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대운하(大運河)의 최북단(最北端)은 어디인가?

중은우시 2018. 10. 12. 16:45

글: 종춘계(宗春啓)


최근 들어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둘러싼 문화활동이 여전히 활발하다. 8월에서 10월까지, 북경, 천진,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의 대운하연선의 8개성시의 망신판(網信辦)은 공동으로 대운하문화영행을 주제로 한 활동을 개최했다; 9월10일부터 15일까지, 북경시 문련은 예술가를 모아서 대운하를 주제로 하는 문화이벤트를 벌였다.


북경성을 걸어다니면, 대운하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국경절연휴에 어떤 사람들은 공원을 찾아서 산책한다. 그러려면 통주대운하삼림공원이 좋은 선택지이다. 수나라 대운하는 북으로 통주까지 연결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느 ㄴ역사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알고 있는가? 원나라 대운하는 어디까지 만들어졌었는지? 명,청시기의 대운하의 최북단은 또 북경의 어디인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수나라 대운하의 최북단은 오늘의 북경지역이다. 사료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는 584년 광통거(廣通渠)를 파기 시작한다. 위수(渭水)를 신도읍 대흥성(大興城)에서 동관(潼關)까지 끌어서 길이가 300여리에 달하며 조운이 통하게 한다. 605년, 통제거(通濟渠)를 판다. 610년 강남하(江南河)를 판다. 608년, 하북의 여러 군에서 백성 백여만명을 동원하여 영제거(永濟渠)를 판다. 심수(沁水)를 남으로 황하까지 끌어온다. 그리고 다시 위하(衛河)와 연결시켜 북으로 탁군(涿郡)에 이른다. 611년, 수양제(隋煬帝)는 용주(龍舟)를 타고 강도(江都, 지금의 揚州)에서 탁군까지 바로 온다. 이는 경항대운하의 개통을 의미한다. 수나라때 탁군은 바로 동한(東漢)때의 유주(幽州)이고 치소(治所)는 계현(薊縣)이다. 지금의 북경성 서남쪽이며, 관할지역은 지금의 북경시 통주, 창평 서남쪽, 하북 패현 및 천진시이북이다. 그리고 탁현, 탁록의 동쪽지구도 있다. 그렇다면, 수나라 대운하의 최북단은 구체적으로 지금 북경지역의 어느 곳일까? 필자의 견해로는 지금의 구하(九河) 하류의 통주지구이다. 왜냐하면 운하는 조하(潮河), 백하(白河), 노구(盧溝)등 여러 강물이 모여서 수원이 수량을 확충할 수 있는 곳에 건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나라에 이르러, 대운하의 준설과 개착(開鑿)으로 북단은 다시 당시의 적수담(積水潭)까지 연장된다. 즉 지금의 십찰해(什刹海)이다. 지원(至元)연간에 원세조는 새로운 하도를 파도록 명령하고, 수,당시대의 원래 하도의 기초 위에서, 지금의 산동성 임청, 제녕간에 제주하(濟州河), 회통하(會通河)를 판다. 지원29년(1292년), 곽수경(郭守敬)이 주재하여 대도성(大都城)에서 통주에 이르는 통혜하(通惠河)를 굴착한다. 그리하여 원대도에서 항주까지 직접 연결되는 남북대운하가 완성된다. 이것은 바로 대운하가 북으로 적수담까지 연장되었고, 통혜하와 적수담이 만나는 곳은 만녕교(萬寧橋)(지금의 지안문대가의 후문교) 아래의 징청갑(澄淸閘)이 있다. 징청갑은 최초에 '해자갑(海子閘)'으로 불리웠다. 원나라때 100여년간 이곳은 계속 수륙교통의 허브였다. 조운선이 도성으로 들어오는 인후요도였다. 만녕교 징청갑에서 옹산박(瓮山泊, 지금의 昆明湖)까지를 원나라때는 고량하(高粱河)라고 불렀다. 옹산박에서 창평까지의 백부(白浮)는 원나라때 옹산백부언(瓮山白浮堰)이라고 불렀다.


자료기재에 따르면, 중국과학원이 GPS기술로 측정한 경항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1,710킬로미터이다. 이들이 측량할 때의 북단은 온유하(溫楡河)와 통혜하(通惠河)가 만나는 지점을 북단의 기점으로 삼았고, 남단은 항주의 공신교(拱宸橋)였다. 확실히 통주에서 적수담까지의 통혜하는 계산에 넣지 않았다.


