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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남송 중후기의 3대권신

by 중은우시 2019. 1. 22.

글: 송지견(宋志堅)


한탁주(韓侂胄), 사미원(史彌遠), 가사도(賈似道)는 남송 중후기의 3대권신(權臣)이다. 그들 간에는 여러가지 다른 점이 있다. 예를 들어, 한탁주는 주전항금(主戰抗金)파이다. 악비의 억울한 사건을 바로잡고, 진회에게서 왕작을 빼앗고 시호를 고쳐버린 것도 그이다; 사미원은 주화외금(主和畏金)파이다. 금나라를 두려워해서, '함수비금(函首畀金)'등 무리한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가사도가 상대해야한 것은 몽골의 원이었다. 그의 대책은 역전역화(亦戰亦和), 사전사화(似戰似和), 명전암화(明戰暗和)였다. 결국 13만 정예병을 죽게 만들고 남송을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탁주는 '위학역당(僞學逆黨)'사건을 일으켜, 주자(朱子)의 이학(理學)을 금구(禁區)로 만든다. 사미원은 '역당'사건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송이종(宋理宗)과 함께 주자학을 주류로 받든다. 동시에 '신회자(新會子)'를 남발하여 물가를 상승시키고, 백성들이 살기 힘들게 만든다; 가사도는 군사상황을 거짓보고하여 직무를 소홀히 하고 충직한 인사들을 배척하며, 자신의 문객들로 하여금 조정을 다스리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서호에서 놀고 즐겼다. '조중무재상(朝中無宰相), 호상유평장(湖上有平章)"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이들 삼대권신의 공통점은 당연히 아주 분명하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권신의 '권력'이다. 그들은 모두 조야를 흔들었고, 겨룰 사람이 없었다. 한탁주는 경원(慶元)원년부터 '위학역당'사건을 일으켜 개희(開禧)3년까지 '14년간 권력을 독점하며, 재집(宰執), 시종(侍從), 대간(臺諫), 번곤(藩閫)이 모두 그의 문인들이었다."; 사미원은 옥률원(玉律園)에서 한탁주를 주살하고, 송영종때 혼자서 재상으로 17년간 있었다. 그후에 조서를 위조하여 송이종을 황제에 앉히고 다시 혼자서 재상으로 9년간 있었다. 모두 합쳐서 26년간 구너력을 독점하고 내외를 뒤흔들었다. 가사도는 송이종 경정2년 오잠(吳潛)을 밀어낸 후 권력을 장악한다. 남송후기의 이 삼대권신을 보면 권력독점이 갈수록 심해졌고, 언로가 단절되고, 권력을 마음대로 자행했다. 송공종 덕우원년까지 16년에 달한다.


