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절가장(折家將): 북송에서 유일하게 세습된 무장세가(武將世家)

중은우시 2019. 1. 10. 20:29

글: 종횡오십년(縱橫五十年)


북송의 무장세가를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양가장(楊家將), 조가장(曹家將), 종가장(種家將)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리고 있는 무장세가가 있다. 바로 절가장이다. 이들은 양가장보다 대단하고, 북송에서 유일하게 세습권력을 가진 무장세가이다. 그들은 요(遼), 서하(西夏)를 막아내며 200년간 위세를 떨친다. 심지어 북송통치시기보다도 더 길었다. 그렇다면 절가장은 도대체 어떤 가족이었을까?


기실 절가장은 한족이 아니다. 그들은 서하의 통치자와 같은 당항족(黨項族)에 속한다. 그러나 당나라말기이래, 그들은 중원왕조에 충성을 다했다. 절가장은 대대로 부주(府州)에 거주했고, 현지의 호족이었다. "진(晋), 한(漢)이래 홀로서 부주를 장악하고, 서북을 통제했으며, 중국이 그들에 의존했다" 즉, 오대십국이래, 절가장은 바로 중왕왕조의 서북방어벽이었다. 그럼 북송부터 얘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북송이 건립될 때, 절가장의 '장문인'은 절덕의(折德扆)였다. 그는 후주(後周)때 이미 관직이 절도사(節度使)에 이른다. 북한(北漢), 요(遼)와의 전투에서 계속하여 전공을 세운다. 당시 부주의 지리적 위치는 아주 중요했다. 요나라, 서하와 접경하고 있었고, 게다가 절가는 북송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고 전공이 혁혁하여, 북송의 황제는 파천황의 조치를 취한다. 절가에 부주지주(府州知州)를 세습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는 북송이 건립된 후, 송태조가 일련의 개혁을 취했고, 그 중의 하나는 바로 번진을 폐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방에서 문관을 지주로 임용하며, 지주는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며 맡는 것이다. 다만 절가는 예외였다. 절덕의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절어훈(折御勛), 절어경(折御卿)이 선후로 부주지주를 맡는다. 다시 제3대의 절유정(折惟正), 절유창(折惟昌), 절유충(折惟忠)으로 이어지고, 제4대의 절계선(折繼先), 절계민(折繼閔), 절계조(折繼祖), 절계세(折繼世)로 이어지며, 제5대 절극행(折克行), 제6대 절가적(折可適), 절가구(折可求)까지 이어진다.


만일 여기에 절덕의의 부친인 절종완(折從阮), 조부 절사륜(折嗣倫), 증조부 절종본(折宗本)까지 절가는 부주를 점거하고 있으면서 서북지역에서 300년이나 위세를 떨쳤다. 당항족 출신이고, 변방에 위치한 절가는 전투력이 아주 강했다. 명장을 배출했다고 할 수 있다. "절종완 이래로, 연이어 명장을 배출하여, 대대로 충성을 다하니, 서북의 방어막이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북송초기, 요나라와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995년 요나라의 대장 한덕위(韓德威)가 군대를 이끌고 부주를 공격한다.


당시의 부주지부는 절어경이다. 그는 수천의 장병을 이끌고 하차지전(河汊之戰)에서 요군을 대파한다. "오천의 수급을 베고, 말 천필을 얻었다." "이때부터 거란이 무서워했다." 나중에 요군은 보복하고자 한다. 절어경은 병든 몸으로 출정하였다. 모친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 요양하라고 하나, 절어경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말을 한다: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었는데, 변방의 적을 아직 없애지 못한 것은 이는 나 절어경의 죄이다. 지금 적을 앞에 두고 병사를 버리고 스스로 편한 것을 구하는 것은 안될 말이다. 군중에서 죽는 것이 나의 본분이다. 백태부인에게 나를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려라. 충과 효는 둘 다 이룰 수는 없다." 그리고는 다음 날 절어경은 군중에서 죽는다.


절가는 대대로 명장을 배출했고 계속 북송에서 거란, 서하를 막아내는데 큰 공헌을 한다. 예를 들어, 절가적은 16,7세부터 군대에 나가, "사십여년동안, 하루도 병사들 사이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고, 매번 싸울 때마다 이겼으며, 연이어 큰 공을 세운다. 은혜위 위엄을 같이 세우니 그에 비견할만한 장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서하와의 전투에서 하마터면 양태후를 생포할 뻔하기도 한다. 절가는 북송을 위하여 서하를 막고, 요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진족 금나라의 침입은 막아내지를 못한다.


북방이 함락되면서, 부주는 아주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금나라의 협박하에, 절가구(折可求)는 인주, 부주, 풍주의 3주를 가지고 금에 투항한다. 부주를 잃은 절가장은 신속히 소멸한다. 절가구는 금나라사람에게 독살당하고, 그의 조카 절언질(折彦質)은 남송에서 탄압을 받고 우울하게 뜻을 펼치지 못했다. 결국 절가장은 쓸쓸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절가장은 양가장과도 연원이 있다는 것이다. 절덕의의 딸이 바로 양업(楊業)의 처이다. 즉 소위 "사태군(佘太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