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전사감(瘋癲史鑒)
이런 말이 있다. 털뽑힌 봉황은 닭보다 못하다고.
서한 말기, 번숭(樊崇)은 산동 거현(莒縣)에서 적미군(赤眉軍)을 이끌고 거병했다. 반군은 용맹하게 싸워서 연전연승하며, 규모를 계속 확대해서 장안 부근까지 쳐들어간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는데, 병사들은 피로에 지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전체 부대에 퍼지게 된다.
번숭등 반군의 우두머리들은 병력을 다시 산동으로 되돌리면 흩어져버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리하여 경시재(更始帝) 유현(劉玄)의 대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계속 서진하여 장안을 치고자 한다.
공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매끄럽지 못하고, 말이 매끄럽지 못하면 일을 이룰 수가 없다." 누군가 번숭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우리가 곧 도성을 점령할텐데, 우리 적미군은 아직 명분이 없다. 백만대군을 갖고도 제대로된 명분이 없으면, 산채의 도적과 같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옳은 방법이 아니다.
번숭은 다른 장수들과 상의한 후, 금방 유씨종친중 한 명을 황제로 앉히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대의를 내세워서 무도한 정권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로 한다. 서한황실은 수백년동안 자손들이 번창하여, 방계혈맥이 각지에 다 퍼져 있었다. 번숭은 군영을 뒤져서 70여명의 유씨종친을 찾아낸다.
이런 상황하에서 아무나 골라서 황제로 앉힌다면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번숭은 자신의 부하들이 모두 산동에서 왔고, 성양경왕(城陽景王) 유장(劉章)을 매우 존경하고 있어, 사병들이 자주 이 경왕에게 기도하며 복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번숭은 이들 70여명의 유씨종친들 중에서, 유무(劉茂), 유분자와 전 서안후(西安侯) 유효(劉孝)의 세 사람을 후보로 뽑는다. 이들은 성양경왕과 혈연관계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고대 황제는 천자로 자처했고, 번숭은 이 연극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황제를 책봉하는 권력을 하늘에 넘긴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정현(鄭縣) 북쪽 교외에 높은 대(臺)를 쌓게 하고, 아주 공손하게 성양경왕에게 제사를 지낸 후, 3명의 후보자를 대 위로 모신다. 나이 순서대로 상자 안에서 죽첨(竹簽)을 뽑게 한다. 죽편 중에서 '상장군(上將軍)'이 쓰인 죽편을 뽑는 사람을 황제로 책봉하려는 것이다.
유무와 유효가 먼저 뽑았는데, 모두 아무 글자가 쓰여있지 않은 죽편을 뽑는다. 나이가 가장 어린 유분자가 의외로 황위를 상징하는 죽편을 뽑게 된다.
<후한서. 유분자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분자가 가장 어렸다. 나중에 뽑았는데 부(符)를 얻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신하를 칭하며 절을 한다. 유분자의 그때 나이 열다섯이다. 봉두난발에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땀을 흘리고 있엇다. 사람들이 그에게 절을 하자, 두려움에 떨며 울 것같았다."
이 일을 겪고나서 15살의 유분자는 일약 명목상 지위가 가장 높은 황제가 된다.
사람은 스스로를 알아야 하고, 진퇴를 알아야 한다. 평생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성을 잃어서 속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유분자는 보통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여 이성을 잃지 않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사였던 유협경(劉俠卿)에게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번숭은 유분자가 이렇게 멍청한 것을 보자, 유분자의 명의로 장수들에게 직위를 내리고, 유분자를 유협경에게 관리감독하도록 넘기고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사실상 번숭등이 필요로 한 것은 그저 겉으로 내세울 명분이었다. 유분자를 책봉하거나 유효를 책봉하거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만일 유분자가 제 분수도 모르고 까불었으면 분명 처리당했을 것이다.
유분자가 그냥 길상물처럼 궁궐에 틀어박혀서 잘먹고 잘살면 그에게 행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적미군이라는 이 풀뿌리영웅들은 법도를 지키는 명문집안사람들도 아니었다. 장락궁에 자리잡은 후 각로 장수들은 자주 한 자리에 모이는데, 서로 공을 다투고 심지어 칼을 뽑아들어 휘두르기도 했다.
바깥의 병졸들은 전내에서 소란이 벌어지면, 직접 뛰어들어와서 자신의 장수를 보호한다. 금란전이 염왕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유분자는 명목상의 최고지도자이지만, 그저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멈추라'는 말조차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장수의 칼이 미끄러져서 자신의 목을 치지나 않을까 겁내고 있을 뿐이었다.
유분자는 매번 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두려움에 떤다. 한낮에도 식은 땀으로 온 몸이 젖는다. 좌우의 시종들은 모두 유분자를 동정했다. 다행히 유분자는 나중에 자시의 형인 유공(劉恭)을 만난다.
유공은 어려서부터 <상서>를 공부했고, 경시제 유현을 따르며 시중(侍中)을 맡았을 정도로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 그는 적미군의 내부가 이렇게 혼란한 것을 보고,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 예견한다. 유분자가 불측의 사태를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유공은 암중으로 동생에게 어떻게 황위를 양위할 것인지를 알려준다. 유분자는 일찌감치 이 목숨을 위험하게 만드는 황위를 내던지고 싶었다. 형의 가르침을 받은 후 열심히 노력했고, 마침내 아주 좋은 기회를 맞게 된다.
건세(建世) 2년 정월초하루, 번숭등 장수와 대신들이 새해를 축하하는 연회를 연다. 유분자는 어좌(御座)에서 걸어내려와, 황대자(黃帶子)를 풀고 옥새(玉璽)를 내놓았다. 그리고 신하들 앞에서 여러번 머리를 숙이며, 비통한 표정으로 애걸한다: "여러분이 나를 황제에 앉혔다. 그러나 과거와 마찬가지로 폭력을 행사하고 강탈을 한다. 이런 일이 사방에 퍼져가서, 모두 우리를 믿지 않고 있다. 보기에 황제를 잘못 뽑은 것같다. 여러분들에게 간청하건대, 나는 이 자리를 떠날테니 길을 막지 말아달라."
유분자는 어쨌든 명목상의 황제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번숭등은 일시에 대체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비록 흥이 깨지기는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앞으로 나가서 소리높여 몇 마디 외친다: "신등이 법도를 어겼습니다. 폐하의 뜻을 어겼습니다. 앞으로 반드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몇명의 힘센 장수들이 유분자를 끌어안아 그에게 황대자를 다시 채우고, 옥새를 바친다.
유분자라는 이 괴뢰황제는 적미군이 패망하고나서야 비로소 퇴위할 수 있었다.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그가 동족인 것을 감안하여 죽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를 자신의 숙부에게 넘겨서 궁정금위관을 맡도록 안배한다. 나중에 유분자가 병으로 실명하게 되자, 광무제는 명을 내려 형양(滎陽)의 관전에서 나오는 조세를 유분자에게 준다. 그가 죽을 때까지.
유분자는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난세에 우연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몇년간 가슴을 졸이며 살았는데, 마지막에는 순조롭게 자리에서 물러났고, 광무제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는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은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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