현재 어떤 논자는 송나라때 '중국식 분권과 견제균형'의 정치체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먼저 군권과 상권이 분리되고, 다음으로 정부(재상)과 대간이 분리된다. 앞의 분권은 황권을 제약하는 것으로 황제의 권력농단을 막는 것이고, 뒤의 분권은 권신을 제약하는 것으로, 재상의 권력남용을 막는 것이다. 확실히 권력은 반드시 제약을 받아야 한다. 황제는 '순지자창(順之者昌), 역지자망(逆之者亡)' 즉 따르는 자는 번성하게 해주고, 거스르는 자는 죽일 수 있다. 권신도 마찬가지로 '순지자창, 역지자망'하게 할 수가 있다. 황제는 '언출법수(言出法隨) 상륙유심(賞戮由心)' 즉 말하는 것이 바로 법이고, 상을 내리든 죽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권신도 마찬가지로, '언출법수, 상륙유심'할 수 있다. 다만 남송 중후기의 3대권신을 보면, 송나라에서 건립한 '정치체제'는 제왕의 권력과 재상의 권력을 제약하기 아주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대간'이 재상의 권력남용을 막는 작용을 보도록 하자. 한탁주가 대권을 독점했을 때, 대간은 '모두 그의 문생들이었다' 혹은 그의 '문하'가 되고자 기를 쓰던 자들이었다. 유덕수(劉德秀), 하담(何澹), 호굉(胡紘), 정송(程松) 등등. 혹은 '위당역학'을 공격함으로써 그의 문하로의 투신서를 삼기도 하고, 혹은 뇌물(여자)을 제공하여 성공적으로 그의 문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들이 모두 '대간'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재상의 권력을 제약하겠는가. 사미원이 대권을 독점하고 있을 때, 아부를 잘 하는 자들이 대간으로 있었고, 일시에 군자들은 모조리 쫓겨났다. 양성대(梁成大)는 사람들이 양성견(梁成犬)으로 불렀는데, 진덕수(眞德秀)를 쫓아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여 어사대부가 된다. 그리고 과감하게 그 일을 완성한다. 간의대부 주단상(朱端常)은 사미원을 도와 위료옹(魏了翁)을 쫓아낸다. 이런 '대간'들은 원래 사미원의 '응견(鷹犬)'이었다. 사미원이 그들에게 누구를 물으라고 하면 바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미원과 같은 권신을 제약할 수 있겠는가? 송나라가 '중국식 분권과 견제균형'을건립해싸고 칭송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재상에게 과실이 있으면, 대간이 '소문만 듣고도' 탄핵할 수 있다. 재상이 일단 탄핵을 받으면, 직권이 잠정적으로 정지되고, 집에서 '대죄(待罪)'하며,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다만 이 3명의 권신들이 득세할 때, 누가 감히 대간의 탄핵으로 '직권을 잠정적으로 정지시키고, 집에서 대죄하며 결정을 기다리라고 한단 말인가?


당연히 권신이 권신인 것은 황권과 관련이 있다. 남송 중후기의 3대권신을 살펴보면, 권신의 권리와 제왕의 권리의 내재적인 연계를 알아볼 수 있다.


남송중후기의 3대권신은 모두 황실후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탁주는 황실후궁과의 관계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태황태후의 외조카이다. 그리고 태황태후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또한 황후(즉 韓后)의 작은아버지(季父)이다. 그는 이 두 가지 관계를 가지고 송영종이 의지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조정을 혼자서 장악한다. 태황태후와 한후가 연이어 사망하며 그의 최후도 가까워 온다. 사미원은 황실외척이 아니지만, 외척 양차산(楊次山)과 양후(楊后)를 통하여 이익공동체를 맺는다. 먼저 양후와 밀모하여 한탁주를 옥률원에서 주살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왕(濟王)을 폐하고 송이종을 세운다. 여기에 양후의 묵인을 얻는다. 가사도는 '국정은 독점'한 후, 먼저 환관의 정치간여와 외척의 권력농단을 금지한다. 그러나 그가 이전에 승진한 것도 '외척'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사급제했을 때, 그의 누나는 송이종의 귀비였다. 그가 태상승, 군기감에 오를 수있었던 것은 모두 그 덕분이었다. 가귀비는 후궁에서 총애를 16년간이나 독점했다. '송이종은 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서호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으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건 분명히 가사도이다.' 다음 날 물어보면 과연 그러했다. 그래서 경조윤 사암지(史巖之)에게 조심하도록 말하라고 했다. 사암지는 이렇게 말한다; '가사도는 비록 나이가 젊어서 나쁜 버릇이 있기는 하지만, 재목은 크게 쓰일만 합니다' 그래서 풍주지주로 내보낸다." 이것은 가사도가 젊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풍주지주로 간 것은 승진한 것이었다. 경조윤 사암지가 송이종이 '조심하라고 말하라'는 뜻을 눈치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한 말은 확실히 가귀비에게 잘보이려는 뜻이 있다. 황궁내실의 권력은 황권의 파생품이다. 기실 바로 황권이다. 그들이 이런 채널을 이용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황권이 제약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분권'이고 무슨 '견제균형'이란 말인가?


