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풍(蔣豊)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제43권 <유근용사>를 보면 두 단어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하나는 "교조"이고 다른 하나는 "교지"이다. 어느 정도로 빈번하게 나타나는가? 매 페이지마다 이런 단어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인기검색어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조"도 좋고, "교지"도 좋다. 통상적으로는 "가짜 성지(聖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관건은 황제의 곁에 있는 환관이 어찌 이렇게 높은 빈도로 "가짜 성지"를 내릴 수 있었단 말인가?
명나라초기, 태조 주원장은 역사의 교훈을 받아들여, 환관제도를 정교하게 설계한다. 그중 하나는 환관이 책을 읽고 글을 쓸 줄 아는 것을 금한 것이다. 다만, 명나라 중기이후, 이 금칙은 유명무실해진다. 유근과 같은 환관은 책을 읽고 글을 쓸 줄 알 뿐아니라, "고금을 통한다"고 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말이 유행하다. "깡패가 학문이 있으면 겁난다"는 것이다. 수백년전의 유근은 자신의 행동으로 이 말을 입증했다. 그는 용기와 담량이 있어 '자궁(自宮)' 즉 생식기를 자를 정도였을 뿐아니라, 진정한 깡패에 속했다. 그리고 '감추고 포장하는데' 능했다. 그리고 '황제의 뜻에 잘 영합했다' 그는 명무종이 놀기 좋아하는 것을 알고, 명무종을 따라 '혹은 격구를 하며 말을 타고, 혹은 매를 풀어 토끼를 쫓으며, 혹은 배우들과 어울려 연극을 하고, 혹은 만승지존(황제)를 이끌어 사람들과 거래를 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명무종이 기분좋아하게 만들었다.
만일 이것들 뿐이라면, 유근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일꾼이라고 칭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교활한 유근이 자주 명무종이 한장 재미있게 놀고 있을 때, 대신들의 상소문을 가져다 주어서, 황제에게 보고 비준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무종은 귀찮을 뿐아니라, 화까지 낸다. 그러면서 묻는다: "짐이 왜 너를 쓰는지 아는가? 너는 왜 항상 이렇게 짐을 귀찮게 하느냐?" 그후로 유근은 명무종을 대신하여 상소문을 검토하고 비준했다. 사서에 쓴 말에 따려믄 "황제는 천하의 상소문을 모조리 유근에게 맡겼다."
황제의 곁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명무종이 "하루라도 유근을 보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에 이르게 되자, 누가 감히 유근의 말이나 그가 쓴 "교조" 혹은 "교지"를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명무종이 친히 유근에게 상소문을 검토하고 비준할 권한을 준 것이므로, 그가 하고싶은대로 하게 허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근이 "교조", "교지"했다는 말은 그에게 억울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유근은 상소문을 검토 비준할 권한을 받은 히후, 처음에는 함부로 장난치지 못했었다. 당초 그는 내각관리들에게 성지를 초안하게 했다. 다만 이들 아부꾼들은 모두 온갖 방법으로 유근의 뜻을 파악하여 초고를 만들었다. 어떤 관리는 자신이 유근의 뜻을 잘못 헤아렸을까 우려하며, 아예 사람을 유근이 일하는 곳으로 보내거나, 혹은 집으로 가서 뜻을 물어본 다음에 초안했다. 시간이 흐르자, 유근은 '사택의행(私宅擬行)"하게 된다. 환관이 자신의 집에서 황제의 명의로 조서를 만들 수 있다니, 그의 흥분되고 기쁜 심정은 어떻게 형용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근이 감히 '교조' '교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정계의 생태에서 유래한다.
당연히, 모든 관리가 유근의 뜻대로 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반항하는 관리에 대하여는 유근이 각종 수단으로 그 관리를 못살게 굴어서,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 그중에 가장 자주 쓰던 방법은 바로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다
정덕원년(1506년) 십이월, 유근은 한꺼번에 20명의 관리에게 "정장(廷杖)"을 가한 바 있다. 즉 조정에서 엉덩이를 때린 것이다. 그후에 '관직에서 제명하여 일반백성으로 격하시킨다' 이 소식을 들은 왕양명(왕수인)은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어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근을 건드려 '교조장오십(矯詔杖五十)"을 당한다. 그후에 귀주 용장역참으로 좌천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외에 유근은 공과급사 도해(陶諧)도 '정장'을 때린다. 흠천감 오관후 양원(楊源)도 "장삼십, 숙주유배"를 시킨다. 어사 도정(塗禎)도 '장을 때리고 숙주위로 보낸다" 금사중 반희증(潘希曾), 유자려(劉子勵)는 "장삼십에 백성으로 격하시킨다"
이렇게 곤장을 때리는 것은 유근이 개인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무기였다. 당당한 대신이 사람들 앞에서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를 때린 후, 다시 조정에서 계속 일하게 하는 것은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다만 신료들이 확실히 이로 인하여 굴복하게 된다. 사서를 보면, 엉덩이른 내놓고 곤장을 맞은 신료들은 그후에 누구도 감히 다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런 굴복은 바로 유근이 감히 '교조' 혹은 '교지'를 만들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유근이 감히 명나라 정덕연간에 계속하여 감히 '교조', '교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명무종이 방종한 책임도 있지만, 신료들이 굴복한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정치생태적인 원인뿐 아니라, 구조설계의 책임도 있다.
역사는 그저 유근이 감히 '교조' 혹은 '교지'를 만들었다는 것만 크게 기록할 뿐, 그 배후의 심층적인 원인은 간과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침중한 교훈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저 술자리 혹은 식사자리의 한담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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