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숭정2년, 즉 1629년 숭정제 주유검은 전면적으로 동림당인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대명정계에 동림당의 잔여인원들은 다시 중용된다.
다시 나온 동림당인들은 중망(衆望)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동림당인은 이미 옛날의 독림당이 아니었다. 왜 그런가?
다시 조정의 권력중심으로 돌아온 동림당인은 더 이상 육군자(六君子)와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숭정조때 동림당인으로 남은 사람은 모두 어떤 사람들인가?
당시의 대표인물을 보자. 전겸익. 그는 유명한 동림문학파(東林文學派)의 영수이고, '후동림(後東林)'의 당수이다.
전겸익은 강소 상숙(常熟) 사람으로 관료가 되기 전에 '문장가'로 사방에 이름을 떨친다. '당대문장백(當代文章伯)'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명나라말기 문단에서 가장 명성이 높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각지의 선비들이 전겸익의 문학분야에서의 성취에 존경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전겸익 본인이 스스로에게 기대한 것은 정치적인 지위였다.
만력38년, 33살의 전겸익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다. 그는 바라던대로 관료가 되었다. 어느 정도 대기만성의 모습이었다. 그는 만력황제의 비서인 한림원 편수로 임명된다. 전겸익이 관직에 있을 때, 명나라의 중앙정부는 이미 동림당과 선당(宣黨), 곤당(昆黨), 제당(齊黨), 절당(浙黨), 초당(楚黨)의 여러 당으로 나뉘어서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전도를 위하여 모두 부득이 어디엔가 줄을 서야 했다. 전겸익은 거의 망설임없이 동림당에 들어간다.
그건 무엇때문이었을까? 전겸익은 동림서원과 연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 상숙은 고헌성의 고향인 무석과 멀지 않다. 동림의 선봉장인 양련은 일찌기 전겸익의 고향인 상숙에서 지현을 지낸 바 있다. 관직에 나가기 전의 전겸익은 동림서원과 동림군자들과 어울렸었다. 일찌기 동림당에 가입하겠다는 뜻이 있었다. 지금 관직에 올랐으니 동림당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림당이 된 전겸익은 마침 동림당인들이 조정에서의 지위가 상승할 때였다. 그는 처음에 관료로서 물만난 고기같았다. 동림당인들은 인기도 많고, 인품도 좋고, 일처리를 사실에 근거하여 하며, 이치를 따졌다. 이같은 '문투(文鬪)'의 경쟁방식은 전겸익과 같이 순수한 문인들에게 적합했다. 그리하여 그는 금방 당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골간이 된다. 천계초년, 동림당은 '삼궁안'을 통하여 전승을 거두고, 골간 전겸익은 첨사부 소첨사 겸 시독학사가 된다. 그리고 명을 받아 <신종실록>을 쓴다. 첨사부는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여기에서 일하면 장래의 황제와 알고 지내는 것이 된다.
졸지에 준제사(準帝師)가 된 것이니, 전겸익은 관료로서 득의양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동림당이 엄당의 견제를 받아, 양련등 동지들이 옥중에서 참혹하게 죽는다. 위충현은 당연히 전겸익을 잊지 않았다. 전겸익도 <동림점장록>에 넣었고, 서열도 앞쪽이었다. '당괴(黨魁)'로 분류되었다. 그가 얻은 별명은 '천교성낭자(天巧星浪子)"이다. 수호전의 낭자 연청(燕靑)에 대항한다. 전겸익은 이렇게 하여 탄핵받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전겸익은 변한다. 자아변신의 길을 걷게 된다. 상주(常州)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십여년에 걸친 관료생이를 반성한다. 처음에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염결봉공(廉潔奉公)했는데, 왜 운명은 계속 자신을 버리는 것일까? 설마 자신이 충성을 다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온 집안에 가득한 공자, 맹자의 책에서 답안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인다. 즉, 위충현과 변절한 신하들을 보았다. 답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옛날의 동지들, 일찌기 자기와 같이 뜻을 세웠던 군자이며 정기(正氣)늠름하게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 지금 그들은 역시 고위직에 있다. 