남송 중후기의 3대권신중 최소한 한탁주와 사미원은 제왕의 권력을 '잠용(潛用)'하거나 '절용(竊用)'했다. 한탁주는 '가어필축간신(假御筆逐諫臣)'했다. 이는 우정언 황도(黃度)가 한 말이다. 그 자신이 바로 쫓겨난 간신이다. 사미원은 더욱 '황권을 '잠용' '절용'하는데 고수였다. 전전사(殿前司)의 공무를 주관하는 하진(夏震)은 어비(御批)를 보자 한탁주에게 손을 쓰겠다고 대답한다. '군명이니, 하진은 마땅히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어비'는 바로 사미원이 위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명'만 있으면 비밀리에 대신을 주살할 수 있었다 .이는 송나라때의 제왕에게는 비밀리에 대신을 주살할 권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어비'만 있으면 '간언하는 신하를 쫓아낼 수 있다' 이는 송나라때 제왕에게는 마음대로 '간신' 혹은 '언관'을 쫓아낼 권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런 권력은 전혀 제약을 받지 않았다.


남송중후기의 3대권신 특히 사미원과 가사도는 모두 제왕과 특수한 관계에 있었다. 만일 송영종이 '내선(內禪)'으로 황위에 앉았다면, 한택주가 일정한 작용을 했다. 그러나 송이종은 사미원의 기획으로 조서를 위조하여 황제가 된 것이다. "황제는 그가 자신을 황위에 앉힌 것에 감사하여, 그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고, 평생동안 은총을 베풀었다." 송이종과 사미원간에는 이런 관계까 있었던 것이다. 송이종 이후의 송도종은 가사도가 세워준 것이다. 그래서 가사도를 '사신(師臣)'이라고 불렀다. 조정신하들은 가사도를 '주공(周公)'이라고 불렀다. 주공이 성왕을 보좌할 때, 성왕을 대신하여 조서를 반포했다. 이를 보면, 이 3대권신의 권력은 그 자체로 황권과 섞여 있는 요소가 있다. 송도종시대의 가사도는 먼저 6일에 조회를 1회 열다가, 나중에는 10일에 조회를 1회 열었다. 이런 권신의 권력은 황권의 비호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은 모두 제약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제왕의 권력이든 권신의 권력이든. 아니면 권신이 잠용,절용하는 제왕의 권력이든. 반복적으로 이런 권신 간신이 나타나는 것은 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권력에 대한 견제균형이 결핍되어 있었다.


기실 이런 권력구조는 남송중후기뿐아니라, 남송초기의 송고종 조구와 권신 진회가 악비를 죽이는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이것은 제왕의 권력이 제약을 받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권신의 권력이 제약을 받지 않은 것인가?


아마도, 이런 사례는 모두 극단적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범중엄이 '월직언사(越職言事)'로 관직을 잃은 것은 송인종이 언로를 막는데 익숙해서인가, 아니면 여이간(呂夷簡)이 사적인 보복을 한 것인가? 범중엄이 경성에서 쫓겨나 요주지주가 되었을 때, "조정의 신하들은 재상을 두려워하여, 감히 중엄을 배웅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감독작용을 해야할 어사 한진(韓縝)은 여이간을 위하여 아이디어까지 내준다. "청컨대 범중엄의 붕당이 조당을 비방한 것으로 백관들이 월직언사를 못하게 경고하십시오." 그리고 채양은 <사현일불초>의 시에서 '일불초(一不肖)"는 바로 정의를 펼치지 않고 권력귀족에 빌붙은 사간(司諫) 고납(高納)이다. 이를 보면 송인종시대에도 '언자무죄(言者無罪), '문자족계(聞者足戒)'는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어떤 논자가 칭송한 송나라때의 '중국식 분권과 견제균형의 미'라는 것은 크게 의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