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주품역사(杯酒品歷史)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개관정론(蓋棺定論)! 관두껑을 닫고나서 결론을 내린다.
그 의미는 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대한 시비공과는 그가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황제와 문무대신이 죽은 후에 조정은 그들에게 시호를 내린다. 1개의 글자로서 그의 일생을 개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호가 그냥 간단한 글자 1자는 아니다. 그 안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통상 황제의 시호와 묘호는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청나라의 강희(康熙)황제는 우리가 그를 성조인황제(聖祖仁皇帝)라고 부른다. '성조'는 묘호(廟號)이고, '인(仁)'은 시호(諡號)이다. 황제에게 묘호를 올릴 때는 불문율이 있다. 조(祖)는 공(功)이 있어야 하고, 종(宗)은 덕(德)이 있는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개국황제나 영토확장을 한 황제에게는 '조(祖)'의 묘호를 붙인다. 예를 들어,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 이 두 사람은 당, 송의 개국황제이다. 그리고 청세조(淸世祖) 순치(順治), 청성조 강희는 개국황제가 아니지만, 순치제는 산해관을 넘어 들어와 북경을 차지한 황제이고,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수복하는 등 공적이 있어 '조'의 묘호를 올린 것이다. 개국의 공로도 없고, 영토개척의 공로도 없는 황제는 '종'의 묘호를 받는다. 예를 들어 이세민(李世民)은 당태종(唐太宗), 옹정제(雍正帝)는 청세종(淸世宗)이다.
황제의 시호도 좋고 나쁜 구분이 있다. 가장 좋은 시호는 "문(文)", "무(武)"이다. 예를 들어, 한무제(漢武帝)가 있다. 그리고, 성(成), 환(桓), 소(昭), 목(穆), 경(景). 이런 것들은 좋은 의미의 시호이다. 여(勵), 유(幽), 양(煬), 충(冲), 상(殤), 민(愍), 애(哀), 도(悼)는 모두 나쁜 의미의 시호이다. 회(懷), 도(悼), 애(哀), 민(閔), 사(思), 상(殤)등은 약간 동정하는 의미가 있다. 여(勵), 유(幽), 양(煬)은 폭군, 혼군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주유왕(周幽王), 주려왕(周厲王), 수양제(隋煬帝)등은 후세가 인정한 혼군이다.
황제의 시호를 얘기했으니, 이제는 대신의 시호를 얘기해보자. 여기에서는 문신(文臣)의 시호를 중점적으로 얘기할까 한다. 문신의 시호에는 고정된 격식이 있다. 바로 "문X(文X)"로 짓는 것이다. 이 X는 대신의 일생의 공적을 최종적으로 평가하여 부여하는데, 높은 것에서 낮은 것까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정(貞, 正), 성(成), 충(忠), 헌(獻), 단(端), 정(定), 간(簡), 의(懿), 숙(肅), 의(毅), 헌(憲), 장(莊), 경(敬), 유(裕), 절(節), 의(義), 정(靖), 목(穆), 소(昭), 각(恪), 공(恭), 양(襄), 청(淸), 수(修), 강(康), 결(潔), 민(敏), 달(達), 통(通), 개(介), 안(安), 열(烈), 화(和), 희(僖), 영(榮), 민(愍), 사(思).
송나라이전에 문인의 최고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위징(魏徵)이 최초로 문정이 시호를 받았으며, 육상선(陸象先), 송경(宋璟), 장열(張說)등이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았다.
그런데, 송인종(宋仁宗)에 이르러, 송인종이 이름이 조정(趙禎)이었다. 그래서 피휘를 위하여 문정(文貞)을 문정(文正)으로 고치게 된다. 그리하여 문정(文正)이 송인종 이후 문관의 최고시호가 된다. 송나라 이후 문정의 시호를 받은 대신으로는 다음과 같다:
송(宋): 이방(李昉), 범중엄(范仲淹), 사마광(司馬光), 왕단(王旦), 왕증(王曾), 채변(蔡卞), 황중용(黃中庸), 정거중(鄭居中), 채심(蔡沈)의 9명
원(元): 오징(吳澄), 야율초재(耶律楚材), 유병충(劉秉忠), 허형(許衡), 염희헌(廉希憲)
명(明): 방효유(方孝孺), 이동양(李東陽), 사천(謝遷), 예원로(倪元璐)
청(淸): 탕빈(湯斌), 유통훈(劉統勛), 주규(朱珪), 조진용(曹振鏞), 두수전(杜受田), 증국번(曾國藩), 이홍조(李鴻藻), 손가내(孫家鼐)
이들은 모두 역사상 아주 유명한 인물들이다. 문정은 모든 문인들이 사후에 꿈에도 그리던 시호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 시호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대신들에게 시호를 내릴 때는 통상적으로 예부에서 방안을 내고, 내각에서 투표를 해서 표결한 후, 황제가 최종적으로 비준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청나라말기의 국면을 주재했던 이홍장(李鴻章)은 사후에 문정의 시호를 받지 못한다. 서태후가 이홍장에게 내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비록 최고의 시호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높은 편이다. 그리고 청말4대중흥지신이라고 불리는 장지동(張之洞)은 말년에 입각하여 보정이 된다. 그는 심혈을 기울이며 국궁진췌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지동은 전공이 없고, 게다가 섭정왕에게 밉보이는 바람에 죽은 후에 겨우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얻게 된다. 너무 낮은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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