통혜하의 기점에 대하여는 역대이래로 몇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원사.곽수경전>에 따르면, 해운으로 통주까지 온 양식을 다시 대도성까지 운송하기 위하여, 쿠빌라이는 곽수경의 건의를 받아들여, 옛날의 운량하(運糧河)의 기초 위에, "별도로 북산 백부천(白浮泉)의 물을 끌어들여, 서쪽에서 꺽어서 남으로 흐르게 하여 옹산박을 거쳤으며, 서수문(西水門)으로 대도성에 들어왔다. 적수담에서 모이고, 다시 동으로 가다가 꺽어서 남으로 가서 구 운량하와 합쳐졌다." 이 기록을 보면, 통혜하의 기점은 3가지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백부천설, 옹산박설, 적수담설. 그중 창평 백부천으로 보면 거리가 가장 길고, 적수담으로 하면 거리가 가장 짧다. 해정 옹산박설은 유역이 가장 크다. 세 가지 주장은 각자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고, 사료의 증빙을 내놓을 수 있다. 다만 필자는 고증을 해본 결과 적수담설이 가장 정확하다고 본다.


적수담은 원나라때 '해자"라고 불렀다. 이 일대는 원래 영정하(永定河)의 옛물길이었다. 나중에 고량하가 지나갔다. 금나라때 이 일대의 하도를 파서 호수로 만든다(즉 적수담), 그리고 파낸 흙으로 산을 쌓는다(즉, 瓊華島). 곽수경의 최초계획에 따르면, 옥천산의 샘물을 끌어서 적수담으로 들어오게 하고, 다시 적수담의 물을 빼서 동남쪽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 금때의 구 운량하와 만나게 한다. 이렇게 하면 해운으로 통주에 온 양식을 대도성까지 운반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매년 "수레를 빌리는 비용 돈 6만민(緡)"을 절약할 수 있었다.


다만 나중에 곽수경을 발견한다. 옥천산 일대의 샘물수량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창평의 백부천, 신산천(神山泉)등 수원(水源)을 찾아낸다. 곽수경의 위대함은, 그가 창평의 샘물을 서쪽으로 끌고 다시 남쪽으로 끌어서 옹산박으로 들어오게 하고, 다시 적수담까지 끌어오는 노선을 찾아내고, 다시 선갑(船閘)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대도에서 통주까지 낙차가 커서 물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지원30년(1293년), 곽수경의 인수(引水)공사가 완공된다. 통주의 운량선이 직접 적수담까지 들어온다. 그해 가을, 쿠빌라이는 상도(上都)에서 대도로 돌아와서, "적수담을 지나면서, 선박이 호수를 뒤덮은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름을 통혜하라고 지었다." 이를 보면, 적수담이야말로 통혜하의 기점이다. 그러나, 원나라사람들은 비교적 신중했다. '해자(海子)'인 적수담을 '하(河)'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통혜하의 기점을 원나라사람들은 '해자'와 '하'의 연결점인 만녕교로 삼았다. 원나라사람이 쓴 <석진지. 하갑교량>에서는 '고량하'조에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고량하가 "해자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래에 만녕갑이 있어, 통혜하와 만나서 흐른다." 이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만녕교(만녕갑)이 바로 통혜하의 기점이라는 것을.


명나라때, 북경성의 개조로, 조운선은 이미 적수담까지 운행해 들어올 수가 없었다. 통혜하의 북부종점은 이미 북경성의 동남쪽 대통교(大通橋)로 변경되었다. <명사.하거지>에 따르면, "명성조는 북경을 만들고, 조운을 동남으로 바꾸었다. 수륙을 겸하는 것은 원나라때 사람들과 같았다. 회통하를 열어서 해상과 육상을 같이 썼다. 남쪽의 끝은 강구(江口)이고, 북쪽 끝은 대통교이다. 운행길이 3천여리가 된다." 그렇다면 왜 대통교라고 불렀을까? 명나라때 통혜하를 대통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명사.하거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통하라는 것은 원나라때 곽수경이 판 것이다. 대통교의 알에서 통주 고려장에 이르러 백하와 합쳐지고, 직고(直沽)에 이르고, 위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간다. 길이 160리여가 된다. 십리에 갑(閘)을 하나씩 두고, 물을 채워서 운송하니, 이름을 '통혜'라 했다."


그렇다면, 대통교는 바로 명나라 대운하의 최북단일까? 그렇지는 않다. 실제로, 명나라는 대운하의 재건을 갈수록 중시한다. 하도도 계속하여 북으로 연장시킨다. 명나라중엽이전에, 중원지구는 계속하여 북방의 위협을 받았다. 먼저 오이라트, 나주에는 엄답(俺答)이 침입하여 부득이 많은 병력을 주둔시켜서 북부방어선을 강화해야 했다. 병력이 많으면, 양식수요량도 많아진다. 양식생산지역은 주로 강남이다. 그리고 조운은 당시 효율이 가장 뛰어나고, 비용이 가장 싼 운송방식이었다. 그래서 운하를 파고 준설하는 공사는 명나리때 거의 중단된 적이 없었다.


