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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정사(正史)"로 나열한 중국왕조

by 중은우시 2018. 10. 5.

글: 호단(胡丹)


이 글에서 얘기하려는 것은 한 권의 사서(史書)가 아니라, 일련의 사서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총서'일 것이다. 역대왕조에서 편찬하여 이루어졌고, 그 이름은 "이십사사(二十四史)"라고 부른다.


"이십사사"는 24부의 "정사"로 이루어졌다. 만일 우리가 "우엇이 중국인가?"라는 각도에서 새로 검토한다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24부의 "정사"는 바로 중국인의 완전한 가보(家譜)가 된다는 것을 '천년일계'의 중국왕조 계보가 된다는 것을.


1.


정사의 개념은 초당(初唐)때 <수서(隋書).경적지(經籍誌)>를 작성하면서 처음 제기된다. 특별히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를 대표로 하는( 두 사람을 합쳐서 왕왕 반마(班馬, 중국어에서 반마는 얼룩말을 의미한다)라 부른다) 기전체(紀傳體) 사서를 가리켰다.


<경적지>에서 '정사'로 열거한 것은 <사기>이후의 67부 사서(일실된 것까지 합치면 80부)를 포함하며, 정사 형성의 원류를 정리했다.


서한 중엽의 사마천이 쓴 <사기>는 "위로는 황제(黃帝)부터, 아래로는 염한(炎漢)까지"를 썼고, 동한초기의 반표(班彪)는 전기 수십편을 이어서 썼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이때까지 반표는 그저 <사기>의 뒤를 잇는 것으로 쓴 것이고, 한 왕조의 역사를 쓴 것은 아니었다. 한명제는 반표의 아들인 반고에게 완성하라고 명한다. 반고는 당(요), 우(순), 삼대(하상주)에 대대로 전적이 있어 자신의 왕조의 업적을 기록했는데, 사마천이 한나라역사를 그 끝에 붙여서 진(秦), 항(項)의 곁에 둔 것은 맞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한서>를 쓴다.

기전체의 발명자인 사마천의 <사기.는 통사(通史)이다.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우두머리인 황제로부터 한무제시기까지를 쓴 것이다. 반고가 보기에, 서한을 '계어백왕지말(繼於百王之末)"한 것은 "의(義)가 아니다. 무엇이 "의"인가. 실제로는 본왕조를 높이 받드는 것이다. 그래서 반고는 역사서를 쓰면서, 한고조부터 시작하여, 왕망까지, 서한의 역사를 쓴 것이다. 여기에서 암암리에 '의리(義理)'라는 새로운 전통을 주입시켜, 후세인들이 계승하게 된다. <한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의 정사는 모두 '단대사(斷代史)'이다.


단대사라는 것은 "일대지사(一代之史)"이다. '일대'는 1개성의 왕조를 가리킨다. 왕조(王朝) 혹은 조대(朝代)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는 바로 몇 '대'인지로 형용할 수 있다.


서진(西晉)에 이르러, 진수(陳壽)가 <삼국지>를 쓴다. 


위진시대는 사학부흥의 전성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대지사'를 쓰는데 주력한다. 그들은 일치하여 '기전체'를 사용했다. 이들 사서는 모조리 <수서.경적지>에 '정사'로 분류되어 있다. 수십개에 이른다. 바로 정사는 일대의 '국사(國史)'를 적는 것이기 때문에 지위가 중요하고, <경적지.시부>에서 열거한 13종의 사서유형중에서 '정사'를 첫머리에 두게 된다.


<경적지>에 열거하 80부의 사서중 많은 것은 개인이 쓴 것이다(예를 들어 반표가 죽은 후에 한명제가 반고에게 계속하여 쓰라고 한 것은 부친의 뜻을 아들이 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는 정부의 지지가 있었다. <한서>, <삼국지>는 모두 작자가 완성하기 전에 죽고, 황제의 도움으로 책이 완성되게 된다.


남북조 수백년의 혼란을 거쳐 당왕조가 천하를 통일한다. 나라를 세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관(史館)을 열고 <수서>를 포함한 여러 부의 전대사(前代史)를 쓰게 된다. 여기에서 바로 "십사(十史)"라는 말이 나온다. 삼국에서 수까지의 '십대의 사서'를 말한다. 그리고 '십삼서'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는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범엽의 <후한서>를 포함한 것이다. 조정의 명의로 사관을 열고, 신하를 모아서 공동으로 편찬하게 하고, 재상이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 때부터 신왕조를 개창하면 전왕조의 사서를 직접 편찬하고, 이를 통하여 역사의 발언권을 장악하는 새로운 전통이 생기게 된다. '정사'를 정부에서 편찬하는 특색은 갈수록 선명해진다.


왕조의 교체와 더불어, 송나라때는 "십칠사", 명나라때는 "이십일사"가 나온다. 청나라 건륭제가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여기에 <명사>, <구당서>와 <구오대사>를 추가하여 "이십사사"가 된다. 새로 추가된 3부의 사서는 모두 흠정(欽定)으로 조증(詔增) 예재(睿裁)하였다. 정사는 반드시 황제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사고관의 신하들은 "정사체존(正史體尊)"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정사는 바로 '의(義)'와 '경(經)'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반고가 숭상한 '의'를 강화한 것이고, 정사는 '흠정' 즉 황제가 인정했다는 타이틀이 붙는다. 그리하여 왕조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게 된다.