그러나 일신의 정기(正氣)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타락함으로써, 즉 위충현의 엄당에 투신하여 부끄럼도 모르고 위충현의 아들, 손자로 자처하면서. 거꾸로 자신의 동지들을 보니, 양련, 좌광두, 그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뿐 아니라 죄명도 뒤집어 썼다. 이게 가치 있는 일은 아닌 것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의인가? 권력이 바로 정의이다. 무엇이 인생인가? 적시에 즐길 수 있으면 즐기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금방 변화한다. 숭정원년 즉 1628년, 위충현 일당이 제거된다. 동림당이 다시 발전할 기회를 얻었다. 전겸익은 경성으로 돌아가서 예부시랑이 된다. 고대의 예부는 현재의 교육부, 문화부, 외교부를 합친 것과 같다. 아주 큰 부이다. 예부시랑은 예부상서의 바로 다음 가는 직위이니, 국가를 위하여 일하고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다. 다만 다시 권력중심으로 돌아온 전겸익은 단지 두 가지만 생각한다. 하나는 "내투(內鬪)", 다른 하나는 "혼변(婚變)"이다. 숭정제가 엄당을 타격하는 동시에, 조정에 많은 빈 자리를 남겨 놓았다. 국가는 진흥이 필요했고, 숭정은 현명한 신하를 뽑아서 자신을 보좌하게 해야 했다. 당시의 동림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 경력과 명망이 가장 높은 사람은 전겸익이었다. 하물며 위충현이 당연에 친히 그를 '동림당의 당괴'로 지목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황제와 조정신하들은 모두 이 '전낭자(錢浪子)'에 크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국가가 사람을 써야 할 때, 전겸익은 조정의 기강을 다시 떨치는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가관진작(加官進爵)에만 매달렸다. 그는 '수보(首輔)가 되는 꿈"을 꾼다. 다만, 그와 같이 수보가 되려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는 다시 한번 강적을 만난다. 그는 바로 그와 같이 예부에 있고, 예부상서로 있는 온체인(溫體仁)이다. 온체인은 절강 호주 사람이고, 성격이 간사했으며 사람됨이 원활한 소인배였다. 만력26년 진사가 되고, 서길사, 편수관, 예부시랑, 예부상서를 거쳤다. 그는 계속 경성에서 관직에 있었으며, 하급의 위치에서 한걸음 한걸음 올라왔다. 그리하여 결국은 명나라 1품관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다만 그의 승진은 자신의 진정한 재주와 학문에 기댄 것이 아니라, 원만한 처신으로 얻은 것이다. 온체인의 원만함은 그가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편안하게 살아왔다는 데서도 알 수가 있다. 위충현이 잘나갈 때도 그는 잘 나갔다. 위충현이 무너졌을 때도 그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잘 나갔다. 숭정제가 수보대신을 고르려 할 때, 온체인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절대로 전겸익이 올라가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나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동료들과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전겸익의 약점을 까발린다. 전겸익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일처리에서 법을 어긴 일"로 진안(陳案)을 꺼낸다. 전겸익이 천계원년 절강향시의 주고관을 맡고 있을 때, 암중으로 조작하여 본가의 시험생인 전천추(錢千秋)가 합격하도록 부정시험을 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사건은 천계2년이 처리되었고, 전천추는 변방에 충군(充軍)되고, 전겸익은 주고관으로 실직하였다는 것으로 3개월녹봉을 벌금으로 냈다. 그러나 이때 온체인은 이를 물고 늘어진다. 전겸익의 '역사오점'을 신황제에게 보고한다. 일허게 하여 전겸익에게 '개새신간(蓋世神奸)'이라는 별호를 붙인다. 숭정제는 '간신'에 매우 민감했다. 다시 형인 천계제의 길을 걷게 될까봐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아싱 '신간'을 기용할 생각이 없ㅇ진다. 결국 진겸익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쫓겨간다. 온체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각에 들어가고 수보가 된다. 숭정3년부터 숭정11년까지 온체인은 8년간 수보로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업적이 없었고, 사람을 제거하는데는 계속 새로운 방식을 썼다. 