융경연간, 명나라는 경항대운하의 북단을 오늘의 창평구 사하(沙河)까지 연장시킨다. 가정29년(1550년) "엄답이 대거 침입하여, 창평주 성동문을 범한다." 조정은 창평진에 대장(大將)을 설치한다. "융경6년(1572), 총독 유응절, 순무 양조는 공화성 바깥의 안제교에서 통조도구까지, 물길을 팔 것을 논의한다. 길이는 145리에 이르고, 군수물자를 운송하며, 군졸 3천명이 공사를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물길은 바로 창평하(昌平河)를 가리킨다. 공화성의 남쪽 안제교의 아래에 있는 강의 옛 명칭은 "현여하(濕餘河, 나중에 온유하로 와전된다)"인데, 서산(西山) 오어구(鰲魚溝)에서 발원한다. 공화성 동족을 지나 북사하(北沙河)와 만나고, 통주로 흘러가서 노하(潞河)에 합쳐진다. 준설한 이후에, 공화성 아래에서 통주까지의 물길을 '창평하'라고 부르게 된다. <명사.하거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평하, 관군의 양식물자를 운송하는 물길이다. 공화성 밖의 안제교에서 시작하여 통주 도구(渡口)에 이르고, 백사십오리이다. 그중 진흙이 쌓이는 십십리가 다니기 어렵다. 융경6년에 대준설을 하여, 장릉등 8개 위의 관군의 월식량 4만석을 운송하는데 순조롭게 유통하게 된다."


매월 4만석의 양식이 창평하를 거쳐 공화성 아래에까지 운송된다. 사용율이 높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융경연간의 운송량이다. 당시 창평 천수산에는 막 8명의 황제를 매장했다. <광서창평주지>의 기재에 따르면, "만력원년, 통주에서 수운으로 양식을 전정창(奠靖倉)까지 옮기고 다시 거용(巨庸)등 창고로 옮겨서 군수에 사용했다." 전전창은 공화성 안에 위치한다. 

창평하가 준설된 후, 공화성은 수향풍광(水鄕風光)이 펼쳐진다. 안제춘류(安濟春流). 안제교는 명나라 정통 연간에 남사하에 세워진 칠공석교(七孔石橋)이다. 명나라때의 사람인 최학리(崔學履)는 <연평팔경>(연평은 창평의 옛이름이다)이라는 시에서 창평의 아름다운 풍경을 찬미했다. 그중 안제풍류를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사하남거금범조(沙河南去錦帆稠)

춘수편의고객주(春水偏宜估客舟)

공지영원통로수(共指靈源通潞水)

희간유맥즉창주(喜看幽脈卽滄州)

진다사저면구조(盡多沙渚眠鷗鳥)

욕방성사범두우(欲傍星槎犯斗宇)

기보명구다승절(畿輔名區多勝絶)

초운상월공유유(楚雲湘月共悠悠)


'연평팔경'의 나머지 7경은 각각 다음과 같다: 송개장청(松蓋長靑), 천볼발췌(天峰拔萃), 석동선종(石洞仙踪), 은산철벽(銀山鐵壁), 호욕휘금(虎峪輝金), 용천분옥(龍泉噴玉), 거용제설(巨庸霽雪).


그러나, 통주까지 72.5킬로미터길이의 사하가 명나라운하의 최북단은 아니었다. 명나라 가정34년(1555), 북부변방수비군의 양식수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백장조(引白壯潮, 백수의 물을 끌어들여 조수의 수량을 늘인다)"공사를 시행한다. 운하의 최북단을 밀운(密雲) 현성(縣城)까지 연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밀운이야말로 명나라운하의 최북단이 되도록 한다.


"인백장조"공사는 양가장에서 백하의 신구(新口)와 신 하도(河道)를 파서, 백사의 물이 마두산의 서남으로 흘러 밀운현성을 거쳐 하조(河漕)와 조하와 만나게 한 것이다. 목적은 수량을 늘여서 조운이 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염무의 <창평산수기>에 따르면, "가정 말기, 총독시랑 유수는 밀운의 병력의 십오만석 양식을 통주에서 육상운송으로 우란산까지 운송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이 강(즉, 백하)을 파서 통주에이르도록 하여 작은 배로 직접 밀운까지 운송하게 했더니 비용이 열에 일곱이 줄어들었다." "그 후에 강물이 더욱 많아져서, 동지(同知) 위중감이 말에 따라, 통주에서 직접 밀운까지 운송했다." 백하의 원류는 하북성 고원현(沽源縣)이다. 연도에 납흑하(納黑河), 탕하(湯河)등이 있고, 지금은 동남쪽으로 밀운댐으로 흘러들어간다. 조하의 원류는 하북성 풍녕현(豊寧縣) 조전구 남산이고, 지금은 남쪽으로 흘러서 밀운댐으로 들어간다. 댐을 나온 후에는 두 강이 밀운현의 하조촌에서 만나서 '조백하(潮白河)"라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