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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진시황사후 호해(胡亥), 조고(趙高), 자영(子婴)간의 권력투쟁

by 중은우시 2018. 8. 4.

글: 븍진사해(北辰四海)


진이세 호해는 거대한 역사의 쟁의중에 황위를 승계한다. 그리고 잔혹한 궁중투쟁을 겪고, 다시 격렬한 정치변혁이 일어난다. 또한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시급히 대처해야 했다. 그래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문관관료집단의 영수인 이사(李斯), 풍거질(馮去疾), 풍겁(馮劫)등은 모조리 피살된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집단의 대표인 왕리(王離)도 타도되었다. 반란군의 주력도 기본적으로 장한(章邯)이 통제했다. 실제로 이때 진이세집단이 직면한 형세는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궁정정변이 이 모든 것을 장악한듯이 보이는 상황하에서 발발한다. 진이세, 조고는 피살되고 자영이 즉위한다. 그 배후조종자는 바로 대진제국의 권력기초인 문관관료집단과 무장공신집단이다.


우리는 먼저 사서에 기록된 사건의 경위를 먼저 서술하기로 하자. 그 후에 다시 자세히 분석하고 추리해보자. 


<지치통감>의 진이세 및 조고의 피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조조권력농단, 지록위마.


조고는 대권을 독점하고자 하며,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가 우려하여, 앞장서서 사슴을 조당에 가져오고는 이것은 말이다라고 한다. 진이세의 대신들 중에서는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한다. 나중에 사슴이라고 했던 사람은 조조가 모조리 이유를 잡아 모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고를 두려워하고 다시는 그에게 반대하지 못하게 된다.


2. 조고권력찬탈, 핍살(逼殺)호해


처음에 조고는 제후반란군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왕리가 포로로 잡히고, 장한이 연패하며, 관동의 진나라관리는 중앙정부를 배반한다. 제후들도 속속 병력을 이끌고 서진한다. 조고는 그제서야 걱정되기 시작한다.


기원전207년 팔월, 유방이 무관(武關, 섬서성 상락시 단봉현 동쪽)을 돌파하여, 수도 함양은 위기를 맞는다. 조고는 진이세가 자신에게 죄를 물을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는다.


진이세는 과연 도적의 일을 가지고 조고를 질책한다. 조고는 암중으로 사위인 함양령(咸陽令) 염락(閻樂)과 동생 조성(趙成)과 상의한다: 진이세가 죄를 나에게 떠넘기려한다. 그래서 나는 천자를 바꾸고자 한다. 자영을 황제로 바꾸어 앉히겠다.


그리하여, 조고는 낭중령으로부터 황군애의 내응을 받아낸다. 그 후에 도적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염락으로 하여금 1천의 관병을 이끌고 망이궁(望夷宮)으로 향하게 한다. 망이궁의 위사가 막자, 염락이 참살한다. 그리하여 낭중령과 염락은 안팎에서 호응하여 황궁을 점령한다.


망이궁내에 진이세는 염락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차례로 군왕(群王), 만호후, 평민이라도 되게 해달라고 하지만, 염락은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진이세는 결국 자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일이 끝난 후, 조고는 전체 대신을 소집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이세를 주살한 경위를 얘기하고, 자영을 옹립한다. 진제국의 최고통치자의 칭호는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고, 평민의 예의로 진이세를 두현 남쪽의 의춘원(宜春苑)에 매장한다.


3. 조고의 권력상실, 삼족이 멸하다.


기원전207년 구월, 조고는 자영으로 하여금 재계(齋戒)하게 하고 종묘로 가서 조상을 참배하고 옥새를 넘겨준다. 재계5일후, 자영은 그의 두 아들에게 말한다: "조고는 진이세를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죽일까봐 겁이 나서 나를 세운 것이다. 듣기로 조고는 이미 초군과 약정을 맺었다고 한다. 진왕조 종실을 멸망시키고, 조고가 관중에서 칭왕한다고 한다. 그래서, 조고는 아마도 내가 종묘사직을 찾을 때 나를 죽일 것이다. 내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으면, 조고는 반드시 친히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 기회를 봐서 그를 죽이자. 과연 조고는 친히 재궁으로 와서 자영에게 청했고, 자영은 즉시 조고를 죽인다. 그리고 그의 삼족을 멸한다.