원래 재능이 별로 없던 그는 재직기간동안 주요 정력을 권모술수를 써서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쓰다보니 그에게 당한 조정관리만 수십명에 이른다. 경쟁상대방인 전겸익이 이미 고향으로 쫓겨갔지만 그는 그래도 멈추지 않고 이후에도 보복을 한다. 꺼리를 찾아내서 사람을 시켜 전겸익이 뇌물을 받았다고 고발하여, 하마터면 전겸익은 감옥에 들어갈 뻔한다. 권력쟁탈전에서 실패하고, 하나터면 감옥에 들어갈 뻔하게 된 잔겸익은 마치 크게 깨달은 것같았다. 그는 두 가지 일을 한다; 하나는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 문화명인은 점점 오락계와 갈수록 가까워진다. 그는 자주 청루로 가서 예기(藝妓)들과 어울린다. 시를 써서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풍화설월(風花雪月)하에서 그는 깜짝 놀랄 일을 벌인다. 본부인이 건재한 상황하에서 그는 "필적(匹嫡, 정실부인을 맞이하는)"의 예로 예기를 한명 취한다. 당연히 이 예기의 명성도 대단하다. 그녀는 바로 강남명기 유여시(柳如是)이다. 유여시는 본명이 양애(楊愛)이다. 송나라의 민족영웅 신기질의 <하신랑>에 나오는 문구인 "아견청산다무미(我見靑山多嫵媚), 요청산견아응여시(料靑山見我應如是)"를 읽고 스스로 호를 '여시(如是)'라 짓는다. 유여시는 명나라 말기 유명한 가기재녀(歌妓才女)이다. 그녀는 마상란(馬湘蘭), 변옥경(卞玉京), 이향군(李香君), 동소완(董小宛), 고횡파(顧橫波), 구백문(寇白門), 진원원(陳圓圓)과 함께 '진회팔염(秦淮八艶)'이라 불리웠다. 유여시는 가국정회와 정치포부가 있던 기녀자였다. 비록 청루에 있지만, 적지 않은 애국시편을 남긴다. 그렇지만, 문화대가이며 선비의 영수가 육십여세의 늙은 몸으로 스무살의 기녀를 첩으로 맞이하다니, 어쨌든 처신을 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사회에 상당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 혼례를 거창하게 치르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박을 향하여 침과 돌을 던진다. 그리하여 꽃배에는 돌이 가득해서 돌아왔다. 그래도 전겸익은 신경쓰지 않고, 흥겹게 시를 지어 득의양양한 감정을 드러낸다. 매회세상천금소(買回世上千金笑) 송진평생백세우(送盡平生百歲憂) 천금을 주고 미인의 웃음을 사오니 평생의 걱정거리를 모두 보내버렸다. 천금을 주고 웃음을 샀다. 나는 육십 환갑노인인데 이십세의 연예계의 스타와 결혼했으니 가치있는 일이다라는 식이다. 전겸익의 변화에서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일찌기 정의늠름했던 청류의 대표인 동림당인은 숭정제때 일부 중요인물들이 이미 도모안연(道貌岸然)의 위군자(僞君子)로 변신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필자의 생각으로 주로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얻어맞는게 겁났다. 누구에게 얻어맞는단 말인가? 위충현에게 얻어맞아서 겁을 먹었다. 엄당이 제거되었을 때, 동림당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강골한(强骨漢)이 아니었다. 이런 인물들은 의지가 굳지 못하고, 목숨을 아낀다. 한번 당한 후에는 더욱 겁을 먹게 된다. 예를 들어, 동지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죽는 것을 본 전겸익은 다시 권력투쟁에서 패배한다. 여러번 겁난을 당한 후에 전겸익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충신이 되어서 좋을 게 무엇이냐. 차라리 권력자 간신을 도우고 편안히 먹고 사는 게 낫다. 영화부귀를 누릴만큼 누리는 것이 낫다. 그리하여 급격히 탁류를 쫓는다. 이것이 첫번째 원인이다. 둘째는 숭정제때 동림당 자체의 문제가 확대된다. 무슴 눈제인가? 청의(淸議)이다. '공리공감의 기풍이 강해진다." 이때의 청류대신들은 대부분 공리공담, 탁상공론을 벌인다. 눈은 높고 손은 낮다. 스스로에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하다.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것을 질책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스스로 죽음으로 항쟁하는 사람은 적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전기의 청류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살신성인하는 신앙집단이었다면, 후기의 청류는 '살타인지신(殺他人之身) 성자기지인(成自己之仁)'하려는 이기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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