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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난방공화국(蘭芳共和國)"은 국가로 볼 수 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1. 1.

글: 희랄인(嘻辣人)






최근 필자는 인터넷에서 놀라운 글을 읽게 되었다:


"최초의 현대공화국국가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1776년에 설립된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미국이 독립하던 같은 시기에, 중국인들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인 칼리만탄섬의 서부에 난방공화국을 설립했었다. 난방공화국은 현지의 토착주민과 손잡고, 서방식민자의 침략에 저항하며 107년간 존속하다가, 19세기말에 나라도 적고 힘도 없어 네덜란드 식민자들에게 멸망당한다..."


인터넷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초기 중국인들이 이렇게 '현대화'되었다는데, 희희낙락하고 있다.

기괴한 것은 '난방공화국'이 만일 사실이라면 큰 사건인데, 역사교과서에 왜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것일까?


1777년, 건륭42년, 나방백(羅芳伯)은 파라주(婆羅州) 동만율(東萬律, 지금의 인도네시아 서칼리만탄성)의 '난방대총제(蘭芳大總制)"의 저택 앞에 서서 형제들의 축하를 받고, "난방대총제"가 정식 성립된다.


난방인들은 한번도 스스로를 "난방공화국"이라고 한 적이 없다.

"난방대총졔"라는 인도네시아의 궁벽진 황무지섬의 자치단체가 사라진지 100년후에 돌연 '민주, 대통령제, 공화국'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난방 사람들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나방백(1738-1795)은 광동 가응주(嘉應州, 지금의 매주시) 사람이다.

젊었을 때의 경력은 전해지지 않으나, 소문으로는 민간비밀조직 천지회(天地會)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1772년, 34살때, 남양으로 가서 황금을 캐겠다는 꿈을 안고 광동의 호문에서 출발하여, 서칼리만탄의 곤전(坤甸)으로 간다. 거기서 금광채굴회사에서 일한다.


나방백이 출국한 시간은 바로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의 이민시기이다. 매주의 많은 객가인들은 강제로 사천까지 이주하게 된다. 나방백은 아마도 이를 피해 해외로 가서, 엘도라도를 찾으려는 꿈을 꾼 것일 것이다.


그후, 현지의 몇개 광산회사는 합병을 통해 난방공사(蘭芳公司)가 된다. 전성기에는 만여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나방백은 명망이 높아서, 회사의우두머리로 추대된다.난방공사는 자바섬 일대의 네덜란드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무기, 탄약을 구매하여 민병대를 조직한다.


1777년, 나방백은 동만율을 점거하여 중심지로 삼아, 남북 수십리의 광산지역에 "난방대총제"를 건립하고 자칭 "대당총장(大唐總長)"이라 한다. 이렇게 자치구를 건립한다. 그리고 자치구내에는 독립적인 법규를 시행하고, 자체적으로 세금을 거두며, 병력을 둔다. 그리고 채광, 농업, 교통, 문화교육등 사업을 발전시킨다.


1795년, 나방백이 병사하고, 이 지구는 다시 수십년을 더 존속한다. 그리고 1884년 네덜란드인에 의하여 소멸된다.


"난방대총제"는 아주 원시적이고 낙후한 열대밀림지역에 설립되었고, 여전히 네덜란드동인도군도의 세력범위에 속해있었다.

그리고 다른 어느 나라로부터도 국가승인을 받지 못했다. 실제로 '국가'라고 부를만한 조직이 아니다.


난방공사 이전에 중국인들은 동남아에 이미 상당히 많은 '공사'를 설립했었다.

그들의 운영방식은 '난방대총제'와 대동소이하다. 모두 광산지역에서 파생된 자치조직이다


이들 중국인들의 '공사'는 무력을 보유하고, 서로간에 세력다툼을 벌였고, 자주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은 네덜란드인의 합종연횡으로 하나하나 소멸한다.


어떤 사람은 '대총제'는 오늘날 민주국가의 '대통령제'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은 전혀 다르다.


나방백은 스스로를 '대당총장'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중국인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대당총장의 전승은 고위지도자들의 호선이나 선양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민주국가가 인민의 보통선거로 대통령을 선거하는 것과 전혀 의미가 다르다.


"난방공화국"이라는 말은 네덜란드의 한학가(漢學家) 고연(高延, J. J. M. De Groot, 1854-1921)의 저작에서 처음 나온다.


고연은 일찌기 인도네시아에서 일했고, '난방대총제'의 마지막 몇년, 그리고 마지막 대당총장 유야생(劉阿生)과 교류가 있었다. '난방대총제'가 네덜란드인에 의하여 해산돈 다음 해, 즉 1885년, 그는 <파라주화인공사제도>라는 책을 쓴다. 그리고 그의 난방에 대한 생각을 적는다.


고연은 이렇게 보았다: "난방회사는 중국농촌의 장로향신이 민중의 뜻에 따라 공공사물을 관리하는 촌사자치(村社自治)와 일치한다. 난방은 바로 과두정치공화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연의 주장을 읽고, 흥분하여, '난방'이라는 말만 나오면 '공화국'이라는 말을 덧붙쳤다.

백여년동안, 난방공화국이라는 국명은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