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담야사(笑談夜史)
유비의 조상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유비는 자칭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기실 이 중산정왕에 대하여 흥미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유비는 빈한한 집안 출신이고, 짚신을 만들어 살았는데, 어찌 스스로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 중산정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가? 기실 그 배후의 비밀이 적지 않다. 먼저 유비가 스스로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 말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진위를 확인해볼 방법이 없다. 왜그럴까?
유비가 성년이 된 후,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착실하게 준비를 해둔다. 유방이 칭제하여 한나라를 건립한 때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씨성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씨족으로 성장했다. 유비는 성이 유씨이니 그는 유방의 후손이라고 보는데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자신이 유방의 몇대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자신은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 하였을까?
1. 지역적인 합리성
하북 탁현(涿縣)은 유비의 고향이다. 한나라때 중산국(中山國)의 강역내에 속한다. 중산정왕 유승(劉勝)은 바로 중산국의 제1대 국군이다. 한무제때부터 주보언(主父偃)의 건의를 받아들여, 삭번정책을 실행한다. 중산국은 분할되어 작은 영지로 된다.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은 바로 유비의 고향인 탁현에 봉해진다. 유승은 42년간 중산왕으로 있었고, 아들만 120여명을 낳는다. 그래서 중산국 경내에 있는 유씨는 기본적으로 모두 유승의 후손이다. 그래서 유비가 자신은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2. 고귀한 광환
유비는 왜 중산정왕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당금황실내에서 어느 누군가를 찾아서 조상으로 삼지 않았을까? 그중에 아주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중산정왕 유승은 한무제 유철의 친형이라는 것이다. 유비가 유승의 후손이 되면, 한무제는 자연스럽게 유비의 태숙조(太淑祖)가 된다. 유비가 유승을 조상으로 인장한 것은 한무제를 조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무제라는 큰 배경이 있으면 유비의 포부는 훨씬 실현하기 좋다.
3. 고증할 수가 없다.
유비가 중산정왕을 조상으로 삼은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후세에 고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유승의 아들은 120여명이고, 각지로 분산되었다. 특히 한무제가 11명의 작위를 폐위한 후, 나머지 사람들은 난을 피하여 속속 원거주지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가족의 족보가 혼란스러워졌고, 동한 말기에는 이미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를 판별하기 어렵게 된다.
이 중산정왕은 아들이 아주 많았다. 전해지는 바로는 120여명이다. 이렇게 많은 아들이 있으니, 그 후대는 더욱 많을 것이다. 그래서 유비가 중산정왕의 후손이라고 하면, 누구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중산정왕은 한경제의 서자이고, 한무제의 형이다. 지위가 낮지 않았다. 유비가 그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체면이 서는 일이다. 이 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기실 증거가 확실하게 있다. 1980년대 중산정왕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만성한묘(滿城漢墓)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묘를 열자마자 세계는 깜짝 놀란다. 이 중산정왕의 묘지는 아주 호화스러웠고, 묘안의 부장품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보물이었다. 중산정왕묘의 안에서 출토된 문화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금루옥의(金縷玉衣), 장신궁등(長信宮燈), 그리고 착금박산로(錯金博山爐)등등. 이들 문화재는 하나하나가 국보이다. 묘주인의 지위와 능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를 보면 묘주인은 중요한 왕공귀족일 것이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이들 문화재가 천년전의 봉건사회에 나타났다는게 상당히 불가사의하다. 고인의 총명과 재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1968년, 고고학전문가는 만성한묘를 발굴할 때, 몇 건의 "역천신물(逆天神物)"을 발견한다.
만성한묘는 서한 중산정왕 유승과 그의 부인 두관(竇綰)의 묘이다. 유승은 한경제의 서자이고, 원전3년 중산왕에 봉해진다. 즉 중산국의 제1대국군이다. 아마도 유승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는 삼국시대 유비의 제13대 선조이다. 당시 한무제 유철이 등극한 후, 대신들은 칠국의 난을 매우 꺼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 제후국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았다. 걸핏하면 이들의 과오를 한무제에게 올리곤 했다. 유승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하루는 동생 유철이 그들을 환대할 때, 울면서 호소한다. 국상(國相)이 자신에 대하여 트집을 잡아서 걸핏하면 고발한다고. 그래서 한무제는 명을 내린다. 더 이상 각 제후국 국왕을 괴롭히지 말라고. 이로 인하여 그는 "한의 영번(漢之英藩)'이라는 평을 듣는다.
유승은 다른 소인들이 그에 대하여 트집을 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전문적으로 풍월주색을 연구한다. 그리하여 아들을 120여명이나 낳게 된 것이다. 중산왕이라는 위치에서 42년간이나 있다가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 지금의 하북 만성현 능산에 묻힌다. 1968년이 되어, 고고학자들이 그의 묘를 열었고,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전문가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1호릉이다. 즉 유승이 묻힌 곳이다. 1호묘를 발견한 후, 다시 곽말약 선생의 제언에 따라 2호묘를 발굴한다. 그의 부인의 묘이다. 중산정왕의 묘와 그의 부인묘는 규모가 비슷하다. 중간에는 대청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다. 즉 중실(中室)이다. 대부분의 진귀한 문물은 모두 중실에 놓여 있었다. 그중 전문가들이 묘안에서 발굴한 철기, 동기, 금은, 옥기장식품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만건이 넘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감탄한다. 고대 귀족들의 부는 깜짝 놀랄 정도였던 것이다.
유승의 묘는 주봉의 남쪽 주봉의 1/3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로 51.7미터이고, 남북으로 37.5미터이다. 가장 높은 곳은 6.8미터이고, 용적은 약 2,700입방미터이다. 두관의 묘는 동서로 49.7미터, 남북으로 65미터, 가장 높은 곳은 7.9미터이고, 용적은 3,000입방미터에 달한다.
두 묘의 형제와 구조는 대체로 같다. 모두 묘도,용도(甬道), 남이실(南耳室), 북이실, 중실과 후실(後室)의 6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중실은 전체 묘실의 중부이다. 면적이 가장 넓고, 정방형에 가깝다. 이는 묘실의 주요부분이다. 집에서 거실에 해당한다. 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다. 중실의 동쪽은 전실과 연결되어 있고, 전실의 남쪽의 중심점은 남이방이고 북쪽은 북이방이다. 중실의 서쪽에는 석문이 하나 있는데, 이 석문을 지나가면 직접 후실에 닿는다. 후실은 문도, 주실과 측실의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고고학자들은 이 두 개의 묘에서 6000여건의 부장품을 찾아낸다. 이들 부장품은 종류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질서있게 놓여 있었다. 중산국의 거의 모든 기물을 모아놓았다. 이들 부장품중에는 도기의 수량이 가장 많고, 동기가 그 다음이고, 그외에 대량의 철기, 금은기, 옥석기, 칠기와 방직품등이 있다.
특히 유승의 묘실은 각 방들간의 기능이 완전히 다르다. 놓여진 기물도 크게 차이가 난다. 유승묘의 남이실과 용도는 거마방(車馬房)을 상징한다. 이곳에는 소, 말을 놓아두었다; 북이실은 창고와 마방(磨房)을 의미한다. 양식, 어육과 취식에 필요한 각종 도구, 석마와 추마생구를 놓아두었다. 중실은 대청을 상징한다. 대량의 동기,도기, 철기, 금은기등 생활용품을 놓아두었다; 후실은 내실을 상징한다. 관과 귀중물품을 놓아두었다. 두관묘의 부장품배치도 유승묘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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