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가 멸망한 후, 문신무장들이 대부분 청나라에 투항하고, 왜 남명이나 대순으로 귀순하지 않았을까?

중은우시 2019. 1. 12. 21:51

글: 야독사서(夜讀史書)


1644년은 중국역사상 아주 특수한 해이다. 바로 이 해에, 276년간이나 존속해오던 대명왕조가 종말을 맞는다. 이와 동시에, 중국에는 다시 3개의 주요 세력이 나타나서 중원을 축록(逐鹿)하는 상황이 된다. 이 세 세력은 각각 대청(大淸)정권, 대순(大順)정권 그리고 남명(南明)정권이다.


대청정권은 나중의 청나라이다. 이건 아마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일 것이다. 대순정권은 농민반란군 지도자인 이자성(李自成)이 창건한 정권이다. 비록 처음에 사람들은 모두 이자성과 그의 군대를 "틈적(闖賊)", "유적(流賊)"이라고 불렀지만, 1644년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보편적으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자성을 미래 신왕조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이점은 당시 많은 관리들이 대순정권에 귀순한데서도 알 수 있다. 남명정권은 숭정제가 죽은 후, 명나라종실과 유신들이 유도(留都) 남경에 설립한 정권이다. 홍광제(弘光帝) 주유송은 만력제의 손자이고, 숭정제의 당형이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의 눈에, 남명은 가장 정통성이 있는 정권이었다.





이전의 역사경험으로 보면, 이런 군웅할거의 국면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겨우 1년만에, 청군이 파죽지세로 순조롭게 대순정권과 남명정권을 소멸시키고, 중국을 통일한다. 청군이 입관한 후, 이끈 병력은 겨우 10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속히 진행되었을까? 그 원인을 따져보면 팔기군이 천하무적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원래 명나라의 문신, 무장들이 속속 자신이 이끄는 병력을 데리고 청나라에 투항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실력이 크게 강해진다. 청군이 남정북전하는 과정에서, 병력은 오히려 갈수록 많아진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왜 이들 명나라의 문신,무장들은 남명에 귀순하지 않고, 대순에 귀순하지도 않고, 굳이 청나라에 투항하였을까?


개인 감정으로 보면, 이들 문신, 무장들은 남명정권에 대한 감정이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대대로 황은을 입어왔기 때문이다. 한걸음 양보하여 말한다고 하더라도,이자성의 대순정권도 받아들일 수 있다. 왜먀하면 왕조교체는 중국역사에서 드문 일도 아니고, 개인이나 가족의 이익을 고려하면, 대명왕조의 주씨를 위해서 일하나, 대순정권의 이씨를 위하여 일하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청정권에 투항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명나라사람들은 모두 만주족을 '건로(建虜)", "달자(韃子)"라고 불렀고, 그들의 마음 속에 만청은 그저 무력만 잘 쓰고 예의는 모르는 오랑캐로 구성된 원시정권이기 때문이다. 만청에 투항하는 것은 '달자(오랑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니, 얼마나 굴욕적인가. 당시 명나라사람들에 있어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많은 문신, 무장들이 만청에 투항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원래 1644년초, 이자성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함락시켰을 때, 관료와 사대부들은 왕조가 교체되는 것을 보고 속속 이자성의 대순정권으로 갈아탄다. 명나라말기의 사학가인 담천(談遷)은 그의 저작 <국각(國榷)>에서 여덟글자로 당시의 정경을 형용했다: "의관개주(衣冠介胄), 반항여운(叛降如雲)"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킨후 군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들 관료와 사대부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내서 군비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정한 돈을 내지 않으면 매질을 하여 맞아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관료와 사대부는 절개를 버리고 이자성의 진영으로 갈아탄 것은 원래 개인과 가족의 이익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그 결과 돈을 강제로 뜯기고, 명성도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심지어 생명과 일신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했다. 북경에 있던 명나라관리중 한 명은 절망하여 이렇게 소리친다: "이게 어찌 새로 일어난 왕조의 신정권이란 말인가. 여전히 떠도는 도적수준일 뿐이다."


이런 사태를 거치면서, 이자성의 대순정권과 원래의 명나라 관료 사대부계층은 세불양립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남방으로 도망칠 방법만 찾았다. 그러나, 남방으로 도망친 관리와 사대부들이 남경에 도착하자, 이들을 기다린 것은 남명정권의 열렬한 환영이 아니라, 권신 마사영, 완대성등이 '순안(順案)'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순에 귀순하여 변절한 적이 있는 명나라 관료와 사대부에 대하여, 마사영, 완대성은 '순안'을 이용하여 미친 듯이 정적들을 박해했다.


청군은 산해관에서 이자성을 격패한 후 북경으로 들어갔다. 섭정왕 도르곤은 한족대신 홍승주, 범문정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원래의 명나라 관리와 사대부들을 적극적으로 회유하는 책략을 쓴다. "북경 내각, 육부, 도찰원등 아문의 관리는 모두 원래의 관직을 가지고 만주관료와 함께 일을 보라" 얼마후 다시 선포한다: "무릇 문무관리와 군민등은 원래 유적에 속했건, 혹은 유적에 핍박당해 투항한 적이 있든, 만일 우리정권에 투항하기만 하면 여전히 그대로 기용한다." 청나라조정이 이런 회유전략은 당시 갈길없던 상황에 놓인 명나라의 관료와 사대부들에게 절처봉생(絶處逢生)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속속 청나라조정에 투항한 것이다. 이들 투항한 관리들은 대부분 아주 좋은 대우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관직이 이전보다 높아진다. 그들의 시범효과로, 더 많은 한족관료와 사대부들이 청나라조정에 투항한다. 청나라는 입관초기 이른 은위병시(恩威幷施)의 책략으로 중국의 대강남북을 석권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