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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봉선(封禪): 황제의 최고 영예

by 중은우시 2018. 10. 24.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국인은 하늘을 신봉했고, 오악(五嶽)은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여겨졌다. 태산에 봉선하는 것은 하늘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역사상 겨우 6명의 황제만이 태산에서 봉선을 했다.


전설에 따르면 천지를 연 반고가 죽은 후, 그의 머리와 사지는 오악(五嶽)이 된다. 오악이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 것은 <주례(周禮)>이다: "피로서 사직, 오사(五祀), 오악에 제사지낸다" <주례>는 전국시대 말기에 만들어졌고, 유가사상이 도가, 법가 ,음양가등 여러 제자의 사상과 융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오악의 사상은 상나라이래 사방신의 개념과 전국초기의 오행관념을 엮어서 형성된 산악숭배이다.


한선제(漢宣帝)때, 오악을 확정하는데: 동악 산동태산(해발1545미터), 서악 섬서화산(해발2154.9미터), 중악 하남숭산(1491.71미터), 남악 안휘천주산(해발1488.4미터), 북악 하북대무산(해발1898미터). 수나라때 남악은 호남형산으로 바뀌고, 명나라때 북악은 산서항산으로 바뀐다.


태산이 왜 오악의 으뜸으로 칭해지게 되었을까? 원인은 다음의 몇 가지이다:


첫째, 오악중 태산은 비록 높이가 세번째이지만, 화북평원에 위치하고 있고, 동으로 바다가 있고, 서로는 황하가 흐른다. 산정상과 바닥의 고도차가 1300미터나 된다. 그리하여, 시각적으로 아주 크고 높아 보인다. 그래서 고인들은 태산이 가장 높다고 여겼다.


둘째, 전설에 따르면 신인 반고의 머리가 동악이 되었다고 한다. 왼쪽팔이 남악이 되고, 오른쪽팔이 북악이 되고, 몸이 중악이 되었으며, 발이 서악이 되었다고 한다. 반고의 머리인 태산은 당연히 오악중 으뜸이 되어 야 한다. 동방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고, 고인들은 동방을 생명의 원천으로 알았다. 동쪽에 위치한 태산은 '만물이 잉태되는 장소'인 '길상의 산', 신령의 집'이 된다.


셋째, 공자는 태산을 숭상했다. 등태산이소천하.


넷째, 봉선이론은 전국시대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제로의 유학자들은 오악중 태산을 가장 높다고 여겼고, 제왕은 당연히 태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여겼다.


다섯째, 사마천은 유가사상을 신봉하여, 태산을 숭상했다. <사기.봉선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고이래로 하늘의 명을 받은 제왕이라면 왜 봉선을 하지 않는가.


진시황과 한무제는 일찌기 태산에 봉선한 바 있다. 사마천은 그리하여 <사기.봉선서>에 "매세지륭(每世之隆), 즉봉선답언(則封禪答焉), 급쇠이식(及衰而息)"이라고 적는다. 이 기록후 제왕이 봉선하기 위한 기본조건이 정해진다:


첫째, 개조환대(改朝換代)후 국가의 강역이 통일되어야 한다.

둘째, 제왕의 재위기간동안 정적이 현저하고, 국태민안, 국부민강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태평성대로 상서(祥瑞)가 나타나야 한다.


고대의 황제는 아주 많았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할거정권의 황제는 봉선의 자격이 없다. 정치업적이 탁월하고, 국태민안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도 많은 황제들의 발목을 잡는다. 상서가 출현하는 것은 더구나 가우불가득(可遇不可得)이다.


비록 제왕은 모두 봉선을 제왕의 가장 큰 영예로 알았지만, '태산봉선'을 한 황제는 극히 적었다. 상나라이래로 진정 태산에서 봉선대전을 거행한 황제는 모두 여섯 명이다: 진시황(진시황제) 조정, 한무제(한세종효무황제) 유철, 광무제(한세조광무황제) 유수, 당고종(당고종효황제) 이치, 당현종(당현종명황제) 이융기와 송진종(송진종원효황제) 조항. 그 외에 무주정권의 무측천은 하남 숭산에서 봉선대전을 거행한 바 있다.


송진종때, 요나라의 소태후와 요성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국경을 넘어 왔다. 송진종은 재상 구준의 권유로 전주(澶州)로 나가서 독전한다. 나중에 쌍방은 "전연지맹"을 맺고, 송나라가 매년 요나라에 세폐 은10만냥, 견20만필을 바쳤다. 송과 요는 백구하(白溝河)를 경계로 삼았다. 전연지맹은 북방의 요나라에 대한 근심을 없앳고, 양국은 통상왕래를 지속했다.


송진종은 공로가 현저하다고 생각하여, 4년후 태산에 봉선한다. 봉선때는 '천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일막도 연출한다. 송진종의 각종 봉선제사활동은 이전에 축적한 것을 모두 써버리고, 말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만들었다. <송서.진종기>에는 천서봉사(天書封祀)에 대하여 "일국군신여병광(一國君臣如病狂)"이라고 평했다. 송진종의 태산봉선은 그저 사람들이 비웃는 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명나라때부터, 주원장은 태산의 봉호를 취소한다. 그 후, 명청 양왕조는 원래의 봉선을 제사로 바꾸고, 북경의 천단, 지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낸다. 제왕은 더 이상 산으로 가서 봉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