진이세 및 조고피살사건의 경위는 의문이 있다.


첫째, 지록위마사건의 의문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조고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으로써 누가 자신을 반대하는지 누가 자신에 찬동하는지를 판단했다고 한다.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이것이 가능한가?


확실히, 조고를 따라서 말이라고 한 사람들은 분명히 모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면 논리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조고에 천성하는 대신은 모두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고는 이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는 줄 아는데, 이들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만일 믿지 앟는다면, 어찌 그들이 정말 자기를 지지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록위마로 누가 자기편이고 누가 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확실히 논리적 문제짐이 있다. 사서에는 조고가 음험하고 교활하다는 사례를 많이 열거하고 있는데, 조고가 멍청하다는 사례는 없다. 지록위마는 멍청한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다만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의 충성심을 시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둘째, 조고가 진이세를 모살한 동기에 대한 의문


사서의 주장에 따르면, 조고가 진이세를 죽인 동기는 진이세가 자신이 농민반란의 형세에 대한 판단착오에 대하여 죄를 내릴까 겁이 나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확실히 헛점이 있다. 이유는 이러하다"


(1) 진제국은 반란군을 경시하지 않았다. 대택향의거가 일어난 후 1달동안, 진이세는 무장역량을 조직하여 농민반란군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진나라조정은 반란군에 대한 군사행동을 절대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정도전투때, 진이세는 대량으로 증원하고, 최종적으로 항량의 초군주력을 섬멸한다. 그래서 조고가 반란군을 경시하여, 진이세가 반란군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문제는 아예 없었다.


(2) 진제국의 형세가 아주 나쁜가? 기실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유방의 그 만여명 유격부대는 함양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당조 주문(周文)이 수십만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다가왔을 때, 그ㅡ때의 형세가 지금보다 백배는 위험했다. 진제국이 마찬가지로 잘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외에 장한은 왕리의 야전부대를 병합한 후, 총병력이 40만에 달한다. 그리고 훈련을 잘 받은 정예부대이다. 그러나 각 반란군의 병력은 다 합쳐봐야 15만이 넘지 않는다. 오합지졸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반란군이 진군에 비하여 우세하다고 볼 점은 없다. 이렇게 보면 조고가 진이세를 죽일 동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조고가 자영을 옹립한데 대한 의문


설사 조고에게 야심이 있어, 진나라제국의 정치무대를 완전히 통제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자영을 옹립해서는 안되었다. (1) 자영은 부소의 아들이고, 부소의 죽음은 조고의 아이디어였다. 현재 조고가 원수의 아들이 황위를 잇도록 하다니,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2) 조고가 허수아비를 올리려고 했다면 나이어린 황자로 앉혀야 한다. 자영은 이미 성년인데, 멍청한 진이세보다 통제하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넷째, 자영이 조고를 죽인 방식에 대한 의문


이것은 가장 헛점이 많은 부분이다. 조고가 이미 함양의 정국을 통제했다면, 자영은 분명히 조조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야 한다. 자영의 기거와 음식은 모조리 조고의 감시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고는 재궁에서 자영을 만나다가 그 자리에서 암살당한다. 자영의 무기는 어디에서 왔는가? 조고의 곁에는 호위 한 명도 없었단 말인가? 그리고 자영이 조고를 죽인 후, 신속히 정권을 장악했는데, 그렇다면 조고의 심복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완전히 무협소설의 구상이다. 자영이 설마 여러해동안 숨어있던 절세고수라도 된단 말인가?


이 시기의 역사기술은 헛점이 너무 많다. 그래서 헛점을 지적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앞에서 분석한 내용을 가지고, 진2세집단이 멸망하는 과정을 다시 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이세는 조고가 죽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진이세와 조고는 동시에 자영을 우두머리로 하는 구관료집단에 피살되었다.


