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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 모친 조희(趙姬)의 신세내력의 수수꼐끼

by 중은우시 2018. 7. 17.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조희(趙姬)는 여불위(呂不韋)를 도와 고금중외에 가장 유명한 리스크투자에 성공하였고, 진시황을 낳아서 중국의 역사발전에 영향을 끼친 여인이다. 그녀는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신세내력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사기.여불위열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불위는 한단의 여러 여자들 중에서 춤을 잘 추는 자들를 취하여 같이 살았다." 그 다음 단락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자초(子楚)의 부인은 조나라 호족 집안의 여인(趙豪家女)이다." 앞의 기록에 따르면, 조희는 무희(舞姬)라는 것이니, 분명히 호족가문출신은 아닐 것이다. 호족가문의 아가씨가 춤추는 무희가 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의 기록에 따르면, 호족집안의 아가씨인 조희가 '한단의 여러 여자들' 틈에 끼어 있었을 리는 없을 것같다.


이로 인하여 후인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한다: 조희는 아마도 원래 호족가문 출신인데, 나중에 집안이 몰락하여, 한단의 풍진여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만일 조희가 정말 호족집안 출신이라면, 아마도 이런 상황일 것이다: 조희의 가족은 비록 한단의 호족집안이지만, 그녀의 부모는 비교적 호족집안 중에서는 비교적 관계가 먼 갈래일 것이다. 혹은 호족집안의 서출일 것이다. 이인(異人)과 마찬가지로, 조희의 모친은 아마도 호족집안에서 총애를 받지 못한 소첩일 수도 있다. 그녀의 딸도 당연히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조희는 한단의 무녀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희가 진나라 공자의 처가 된 후에, 정치적인 지위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되니, 그 '호족집안'에서는 다시 그녀를 일족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마천은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바로 조희가 '조나라이 호족집안의 딸이기 때문에' 비로소 이인과 여불위가 도망친 후에, 조나라의 군신(君臣)이 이인의 집안사람들을 붙잡아 죽일 때, '감춰주었고' 성공적으로 숨어있을 수 있었다고.


설사, 조희의 친정이 조나라의 호족집안인 귀족이라 하더라도, '호족'은 '호족'이고 '국군'을 넘어설 수는 없다. 나라의 원수를 앞에 놓고, 조왕은 절대로 어떤 집안이건 국가의 중요범죄인을 숨겨주는 걸 용납했을 리 없다. 그래서, 진실한 상황은 아마도, 조희모자는 '호족집안'에서 감춰둔 것이 아니라, 민간에 숨어서 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희와 아들 영정(贏政, 당시는 趙政, 이인이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성을 따르게 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일찌감치 일단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면 조희가 아들을 데리고 민간에 숨을 것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은 조나라에서 성과 이름을 숨기고 6년간 생활한다. 영정이 8살이 되어서 비로소 진나라로 간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조희와 아들은 이 6년간 생활이 아주 힘들었을 것이라고.


나중에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영정은 친히 한단으로 시찰을 간다. 한편으로 금의환향의 쾌감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한단에 도착한 후, "옛날에 모친 집안과 원한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자치통감.권육>). 이 행동은 진시황의 어린 시절이 빈한과 굴욕 가운데 지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렇게 크게 원한을 품겠는가?


오랫동안 억압받고 굴욕받아온 사람은 일단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면, 왕왕 아주 잔혹해진다. 이것은 일종이 보복이고, 일종의 발설이다. 진시황의 잔혹한 성격 가운데에는 우리가 이렇게 추단할 수 있다. 그가 어렸을 때 참기어려운 모욕과 괴로움을 받았고, 극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그래서 성격이 그렇게 바뀐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