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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명망청흥의 60년간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31.

글: 금검상월(琴劍霜月)


명나라 만력11년 즉 1583년, 내각수보 장거정이 사망한지 한 해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내각수보가 과감하게 개혁을 하여, 대명왕조의 면모는 일신했고, 경제상황도 크게 개선도었다. 젊은 명신종 주익균은 더욱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이때는 그에게서 주색에 빠지고 정무를 게을리 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동북지구의 백산흑수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젊은 애신각라 누르하치는 명군의 오살로 부친을 잃게 되면서, 비분강개한 그는 자신의 세력과 힘이 약해서 명나라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역량을 축적하기로 결정하고, 여진각부를 통일하는 발걸음을 시작한다.


60년후, 강약이 역전되면서, 숭정제는 매산에서 자진하고, 청병이 산해관을 넘어 들어온다. 그 중간에 발생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영화드라마와 문학에서 모두 많이 묘사된 바 있다.


여러 해동안, 우리는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대부분 중원지구에 안목을 집중했다. 명, 청과 대순, 대서등 농민정권에 두었다. 왕왕 주변의 세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격정의 시기에 지구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영웅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이들은 시간의 바다에 던져진 돌쳐럼 한겹 또 한겹의 물결을 만들어 냈고,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1. 아시아


1583년의 일본에서는 '제6천마왕'이라고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혼노지(本能寺)의 변으로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손에 죽는다. 일본민족의 토지는 다시 사분오열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임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성을 바꾸기 전의 이름)가 오사카성을 건설하고, 믿기 어려운 속도로 옛 주인 오다 노부나가의 위망을 넘어선다. 수년후, 그는 칸파쿠(關白)의 신분으로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다. 그러나 그가 경영한 토요토미정권은 다시 그가 사망한 후 짧은 몇년만에 무너지고 만다.


전국시대의 최종 승리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다. 세키가하라(關原)전투이후 200년간 평화적으로 지속되는 에도시대를 그가 열게 된다.


이때의 조선왕조는 14대군주인 이연(李昖)이 재위하고 있었다. 그는 막 서른을 넘긴 왕으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 휩싸여 있었다.


운이 나쁜 것은 그가 내부의 당쟁을 미처 해결하기도 전에, 오히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의 침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대명정권의 도움으로 겨우 반도강산을 지켜낸다.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때, 다시 아민(阿敏)과 홍타이시로부터 두번이나 여진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조선은 대명이 일박서산(日薄西山)인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후 200년간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16세기 이래의 서역은 아르칸드 칸국이 출병하여 투루판, 하미를 점령하여 다시 서역을 통일한다. 다만 전성기의 아르칸드 칸국의 군주는 국내종교세력의 혼잡으이 칸국을 분열의 위기로 몰아넣을 것을 생각지 못했었다.


얼마 후, 흑산파(黑山派)와 백산파(白山派)가 각자의 신앙과 지고무상의 권력을 위하여 잔혹한 투쟁에 돌입하고, 북부 준가르와 갈단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내전으로 힘이 빠진 아르칸드 칸국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청나라와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인도의 무굴제국은 악바르대제 시대였다.


13살에 악바르가 즉위할 때, 북인도는 수르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일찌기 아시아대륙을 지배한 테무르의 후인인 이 젊은 군주는 확실히 조상으로부터 우수한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같다.


그는 혼자서 영토를 확장했고, 혼자서 과담하게 내부의 반란을 진압한다. 악바르는 강대한 군대를 건립했을 뿐아니라, 제국의 문화예술을 전성기로 끌어올린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잘 훌련시킨 아시아코끼리는 범인을 짓밟고, 팔다리를 분리시키거나 괴롭혔다고 한다. 소위 "상형(象刑)'이다. 이런 손가락직을 받을 혹형은 그의 권위와 영토가 불가침이라는 것을 상징했다.


오스만투르크에 있어서, 슐라이만대제의 사망은 전성기가 끝났다는 것을 표시했다. 우수한 조타수를 잃었지만, 이 방대한 전함은 여전히 그의 확장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투르크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이라크의 부유한 평원을 둘러싸고 반복하여 150년간 밀고 당기는 전쟁을 지속한다. 1639년, 쌍방은 휴전하기로 하고, 카스르시린에서 국경조약을 체결한다.


2. 유럽


눈길을 유럽으로 돌려보자. 중부지구의 수백개 소국이 난립하여 있었고, 바로 볼테르가 말한 신성로마제국이다.


17세기초, 신성로마제국의 경내에는 근 400개의 공국, 후국, 종교귀족영지, 자유국, 기사영지등이 있었다. 이때의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가족의 세습영토였다. 그들은 수백년의 숙원을 완성하고자 했고, 이 잘게 갈라진 토지를 통합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알프스산맥을 가로지르는 제국을 건설한다.