조고는 진이세를 죽일 동기도 없고, 죽인다고 하여 이익도 없다. 조고는 반드시 진이세에 빌붙어야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다. 진이세가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실행했는데, 반드시 조고의 내신집단에 의존해야 한다. 그들은 관료집단과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아서, 진이세와 조고의 양자는 이익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는 조고의 살인동기는 헛점이 너무나 명확해서, 믿기가 어렵다. 조고가 자영을 옹립한 것도 상리에 맞지 않는다. 특히 자영이 조고를 암살하는 과정은 그저 희극이다. 재미있기는 재미있지만 진실하지는 않다.


진이세와 조고를 죽인 것은 1명이 적수공권으로 완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협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한 정치투쟁이다. 자영이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분명 정치집단이 받쳐주고 있었다.


진이세집단이 이사등 3명을 죽였고, 문관집단에 타격을 가했다. 거록전투를 통하여 왕리등을 없애고, 무장공신세력을 약화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진이세가 완전히 우세를 점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것은 완전히 문관, 무관관료집단을 자극했다. 그들은 유례없이 단결한다. 그리고 진이세에게 반격을 가할 결심을 굳힌다. 이들이야말로 자영의 배후세력이다.


(2) 진이세와 조고의 피살은 직접적인 원인이 진이세집단의 내부에 배신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귀족관료집단이 반격을 가하는 것은 말로서 한다고 하여 바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다. 진이세집단이 어쨌든 우세를 점하고 있다. 다만 관료집단은 한가지 날카로운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성중에서 탐욕과 욕망심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이세집단중의 구성원은 "순결하고 견결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구관료집단을 타격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이들은 거대한 압력과 위험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심 댓가에 대한 기대가 비교적 높았다. 그러나 승리의 과실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대다수는 예상했던 댓가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고 느낀다. 이것은 문제를 잉태한 것이다.


사서에는 조고의 사위 염락과 낭중령이 진이세를 살해한 직접적인 흉수라고 적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진이세집단의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구관료집단이 책반(策反)한 사람일까?


(3) 진이세집단의 정치개혁에 손해를 입은 것은 몇 사람이나 몇개의 정치소집단의 이익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 관료집단의 이익이다. 진이세는 체제내의 최고지도자로서 이런 정치개혁을 진행하는데 난도가 높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역사사건은 다 고쳐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역사를 탐구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의문을 갖고, 우리가 고증을 하고, 우리가 분석을 하고, 우리가 추리를 하고, 우리가 판단을 하다. 진상을 탐구하는 것은 인류진보의 원동력이다. 그게 자연과학이건 인문역사이건.


그리고, 모든 역사기록이 날조된 것은 아니다. 본문은 이런 관점을 계속하여 보였다. 증인이 많은 역사사건은 진실성이 더욱 높다. 반대인 경우면 낮다. 그러면, 진이세, 조고가 피살된 세부과정은 증인이 적은 사건이다. 자영집단의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된다. 어쩄든 죽은 사람은 증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영이 등극하고, 진이세, 조고가 비명에 죽은 것이나, 장한이 수십만대군을 보유하고서도 왕리가 대패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만 있었던 것이나, 나중에 장한과 항우가 협력하고 친밀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나, 원래 유방에게 나눠주어야할 관중지역을 장한, 사마흔, 동예등등에게 나눠준 것이나, 이 ㅁ든 것들은 증인이 많은 역사서건이고 고치기가 어렵다.


본문에서는 진이세가 지나치게 먹칠당했다고 본다. 진이세가 여러가지 황음한 행위를 했다는 것은 증거가 없다. 진이세는 대진제국의 황제로서 그의 집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너무 조급하고 분촌을 잘 다루지 못했다. 진이세는 진제국에 존재하는 문제를 보았고, 하룻밤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진이세집단의 멸망은 진나라중앙정부의 정치개혁이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비록 대진제국의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급진적인 정치개혁이 끝났지만, 사회계통의 편차를 회복하는 역량은 점점 강해진다. 설사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여러가지 사회체제를 개조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질서없고 자유스러운 사회동탕에 의하여 해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