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하분류(大河奔流)
제1차 대남뤌전쟁은 실패로 끝난다.
여후시대, 유관부서의 관리는 남월의 변방시자에서의 철기구매를 금지하도록 청구한다. 조타(趙佗)는 이것이 장사왕(長沙王)의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장사왕은 중원의 한왕조에 의존하여 남월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남월왕을 겸하고자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조타는 존호를 더욱 높혀서 스스로를 남월무제(南越武帝)로 칭한다.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 장사국의 변방 성읍을 공격하고, 몇개의 현을 함락시킨 후 다시 떠난다. 여후는 장군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竈)를 파견하여 조타를 치게 한다. 그러나 한여름의 조습(潮濕)한 기후를 만나 병사들중에 병에 걸리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양산령(陽山嶺)을 엄어가지 못한다. 다시 1년여가 지나서 여후가 죽고, 한군은 공격을 멈춘다.
제2차 대남월전쟁은 전군이 전멸하면서 끝난다.
원정(元鼎)4년(기원전113년), 겹지(郏地) 장사이자 원 제북왕(濟北王)의 상(相)인 한천추(韓千秋)와 왕태후(王太后)의 남동생 규락(樛樂)이 2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월로 진군한다. 그들이 남월의 경내로 들어가서 몇 개의 작은 성진을 함락시킨다. 남월인들은 길을 열어준다. 그리하여 한천추는 군대를 이끌고 순조롭게 전진한다. 번옹(番禺)에서 사십여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남월은 한천추등을 공격하고, 한천추의 부대는 전멸하고 만다.
제3차 대남월전쟁은 전승을 거두고, 남월은 멸망한다.
원정5년(기원전112년) 가을, 위위(衛尉) 노박덕(路博德)은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병력을 이끌고 계양(桂陽)을 출발하여, 회수(匯水)로 바로 내려간다. 주작도위(主爵都尉) 양복(楊僕)은 누선장군(樓船將軍)이 되어 예장을 나서 횡포(橫浦)로 바로 내려간다. 원래 한나라에 귀순하여 후작을 받은 두 명의 남월인은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려장군(下勵將軍)이 되여 병력을 이끌고 영릉은 나서 이수(離水)를 따라 내려가고 직접 창오(蒼梧)에 도착한다. 치의후(馳義侯)는 파촉(巴蜀)의 죄인을 이용하여 야랑(夜郞)의 병졸을 움직여 직접 장가강(牂柯江)으로 내려간다. 마지막에는 모두 번옹에서 회사(會師)하기로 되어 있었다.
원정6년(기원전111년) 가을, 누선장군은 정예병졸을 이끌고 먼저 심섬(尋陝)을 공격한다. 그 후에 석문(石門)을 함락시켜, 남월의 전선과 양식을 빼앗는다. 그리고 승기를 잡아 전진하여, 남월의 선두부대를 격파한다. 그리고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복파장군을 기다렸다. 복파장군은 사면받은 죄인을 이끌고 가는데가 길도 멀어서 회사하기로 한 날짜를 못맞춘다. 그리하여 누선장군과 회사한 병력은 겨우 천여명이었다. 함께 전진한다. 누선장군이 앞장서서 직접 번옹으로 쳐들어간다. 조건덕(趙建德)과 여가(呂嘉)는 모두 성에서 방어하고 있었다.누선장군은 스스로 유리한 곳을 선택하여 번옹의 동남쪽에 주둔한다; 복파장군의 주둔지는 번옹의 서북쪽이다. 마침 캄캄한 밤이었고, 누선장군은 남월인을 공격하여 승리를 얻는다. 그리고 번옹성에 불을 지른다. 남월인은 평소에 복파장군의 대명을 들은 바 있고, 캄캄한 밤이다보니 그의 군대가 몇 명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복파장군은 군영을 설치하고, 사자를 보내어 투항한 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인(印)을 내리고 다시 돌려보내서 다른 사람들의 투항을 받아오게 한다. 누선장군은 힘을 다하여 공격하고, 적을 불태운다. 이렇게 하여 더욱 더 많은 병사들이 복파장군에게 투항하러 온다. 여명때, 성안의 적병은 모두 복파장군에게 투항했다. 여가와 조건덕은 밤에 수백명의 부하와 함께 바다로 도망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간다. 복파장군은 다시 이미 투항한 남월의 귀족을 신문하여, 여가의 목적지를 알아내서 사람을 보내어 그를 추격하여 체포하게 한다. 원래 교위(校尉)였다가 지금은 복파장군의 사마(司馬)가 된 소홍(蘇弘)은 조건덕을 체포하여, 상해후(常海侯)에 봉해진다. 남월인 낭관(郎官) 도계(都稽)는 여가를 체포하여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진다.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의 군대, 그리고 치의후가 지휘하는 야랑군대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월은 이미 평정되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남월에 9개군을 설치한다.
조타가 처음 칭왕한 때로부터 5대, 93년간 존속했던 남월국이 멸망한 것이다.
남월을 정벌한 주력을 보면, 비록 5로대군이 대남월전쟁에 참여했지만, 진정 주력으로 활동한 것은 누선장군의 강서병력이다. 복파장군의 상군(湘軍)은 그저 중간에서 이익을 챙긴 것뿐이다.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의 영릉부대와 치의후의 야랑부대는 모두 한 일이 없다.
옛날부터 강서인들은 잘 싸웠다.
상군(湘軍, 호남군)은 역대이래로 교묘한 전투를 잘했고, 이익을 잘 보는 것도 분명하다. 복파장군의 1천여명은 군영을 지키면서 남월병사들이 투항해 오는 것을 기다렸을 뿐이다. 천하의 좋은 일은 그에게서 일어난다.
전군(滇軍, 운남군)이 전투를 잘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사마천마저도 참지못하고 이렇게 한 마디를 덧붙인다: "과선, 하려장군 및 치의후가 이끄는 야랑병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남월은 이미 평정되었다." 쟁개시부터 종결까지 1년이 걸렸는데도 아직 도착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란(樓蘭): 한나라에 맞섰던 실크로드의 소국(小國) (0) | 2018.12.28 |
---|---|
괴뢰황제 유분자(劉盆子): 신하들에게 퇴위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다. (0) | 2018.11.21 |
진실한 홍문연(鴻門宴): 항우의 함정이 아니라 유방의 세뇌 (0) | 2018.05.14 |
한(漢)나라의 정부구조: 일국양부(一國兩府) (0) | 2014.08.27 |
소군출새(昭君出塞)의 동기는 무엇인가? (0) | 2013.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