孫六), 주오(周五)등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키운다다. 5월에는 스스로 천하제일단 단주'가 된다.1900년 5월, 유연승(劉連勝)등의 지지하에, 그는 정해현(靜海縣) 독류진(獨流鎭)에서 "의화신단천하제일단(義和神團天下第一壇)"을 만들도 스스로 제일대 단주(壇主)가 된다. 그는 강호를 오가며 많은 사람들과 사귀었고 어느 정도 조직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백성들이 속속 참여한다. 가입자가 5000여명에 달했다. 심지어 정해현의 왕현령도 가입한다.  이어서 양류청(楊柳靑), 천진서부교외등지에 단을 10여개 설치하, 총인원수가 2만명에 이른다. 장덕성은 '선부'에서 장군으로 화려한 변신을 한다. 그의 '천하제일단'은 의화단운동에서 실력이 가장 강하고 영향이 가장 큰 대오의 하나가 된다.


1900년 의 어느 날 경진지구에서 활동하던 러시아군인이 발포하여 무고한 아이가 부상을 입는다. 장덕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천하제일단'의 민중으로 서양병사들을 포위하고, 대장과 사병 수명을 폭행하여 무리들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이것은 '천하제일단' 성립이후 가장 자랑할만한 성과였다.


얼마후 서태후는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팔국연합군이 침범한다. 청나라군대는 바로 궤멸한다. 직예의 4명의 도원(道員)이 연합하여 천진으로 오면서 독류진을 지나간다. 장덕성의 수하들은 이들을 잡아서 신단으로 데려가고, 장덕성이 친히 심문한다. 그리하여 이 4명이 조정의 고위관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덕성은 친히 그들을 묶은 줄을 풀어주고, 4명을 위하여 아주 멋진 마술공연도 보여준다. 칼을 삼키는 것과 칼과 창이 몸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刀槍不入)등등이다. 4명의 관리들은 이런 건 본 적이 없어서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이때 장덕성이 말한다. 돌아가서 너희 총독에게 말씀드려라. 나에게 20만냥 은자를 주면, 서양인을 소멸시키는 임무는 내가 맡아서 처리햐겠다고.


이대의 직예총독은 유록이다. 그는 마침 서양인을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싸워주겠다고 하니 아주 기뻐한다. 즉시 서신을 쓴다. 장덕성으로 하여금 천진으로 와서 대계를 함께 논의하자고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서신을 보낸 후 소식이 없었다. 다시 서신을 한통 썼지만 역시 회신이 없었다. 유록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는데, 원래 장덕성은 유록이 예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청나라관리도 아니데, 왜 내가 당신의 명을 들어야 하는가?


유록은 그 말을 듣자 서양인이 오니까 뭐든지 해야해서 자신의 의장대를 보내고, 8명이 드는 가마도 보내어 북과 징을 치면서 장덕성을 모셔온다. 청나라의 규정에 '8명이 드는 가마'는 3품이상의 흠차대신 혹은 총독,순무만이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직급이 안되는데도 앉으면 그것 자체가 '참월'이다. 사정이 급하다보니 유록은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못되었다.


장덕성은 체면을 충분히 차렸다고 보고 마침대 천진으로 간다. 유록은 친히 장덕성을 총독부로 맞이한다. 다음 날에는 연회를 베풀어 준다. 연회에서 총독부의 막료와 '천하제일단'의 권민은 서로 술잔을 나눈다. 그런데 주인공인 장덕성은 너무 피곤해서인지 잠이 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소리도 내지 못하며, 장덕성의 코고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참을 자고난 후에 장덕성은 허리를 펴며 깨어났다. 그러더니 허리에서 두 개의 권총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말한다. 여러분 미안하다. 나는 금방 원신(元神)이 나가서 서양인을 기습하러 갔고, 서양인의 대포를 파괴해 버렸다. 이 두 개의 권총은 바로 전리품이다.


우리가 그의 말을 믿든 말든 상관없지만, 당시의 유록은 그 말을 깊이 믿었다. 그리하여 장덕성에게 총독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장덕성은 이로 인하여 명성을 크게 떨친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직예총독이 나를 만났을 때 어쩌고 저쩌고..."했으며, 진상을 모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괄목상대했다.


1900년 여름, 6월 17일, 팔국연합군이 대고포대(大沽炮臺)를 함락시키고, 수륙으로 병진하여 천진으로 진격한다. 27일, 장덕성은 '천하제일단' 5천명을 이끌고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높이 들고, 천진으로 진군한다. 27일 의화단과 청군은 조계지역의 연합군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팔국연합군은 조계로 통하는 길목과 주요도로 및 진지의 앞에 지뢰를 매설해 두었다.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장덕성은 단민들에게 수십마라의 소를 잡아오게 해서 화우진(火牛陣)을 선봉으로 삼아, 단민들이 공격을 감행한다. 여러 서양병사들을 추살했을 뿐아니라, 삼정양행(三井洋行)과 살보실양행(薩寶實洋行)을 파괴한다.


유록은 조정에 글을 올려, 장덕성의 공을 얘기하고, 장덕성에게 두품정대화령 황마괘를 하사할 것을 건의한다. 비복(批復)이 내려오기도 전에 서양인의 포화가 이미 지척에 다달았다.


7월 10일, 방판북양군무(幇辦北洋軍務) 송경(宋慶)이 천진에 도착한다. 그는 의화단의 야성은 길들이기 어렵다고 보고, 권단(拳壇)을 해체하고, 권민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13일, 팔국연합군 1만여명이 천진으로 진격한다. 장덕성은 단민과 일부 청군을 이끌고 남문보위전(南門保衛戰)에 참가한다.


