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청시기 과거를 포기한 선비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중은우시 2019. 1. 2. 11:52

글: 만유어역사여현대지간(漫遊於歷史與現代之間)


명청시대 많은 선비들이 과거 이외의 선택을 했다. 어쨌든 단계를 다 통과하여 제국의 통치계급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엘리트들 뿐이었으니까. 많은 낙방한 서생들은 어떤 사람은 여전히 머리를 처박고 계속 공부했고, 어떤 사람은 과거이외의 또 다른 인생목표를 세웠다.


낙방한 선비들은 희곡가, 출판업자, 의사, 서당훈장, 송사(訟師), 상인등 각종 직업으로 진출했다. 이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글을 알고 책을 읽은 사람들이 배운 학문을 비정치적인 분야에 공헌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대량의 문학작품을 창작했는데, 여기에는 시가, 의학서적, 심지어 색정소설까지 있다. 그리하여 명나라말기에는 인쇄업이 발전되어 널리 전파되게 된다.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중 하나인 축윤명(祝允明, 호는 枝山, 1460-1526)은 회시에 참가했으나 낙방한 후, 말년에 거인(擧人)의 신분으로 광동흥녕현 지현의 관직을 받는다. 축윤명은 고향인 소주에서 서예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주색과 도박을 좋아했고, 복잡한 예절은 극도로 싫어했으며, 호쾌하게 모은 재산도 다 써버리며,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즐겼다. 그래서 매번 축윤명이 외출할 때면, 많은 채권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곤 했고, 그는 이것을 즐거운 일로 여겼다. 그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주관의 기녀를 뇌물로 주고서야 비로소 축윤명의 글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오중사재자중 하나인 당인(唐寅)은 과거부정사건에 연루된 후, '도화오(桃花塢)'에 은거하며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즐겼다. 어떤 때는 길거리의 소루에 앉아있으면 그림을 그려달라는 사람들이 술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였다. 당인은 게을러서 사부 주신(周臣)에게 대신 그려주게 했다. 주신에게는 두 명의 유명한 학생이 있는데, 한 명이 당인이고 다른 한 명이 구영(仇英)이다. 이 사형제는 명나라때 춘화를 가장 잘 그렸던 화가이기도 하다.


축윤명과 당인은 가정 초기에 연이어 세상을 떠난다. 오중사재자의 문징명(文徵明)은 소주문화권의 영수가 된다. 그는 비록 서향문제(書香門弟)이지만 관료로서의 생애는 순조롭지 못했다. 오십여세가 되어서야 공생의 신분으로 겨우 한림원 대조(종구품)가 된다. 이는 한림원내에서 가장 낮은 관직이다. 한림원은 고위층문관들이 사무를 보는 곳이다. 문징명은 다른 관리들에게 조롱을 바았고, 우울했던 그는 여러번 사직을 청하여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간다. 소주로 돌아온 문징명은 여생을 예술창작에 바친다. 죽기전에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묘지명을 써주고 있었다. 붓을 들고 깊이 생각하면서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세상을 뜬다.


오중사재자의 또 다른 한 명은 서정경(徐禎卿)인데, 그는 오중사재자중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인물이다. 서정경은 용모가 추하여 황제가 좋아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서길사(庶吉士)가 될 기회를 놓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경사에서 죽을 때까지 관직에 있었다. 서정경은 고향을 멀리 떠나 있었고, 젊은 나이로 죽었으므로 소주의 도시문화에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오중사재자의 처지를 살펴보면, 도시문화의 발전과 고향을 아끼는 선비는 긴밀한 관련이 있다. 조정에서 관직에 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관료사회에 절망한 선비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평온한 생활를 지내며, 민중의 질곡을 같이 느낀다. 그리고 풍만한 정력을 예술에 쏟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무형중에 찬란한 도시문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또 다른 인물로는 진계유(陳繼儒, 1558-1639)라는 화정(華亭) 문인이 있다. 그의 문학조예는 속되지 않았고, 다른 문인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있다면 출판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ㅈ거지 않은 경전과 서적을 교정했다. 진계유는 강남일대의 빈곤한 선비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이야기들을 제공해주고, 이를 편찬하게 하여 출판했다. 그리하여 대중의 환영을 받는다. 항간에서 잘팔리는 총서가 된다. 소설가 풍몽룡(馮夢龍)도 마찬가지로 출판사업에 심취했다. 자신의 작품을 인쇄하여 출판했을 뿐아니라, 우연히 친구가 초록한 <금병매>를 보고 크게 놀라서 즉시 서방을 종용하여 구매한 후 간행했다.


명나라 중후기, 서적의 가격은 저렴했고, 서방(書坊)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서적은 제자백가의 경전, 장회소설, 팔고시문(과거용), 일용류서(생활백과), 입분의학서등이었다. 입문의학서는 유가경전의 교육방식을 모방하여, 가결(歌訣), 운문(韻文)의 형식으로 썼고, 선비들이 외워서 의료에 종사하기 좋게 해주었다.


이들 입문의학서의 설계자는 대부분 과거에서 실패한 선비들이다. 예를 들어, 신안(지금의 안휘성 흡현)의 문인 왕기(汪機, 1463-1539)는 여러번 과거에서 낙방하자 부친이 송나라의 명상 범중엄(989-1052)이 한 "불위양상(不爲良相), 원위양의(願爲良醫)"라는 말로 그를 격려하여, 왕기는 마침내 과거를 포기하고 의학지식을 공부하여 근 10부에 이르는 의학저작을 남긴다.


어떤 선비들은 양상이 될 수 없고, 양의도 되기 원치 않으면, 법률지식에 의지하여, 관청에서 재판을 도우는 막우(幕友)가 되거나, 민중을 대신하여 소장을 써주는 송사가 되기도 했다.


송사에도 등급이 있었다. 최고급의 인물은 '장원(狀元)'이라고 부르고, 수입이 풍성했다; 가장 낮은 등급은 '대맥(大麥)'이라고 불렀고, 생계조차도 곤란할 정도였다. 송사는 소송경험을 책으로 써서 '송사비본(訟師秘本)'으로 만들어 간행하여 팔았고, 민중들에게 소송의 기교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관부의 눈에 소송을 교사하고, 소송을 떠맡는 교활한 무리로 비쳤다. 그래서 '송사비본'은 여러번 관청에서 금서로 지정되고, '유송(儒訟)'이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장경제가 발달한 명나라 중후기에, 더욱 많은 선비들은 유학을 버리고 상업을 택한다. 어떤 상인은 경영방법, 수륙교통, 사기대응책등의 경험을 책으로 엮어서 상업서로 만든다. 유가의 기질을 유지하며, 상업도덕을 중시하여, 순수하게 이익을 쫓는 상인들과 다르면 '유상(儒商)'이라 불릴 수 있다. 그들은 상업사회의 운영에 긍정적인 의의가 있다.


소위 '공부를 잘하면 관리가 된다(學而優則仕)'는 말이 있듯이, 관직에 나가는 것이 선비들이 바라는 꿈이다. 그러나 바라는대로 관직에 나아가 통치계급에 들어가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대부분의 선비들은 글을 아는 것을 가지고 다른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는다.


위에서는 과거 이외의 몇 가지 출로를 소개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명나라 후기의 적지 않은 과거합격생들이 공상업가정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선비들이 과거를 포기하는 것은 그저 개인적인 선택이고, 그들은 여전히 자원을 아랫 세대에 쏟았다. 왜냐하면 관리가 되는 것이 가족세력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명청시기의 선비들은 취사선택을 함에 있어서, 결국은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