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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중화제일가 왕푸징(王府井)의 시대변천사

by 중은우시 2014. 10. 24.

글: 홍촉(洪燭)

 

 

 

 

왕푸징대가에는 확실히 우물(井)이 하나 있다. 지금은 이미 쇠줄을 둘러 막아놓고, 굴로 만든 덮개(마치 커다란 동전같다)를 덮어 놓았지만...필자는 관련사료를 찾아보지는 못했다. 이 유명한 우물이 도대체 어느 왕부의 우물이었는지는. 그 왕야는 절대로 상상하지 모샜을 것이다. 온 식구가 마시는 물을 긷는 우물이 나중에 유명한 상업거리의 특징과 부호가 될 줄은. 왕푸징 주위만 하더라도 여러 개의 왕부(王府)가 있어서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순치연간의 섭정왕 도르곤의 예친왕부(睿親王府)이다. 난츠즈(南池子)의 북쪽에 있다. 어떤 사람은 당시의 실질적인 통치중심은 자금성에 있지 않고 섭정왕부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칠재금등귀장악(七載金滕歸掌握), 백료차마회남성(百僚車馬會南城)"의 휘황한 장면을 연출하였다.

 

1. 필자가 아직 외지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 <헝더리부영(亨得利斧影)>이라는 탐정소설을 읽은 바 있다. 내용은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유일한 교육적 의미는 바로 필자로 하여금 일찌감치 북경에는 왕푸징이 있고,왕푸징에는 "헝더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북경으로 이사오고 나서, 왕푸징은 반드시 구경해야하는 곳이 되었다. 걷고 걷다가 헝더리시계점(亨得利鍾表店)앞까지 갔다. 그 순간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았고, 그 먼 기억 속의 탐정소설이 생각났다. 헝더리는 과연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나를 계속하여 기다려온 것처럼.

 

나는 데쟈뷰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내가 예전에 와본 곳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그 허구의 소설이야말로 현실의 사명을 진정으로 완성시켜주어서, 나를 낯설면서도 익숙한 곳으로 데려와준 것이 아닐까.

 

비록 시계점의 주인, 직원 그리고 드나드는 고객들이야 그 유명하지도 않은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았겠지만. 이것은 그저 나 한 사람의 비밀이다. 꿈 속의 헝더리와 생활 속의 헝더리가 마침내 중첩되었다. 생활 속의 헝더리는 마찬가지로 꿈 속의 왕푸징을 확인시켜주었다. 그저 배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현실주의의 거리였다. 양 켠에는 점포들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은 많이 오간다. 나와 나의 그 마음은 금방 새로운 시대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으로 뒤덮여 버린다.

 

헝더리의 시계는 여전히 아주 딱딱하게 가고 있었다. 시침, 분침, 초침이 교차하면서 앞으로 나간다. 비록 일찌기 몇번 멈춘 적은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헝더리는 자신의 방식으로 왕푸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왕푸징을 돌아다니면, 나의 귀에는 항상 시계의 똑딱성이 들린다. 정말 이상하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의 경적, 상인의 호객성, 관광객의 웃음소리보다 멋있고, 더욱 진실하다. 나는 그것을 왕푸징의 심장이 뛰는 소리라고 여긴다. 아주 오래된 심장이 뛰는 소리.

 

왕푸징의 오래된 전통점포는 헝더리 하나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나는 헝더리에서 전자시계를 사보았을 뿐아니라, 성시푸(盛錫福)에서 차양모(遮陽帽)도 샀고, 통성허(同昇和)에서 헝겊신(千層低懶漢靴)을 사기도 했으며, 심지어 다밍(大明)안경회사에서 선글라스를 맞추기도 했다. 타오샹춘(稻香村)의 케익,과자는 더더구나 맛을 보았다.

 

필자에게 있어서 왕푸징을 한바퀴 도는 것은 쇼핑이 목적은 아니다. 더욱 주요한 것은 그 고박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이다(마치 사람의 바다에서 아가미로 호흡하는 것같은). 일련의 오래된 전통점포들을 순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나의 마음은 품안에 든 지갑의 돈보다도 풍성해진다.

 

"문혁"기간동안 헝더리는 수도시계점(首都鍾表店)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성시푸는 홍기모점(紅旗帽店)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통성허는 장정혜점(長征鞋店)으로 이름을 바꾸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떼어냈던 점포편액은 다시 걸렸다. 백성들도 모두 이미 습관이 되어서 바꾸어 부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서 바꿀 필요가 있겠는가?