7월 14일, 팔국연합군은 천진을 점령한다. 직예총독 유록은 패전후 자살한다.

장덕성이 의화단을 이끌고 자죽림(紫竹林)을 공격한 일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의화단운동이 천진에서 팔국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된 후, 장덕성에 관한 기록은 아주 적다. 특히 장덕성의 사인은 천고의 수수께끼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지주에게 살해당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관신(官紳)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익세보(益世報)>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장덕성의 사망과 관련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새로 발견한 의화단 단민의 회고록에서도 이 일이 언급되어 있었다. 마침내 장덕성 죽음의 수수께끼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장덕성은 팔국연합군이 천진성을 점령한 후, 양류청으로 철수한다. 현지지주의 공격으로 장덕성은 다시 단민을 이끌고 독류진으로 돌아온다. 이때, 팔국연합군은 이미 정해로 가서 장덕성의 무리를 진압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밤에 장덕성은 의화단 단민을 이끌고 독류진의 노룡만(老龍灣)'의 대청하 북안에서 배를 타고 자아하를 거슬러 올라가 대성(大城)인 왕가구진(王家口鎭)으로 간다. 얼마 후 팔국연합군이 독류진에 도착한다.


왕가구진은 하북대성의 중요도시이다. 자아하는 마을안을 지나서, 지리적 위치가 험준한 요지이다. 이 지역의 의화단은 잘 조직되어 있었다. 장덕성이 의화단을 이끌고 왕가구진에 도착한 후, 현지의 지주관신은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준다. 의화단을 위하여 양식과 돈을 모아주며, 장덕성이 하루 빨리 부하들을 이끌고 왕가구진을 떠나달라고 부탁한다. 팔국연합군이 왕가구진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장덕성은 왕가구진이 천진 및 정해의 독류진과 비교적 가까워서 외국인의 공격을 당하기 쉽다고 생각해서, 돈과 양식을 얻은 후 즉시 이동한다.


현지 백성들에게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장덕성이 이번에 모든 군량의 수량은 아주 많았다고 한다. 의화단 단민은 돈과 양식을 큰 배에 실어서 옮길 준비를 했다. 출발할 때, 장덕성은 현지백성들이 그를 위해 마련해준 가마에 앉았고, 위풍당당했다. 현지 의화단 단민과 백성들은 협도(夾道)에서 배웅하고, 지주와 관신은 진입구에서 배웅했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은 이 '열정'적인 환동의 북소리징소리 속에 험악한 살기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원래 왕가구진에는 유의학(劉義鶴)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왕가구진에 미면포(米麵鋪)와 대거점(大車店)을 운영했는데, 그는 매매규모가 작기는 해도 세력은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부근의 홍창회(紅槍會)와 관계가 밀접했다. 유의학은 장덕성이 이렇게 많은 전량을 운송한다는 것을 알고,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홍창회와 밀모하여, 이 군량을 강탈하고자 한다. 장덕성이 출발하는 그날, 유의학은 홍창회와 왕가구진 부근의 갈대밭에 매복을 둔다. 이곳은 갈대가 무성하고, 물살이 빠르며, 지형도 복잡하다. 그리하여, 의화단 단민은 속속 총알을 맞고 물에 빠진다. 어떤 사람은 총을 맞아 죽고, 나머지는 강안으로 기어올라가 도망쳤다. 이때, 유의학은 큰 배로 뛰어 올라가, 선창안에 있는 장덕성을 발견한다. 유의학은 총을 쏴서 장덕성을 명중시키고, 칼질을 해서 죽인다. 그리고 장덕성의 시신을 자아하에 던져버린다. 장덕성은 이렇게 죽은 것이다. 당시 나이 54세였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이러하다.


장덕성은 부대를 이끌고 팔국연합군과 교전을 해본 후에, 육체만으로는 서양의 총과 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천진이 함락된 후, 부대를 이끌고 천진을 빠져나가 왕가구(王家口)로 간다. 의화단은 구걸이라도 해야 했다. 장덕성은 현지의 왕씨성 족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왕씨 족장은 급히 2명이 드는 작은가마를 보내어 장덕성을 영접한다.


이때도 장덕성은 큰소리를 쳤다.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천진에 있을 때, 총독도 8명이 드는 가마로 나를 맞이했다. 이러면 내가 가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이 작은 동네에 왔다고 겨우 이렇게 작은 가마를 보내어 나를 놀리다니, 이것은 신령을 모독하는게 아닌가?"


이때의 장덕성은 이미 자아가 극도로 팽창되어 있었다. 이미 자신을 사람이 아닌 신으로 생각했다. 왕족장은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사묘로 가서 신선 관노야가 쓰는 8명이 드는 가마를 빌려온다. 그러나 새로운 골치거리가 나타난다. 장덕성은 왕가구에 도착한 후에, 현지인들이 자신을 위하여 준비한 연회의 접대수준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욕을 하며 직접 탁자를 엎어버린다.


이건 너무 심했다. 현지인들은 화가 났다. 아예 농기구를 들고 장덕성이 무리에 대항한다. 그 결과 천하제일단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장덕성은 촌민들에게 포로로 잡힌다.


만일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사나이답게 굴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지금까지의 명성을 지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의 장덕성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현지인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빈다.


생사의 순간에 현지인들은 장덕성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는 도창불입이 아니냐. 그럼 한번 우리의 이 둔도(鈍刀)가 어떤지 보자." 그러고는 촌민들이 그에게 칼을 내려치니, 그는 난도질당하여 죽는다. 일대효웅이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