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외(高巍)
북경에서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일찌기 북경에는 오대 '진물'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무엇이 진물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진압하고 겁을 주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누구를 놀라고 겁나게 한단 말인가? 바로 요마. 괴물. 귀신이다.
사람들은 많은 자연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요마, 괴물, 귀신이 그렇게 만든다고 여겼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써서 그들을 겁줄 물건을 찾았다.
놀라게 하고 겁주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주로 '물진(物鎭)'과 '부진(符鎭)'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북경일대에는 몇 가지 진물이 있는데, 민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산해진(山海鎭), 둘째, 석감당(石敢當), 셋째, 팔괘태극도(八卦太極圖), 넷째는 문전경(門前鏡), 다섯째는 일선패(一善牌), 여섯째는 영벽(影壁)이다. 이 6가지는 모두 진택지물(鎭宅之物)이다.
오행의 상생상극원리에 따라 경성의 오대진물은 각각 북경성의 동, 서, 남, 북, 중의 5개 방위에 놓여 있다.
간단히 말해서, 동방은 목(木)에 속하여 나무를 썼고, 서방은 금(金)에 속하므로 금속으로 썼고, 북방은 수(水)에 속하므로, 물로 썼다. 남방은 화(火)에 속하므로 불로 썼고, 중앙은 토(土)에 속하므로 흙으로 썼다.
이 금, 목, 수, 화, 토의 다섯가지 진물은 구체적으로 어떤 보물일까?
주간단(周簡段)의 저서 <신주일문록>(민속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방에서 쓰는 나무로 만든 진물은 상당히 큰 금사남목(金絲楠木)으로 위치는 광거문(廣渠門) 밖의 신목창(神木廠) 안에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진물인 금사남목은 70여자의 길이에, 6.7자의 직경으로 두 사람이 같이 안아도 다 안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저장에 유리하기 위하여 특별히 그 나무를 위하여 건물을 하나 짓는다. 이 건물은 7칸으로 내부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막혀 있지 않았다. 거대한 금사남목은 건물의 중간에 있었고, 사람을 보내어 지키게 했다.
서방에서 쓰는 금속질의 진물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역대이래로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서부 금정묘봉산(金頂妙峰山)과 대종사 내의 금속대종(金屬大鐘)이다.
묘봉산은 향회(香會)가 유명하다 멀리는 주변 성에서 심지어 길림, 절강 등지에서도 매년 사람들이 온다. 이를 보면 멀리까지 유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일부 사람들은 서부 대종사의 대종이야말로 '금'의 보물이라고 말한다.
명나라때 북경을 수도로 삼으면서 벌인 3대공사중에서 황성을 건축하고, 천단을 만드는 외에 이 대종을 주조했다. 이를 보면 이 대종의 지위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남방은 화에 속한다. 교묘하게도, 북경성의 정남쪽 영정문외대가의 서쪽에 있는 철로의 남쪽에, 연돈(煙墩)이라는 벽돌로 만든 대(臺)가 있다. 이 소임을 맡을 만하다.
연돈에는 <어제황도편>과 <어제제도편>이 새겨져 있고, 북경이 유연의 땅이었다는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연돈(燕墩)"이라고도 부른다.
북방은 수에 속한다. 가장 먼저 진물로 쓰인 물은 서성 적수담(積水潭)의 회통사(匯通祠)였다.
적수담의 원래 이름은 계사담(鷄獅潭)이다. 이는 회통사의 흙산 위에는 거석이 서 있는데, 전해지기로 운석이라고 한다. 돌은 닭모양과 사자모양이 마주보고 있다. 닭형은 비교적 분명하고, 사자형은 비교적 모호하다. 계사담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북방진물에 대하여 또 다른 설은 이화원 만수산의 곤명호(昆明湖)라는 것이다. 이 설도 아주 많이 주장되어 진다.
곤명호는 원래 천연호수이고 면적이 220헥타르이다. 당연히 적수담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래서 곤명호는 청나라말기에 적수담을 대체하여 북경성의 북방진물이 된다.
중앙은 토에 속한다. 진물은 경산(景山)이다. 경산은 흙을 쌓아서 산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북경성 중축선의 남북양단의 정중앙에 있다. 그리하여 당연하게 중앙진물이 된다.
명성조는 북경을 수도로 삼으면서, 중국전통의 풍수이론에 따라 경산에 만세산을 쌓는다. 이를 통하여 전왕조의 풍수를 억누르고, 자신의 강산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이 산은 북경성의 '진산(鎭山)'이라고도 불린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록 경산이 전왕조의 풍수를 '억누르지만' 자신의 강산을 영원히 공고하게 보존하지는 못했다.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으로 쳐들어 온다.
경성의 '오진'은 역사상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인민의 보호심리를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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