2


정사의 '의'를 체현하는 중요한 면은 바로 '정사'에 대한 선택이다.


정사는 '일대지사'를 기록한 것인데, '이십사사'에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하나는 결루(缺漏)이다. 어떤 통일왕조는 유대무사(有代無史, 왕조는 있으나 사서는 없다)이다. 예를 들어, 진(秦), 신(新, 왕망이 건립한)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복(重複)이다. 예를 들어, 남북조는 '팔서'(송서, 남제서, 양서, 진서, 위서, 북제서, 주서, 수서)'외에 다시 '이사(二史, <남사> 및 <북사>)가 있고, 당서, 오대사는 신,구의 두 부가 있다.


이는 설명한다. '정사'는 간단하게 '일대지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한 것이다. 한편으로 진왕조와 신왕조는 비록 모두 통일왕조이지만, 하나는 '폭(暴)'으로 다른 하나는 '찬패(纂敗)'로 인하여 합법성에 의문이 있다. 그래서 진왕조는 '윤위(閏位)'에 들어가쏙, 신왕조의 역사는 동한과 서한에 나뉘어 들어갔다. 다른 한편으로 남북조 및 오대 요, 송, 금의 분열시대에는 '화이(華夷)'개념이 혼합되어 각자 역사를 씄다. 어떤 왕조는 오랑캐라고 하여 정사에서 배제하지는 않았다. 역사의 실체는 분열되어 있었지만, 중국정사체계에서는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를 보면, 정사에서 주장하는 '의'는 통치의 합법성에 있지, '화이지변(華夷之辨)'에 있지 않다.


그리하여 황제로부터 양한까지, 그리고 이어서 위진, 그리고 남조의 '송제양진', 북족의 '위제주' 다시 수당오대, 송요금, 원명청...'정사'는 완전한 중국왕조를 보여준다. '당송원명청'은 사람들의 입에 익어서 마치 한 집안처럼 여겨진다.


과거에 중국사를 얘기할 때면, 많은 경우 '일가일성(一家一姓)' 왕조의 교체성에 착안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들 이성왕조간의 관통성은 보지 못했다. 어떤 주선(主線)이 그들을 관통시켰을까? 그것은 바로 '정통(正統)'관념이다. 정통관은 중국고대에 통치의 합법성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치문화명제였다. 역대왕조는 모두 이 방향으로 노력했고, 역대 정사는 이를 근거로 하여 '왕조'에 대하여 선택하고 확인했다.


3


현대의 서방은 습관적으로 국가제도의 형성을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예를 들어, 일본은 천황의 출현을 국사의 시작으로 본다. 스스로 천황의 전승으로 '천년일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기실 중국의 역사는 '가천하(家天下)의 시대로 들어간 하(夏)왕조를 첫번째 중국왕조로 보면 4000여년의 역사가 있다. 분열되었다가 토일도면서 실제로는 '천년일계'의 왕조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봉건제와 군현제의 두 가지 사회형태도 넘어섰다.


일찌기 공자가 생활하던 시대에 하상주는 이미 '삼대'라고 칭해졌다. '대(代)'는 사람에게도 있고, 국가에도 있다. 하상주의 교체는 '혁명'으로 이루어졌다. 기치는 바뀌었지만, 불씨는 이어졌다. 그 불씨는 '천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덕운(德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늘의 의지를 나타낸다. 고인들은 자주 말했다. '경천법조(敬天法祖)' 조상(성씨)은 다르지만 받들어모시는 하늘(혹은 정신)은 같았다.


왕조는 성씨가 서로 다르지만, 왕조이 사명과 전통은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은인어하(殷因於夏), 주인어은(周因於殷), 한승진제(漢承秦制), 당승한통(唐承漢統), 청승명제(淸承明制).... 유사한 말들이 여러 글에서 보인다. 사마천은 이전의 역사를 발전맥락에 따라 오랫동안 정리하여 역사를 본기(제왕의 전기)를 중심으로 하여 편찬했고, 반고는 '일대지사'를 써서, '왕조'를 단위로 하는사서의 새로운 모델을 만든다. 그 후에 일대 일대 내려가면서 계속하여 일대지사를 쓰게 된다. 그러다가, 통일왕조인 당왕조에 이르러 다시 한번 새롭게 보충 정리하게 된다. 이는 중국인의 독특한 전통이다. 대대로 이어진 문화공정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단대사인 정사를 일가일성의 가보라고 풍자한 바 있다. 그러나 유씨, 조씨, 사마시...의 '가보'를 유씨, 조씨, 사마씨가 썼을까? 아니다. 모두 새 왕조가 들어선 후에 전왕조의 역사를 쓴 것이다. 후대가 전대의 역사를 쓴 것이다.


후대에 전대의 역사를 쓰는 것은 처음에는 이를 통해서 차감(借鑒)하는데 의미를 두었지만, 갈수록 '의'를 중시하게 된다. 역대왕조는 전왕조의 역사를 씀으로써 자신이 전왕조를 잇는 합법적인 계승자라는 것을 표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