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유표(142-208), 자는 경승(景升), 산양군 고평현(지금의 산동성 미산) 사람이다. 동한말기의 종실, 명사이고 한말 군웅중 한 명이다. 서한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이다. 동한말기, 유표는 진남장군, 형주목, 가절에 임명되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해진다. 형주에 있는 동안, 유표는 은위를 병행하며, 인재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서 선비를 길렀다. 멀리 원소와 가까이 지내고, 가까이는 장수(張繡)와 친하게 지내고, 안으로는 유비를 받아들여, 수천리의 영지를 차지하고 십여만의 병력을 보유해서 형강(荊江)에서 칭웅했다. 먼저 손견을 죽이고, 뒤에는 조조에 항거했다. 군웅축록의 동한말기, 유표가 오랫동안 형주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자연히 용맹한 장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표는 휘하에 팔대맹장이 있었다. 이들의 진용은 촉한의 오호상장이나, 조위의 오자양장(五子良將)에 못지 않았다.
1. 황충(黃忠)
황충(?-220), 자는 한승(漢升)이고, 남양군 남양(하남군 남양) 사람이다. 황충이라는 장수가 유표의 수하로 있을 때는 비교적 이름이 없었다. 유비를 따르기 시작한 후, 황충은 익주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여한다. 당연히 황충에 있어서, 일생동안의 전성기는 정군산(定軍山) 전투이다. 유비가 한중에서 칭왕한 후, 후장군(後將軍)에 봉해지며, 관내후(關內侯)를 받는다. 다음 해에 황충은 병사한다.
2. 위연(魏延)
위연(?-234), 자는 문장(文長)이고 의양 평지(平氏,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동백현) 사람이다. 유비가 한중을 함락시킨 후, 위연을 발탁하여 진원장군, 한중태수로 삼아 일방을 지휘하는 대장으로 삼는다. 이렇게, 위연은 촉한의 개국황제 유비의 신임을 깊이 받는다. 유비가 백제성에서 탁고한 후, 제갈량도 마찬가지로 위연이라는 맹장을 중용한다. 그러나,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한 후, 위연은 양의(楊儀)와의 투쟁에서 실패하여, 마대(馬垈)에게 참살당한다. 이는 촉한의 큰 손실이었다.
3. 이엄(李嚴)
이엄(?-234), 나중에 이름을 이평(李平)으로 개명한다. 자는 정방(正方)이고, 남양 사람이다. 이엄은 젊었을 때 재능으로 유명했다. 형주목 유표는 그를 군내의 각현으로 보내어 관직을 맡긴다. 유비를 따르고 난 후, 이엄은 계속 발탁된다. 유비가 백제성에서 탁고한 후, 이엄은 제갈량과 함께 탁고대신이 된다. 촉한에서 이엄은 한때 중도호, 표기장군등 관직을 맡는다.
4. 곽준(霍峻)
곽준은 자가 중막(仲邈)이고 남군 지강(지금의 호북 지강) 사람이다. 그의 형은 곽독(霍篤)으로 한때 고향에서 가족무장세력 수백명을 모았다. 곽독이 죽은 후, 형주목 유표는 곽준으로 하여금 이 부대를 지휘하게 한다. 유표가 사망한 후, 곽준은 유비를 따라 전투에 참가한다. 익주를 공격할 때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유비가 한중을 나누어 재동군(梓潼郡)을 만들 때, 곽준을 재동태수, 비장군(裨將軍)으로 삼는다.
5. 문빙(文聘)
위의 4명은 모두 형주의 장수이고, 모두 마지막에 유비를 따랐다. 이와 상응하게 문빙이라는 맹장은 조위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삼국지>등 사료기재에 따르면, 조조를 따른 후, 문빙은 여러차례 병력을 이끌고 관우의 군대를 막아냈다. 그리하여 조조가 의존하는 변방의 대장중 하나가 되어 명성을 널리 떨친다. 나중에 여러번 정벌에 참여하여 후장군, 신야후(新野侯)에 봉해진다.
6. 채모(蔡瑁)
동한말기, 유표가 형주목의 위치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채모의 가족이 지지해준 것과 큰 관계가 있다. 208년,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들어올 때, 채모와 괴월(蒯越)이 공동으로 조위에 투항한다. 그후 조조의 휘하에서 일한다. 중랑, 사마, 장수교위를 역임하고, 한양정후(漢陽亭侯)에 봉해진다.
7. 감녕(甘寧)
문빙, 채모가 조위에 투항하였지만, 감녕은 손권을 따른다. <삼국지>등 사료 기재에 따르면, 그는 유표와 황조(黃祖)의 휘하에 있었지만 중용되지 못했다. 건안13년(208년) 감녕은 부대를 이끌고 손권에 투항한다. 그후 감녕은 동오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손권은 그를 조위의 장료(張遼)와 나란히 언급할 정도였다.
8. 황조(黃祖)
마지막으로 이상이 7명 장수들은 각각 위,촉,오의 삼국에 투신한다. 그러나 황조는 위,촉,오의 어느 하나를 따르지 않았다. 형주목 유표의 수하로 강하태수(江夏太守_이던 그는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과 교전할 때, 부하가 손견을 화살로 쏘아서 죽였다. 그리하여 강동의 손씨와 원한을 맺는다. 그후 황조는 건안13년(208년), 손권(孫權)과 싸우는 돚중에 패배하여 피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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