다만 사람들은 닭의 머리가 될 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수백개의 왕국은 비록 면적이 아주 작았지만, 적어도 그 영토내에서는 자기가 주인이었다. 제국에 들어가면 자신이 신하가 되는 것이니 자연히 원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 외에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막 마쳤고, 이들 소제후국들은 모두 신교도였다. 오스트리아는 구교의 옹호자였다. 유럽에서 종교는 하늘이다. 통일한다면 신앙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더욱 안될 말이었다.


합스부르크가족은 사정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는 싸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급히 동맹인 스페인과 폴란드, 리투아이나왕국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로마교황으로부터 정신적인 지원을 받아낸다.


신교대연맹도 약세를 보이지 않았다. 서쪽의 큰형님인 프랑스를 뒷배경으로 하고, 다시 북쪽의 스웨덴, 네덜란드를 끌어들인다.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의 내전은 전유럽의 전쟁으로 번진다.


동방대지에서, 명나라와 여진이 요동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서반구에서도 전쟁이 지속되었다. 후인들은 이 전쟁을 30년전쟁이라고 부른다.


싸우고 싸우면서 양쪽이 모두 원기를 크게 상한다. 그래도 전쟁이므로 승부는 나야 했다.


사실은 오스트리아의 패재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이어서 몇년동안 계속 분열상태를 유지한다. 해상패권에 의존하여 강대국이 되었던 스페인은 이때부터 쇠락하여 강대국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프랑스제국이 한때 웅기하여, 베르사이유궁전안의 루이14세는 이어진 기나긴 집권기간동안 프랑스의 영지를 대거 확장한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잠언을 실천한다.


여기서 언급할 만한 것은 30년전쟁의 의미는 절대로 어느 국가가 강성해지고, 어느 국가가 쇠락했다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후에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의 여러 조항에는 '국가주권' '국가영토'등의 단어가 자주 나타난다. 원래 스페인이 통치하던 방국들이 속속 독립하여 주권국가가 되고, 봉건귀족과 귀족들의 시대는 이제 끝나게 된다.


이들 신흥국가들 중에서 가장 큰 수혜를 본 나라는 네덜란드이다. 일찌기 스페인국왕 샤를 1세로부터 '왕관 위의 진주'라고 불리던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절반의 세수를 부담했었다. 자유를 얻은 후, 비지니스 두뇌가 풍부한 네덜란드인은 저렴한 조선비용과 운반비용을 이용하여 해운에서 거액의 이윤을 벌어들인다. '해상마부'라는 칭호를 세계에 떨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유럽대륙의 서쪽에 고립된 잉글랜드이 하늘에 폭풍우가 닥치기 전의 검은 구름이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30년전쟁에서 신교도측에 섰지만, 스튜어트왕조의 제임스1세와 찰스1세 부자는 여전히 멍청한 이미지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찰스1세는 로마 천주교 공주를 맞이하고 계속하여 청교도를 박해한다.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갔다. 부르조아혁명후, 찰스1세는 연회정 앞의 단두대에서 죽임을 당한다.


재미있는 것은 자칭 '인민순교자'라는 군주가 형을 받기 전에 추위에 떨지 않도록 두 벌을 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바로 누르하치가 거병한 다음 해에, 북방대륙에 웅거하고 있던 러시아의 제1대 짜르 이반4세가 돌연 사망한다. '뇌제(雷帝)'라고 불리던 그는 러시아를 통일한 후 모스크바공국을 제정러시아국으로 바꾼다. 그리고 이 추운 토지 위에 냉혹하고 잔인한 통치를 실행한다.


이반4세가 죽은 후의 100여년간, 비록 특별히 유명한 군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제정러시아의 확장은 신속하였다.


짧은 수십년간, 제정러시아는 오프강을 넘어 신속히 시베리아를 손안에 넣는다. 러시아인은 심지어 중국의 동북지방에까지 손을 뻗쳐서 야크샤 일대에서그들은 솔론인을 먹거리로 삼아서, '사람잡아먹는 나찰'로 불린다.


이때의 러시아는 비록 이미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있었지만, 서방의 영국, 프랑스등 나라의 눈에는 그저 아무런 문화도 없는 멍청한 곰에 불과했다. 러시아가 진정 문명국으로 되고 무수한 위대한 음악가와 작가의 토양을 마련하게 된 것은 피요트르1세에 의해서 완성된다.


명망청흥의 60년간 중원에서뿐아니라 세계각국에서도 한 세력이 나타나고 한 세력이 소멸하는 신구교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동방은 청제국이 주재하는 아시아시대로 접어들고, 유럽은 근대화가 시작된다. 초사회선(草蛇灰線), 복연천리(伏延千里). 서로 다른 대륙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같지만, 여러해가 지난 후에는 서로 부딛치면서 알게 된다. 이렇게 운명은 서로 얽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