 

2. 민국4년(1915년), 원세개(袁世凱)는 왕푸징의 이름을 "모리슨대가(莫里遜大街)"로 바꾸게 명령했다. 왜냐하면 영국의 <타임지> 주북경기자인 조지 모리슨이 길의 서쪽 100호(지금의 271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원세개를 추켜세워준 바 있고, 나중에 북양정부의 정치고문이 된다(1919년 북양정부대표단고문의 신분으로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한다). 그러나 왕푸징은 절대로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비록 서방인사들은 습관적으로 모리슨거리라고 부르지만, "북경의 백성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이 거리를 왕푸징거리라고 불렀다. 1948년 북평해방전날, 원래 왕푸징대가 남쪽입구에 세워진 영문으로 쓴 모리슨대가의 표지판은 백성들에 의하여 쓰러뜨려져서 쓰레기더미에 던져진다."(왕영빈의 말)

 

3. 왕푸징은 백성의 것이다. 백성들이 부르고 싶은대로 부르면 되는 것이다. 왕푸징이 왜 왕푸징인지에 대하여는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이곳에 원래 왕부(王府)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찌기 우물이 있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지 왕부는 일찌감치 사라졌고, 우물도 "위치가 불명"이다. 어떤 사람은 전 공예미술복무부의 문앞에 있는 길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경제일보사 원내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관련부서는 확실히 천주교회당의 대각선으로 큰길 건너편에서 우물 하나를 발굴해낸다. 새로 덮개와 난간을 만들고, 문자로 설명을 덧붙였다. 다만, 원래의 왕주의 우물의 유적인지 아닌지는 담보할 수가 없다.

 

그 유명한 우물은 사람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같다. 혹은 시간이 사람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같다.

 

일찌기, 북경의 후통(胡同, 골목)에는 적지 않은 관정(官井)이 있었다. 각각의 집에서는 스스로 길어서 쓰고 서로 다투지 않았다. 나중에 돈있고 권세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집안에 우물을 파고 우물은 일꾼이 관리했다. 그들은 사람을 시켜 물을 긷게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물을 보내주면서 "정조(井租)"를 받았다. 오래되다보니, 물을 긷는 일꾼은 우물주인의 돈과 권세를 의재해 그 지역의 '수패(水覇)'가 된다.

 

거리의 남단 서쪽에는 아직도 대,소첨수정후통(甛水井胡同)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이름 뿐이다. 우물은 이미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역사자료에 상응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청나라때의 주일신(朱一新)이 지은 <경사방항지고>에는 확실하게 '왕푸징'에 '우물 두개'가 있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우물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왕부의 우물이 도대에 어느 것인지는 잘 모르게 된 것이다.

 

다다익선. 아마도 왕부의 우물은 원래 하나만 가리키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우물물이 달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소첨수정후통을 탐사하면서 나는 발걸음을 조심했다. 혹시 꿈을 깰까봐 겁났기 때문이다. 후통 자체는 몽골어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북경성안에 후통이 밀집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우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어떤 곳은 이미 메워졌고, 어떤 곳은 버려졌다. 어쨌든 대다수는 이미 명존실망(名存實亡)이다. 보편적으로 상수도를 설치하는 시대에 우물은 이미 유물이 되었다. 혹은 고전의 상징이 되었다. 우물은 이미 마시른 물의 용도가 아니다. 그것의 진정한 효능은 심미(審美)이다.

 

"우물물이 있는 곳이면 유사(柳詞)가 있다"는 말은 원래 송나라때의 사인 유영(柳永)을 칭송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화하자면 우물이 있는 곳에는 인정이 있고, 우물이 있는 곳에는 세상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 될 것이다.

 

북경의 후통은 통계를 내기 어렵다. 북경의 우물은 도저히 계산해낼 수 없다(우물 정자가 붙은 후통만 백개가 넘었다). 그들은 모두 잊쳐진 골목에 버려진 물건들이다. 계속하여 파괴되고,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다. 우물이 몰락하면서, 나는 후통의 운명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쓰러지고 단지 상징적인 지명만 남길 것이다. 분명 어느 날, 줄지어 서 있는 고층건물들에 무슨 후통이라는 편액은 걸고 있지만, 이미 후통이라는 모습과 기상은 없어져 있을 것이다.

 

왕푸징이 그러하지 않은가? 왕부가 보이지 않을 뿐아니라, 그 오래된 우물은 더더구나 찾을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짝퉁을 가져다가 대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북경의 우물은 이미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약간은 남긴 것도 대단한 실적이다. 물은 이미 모두 말랐지 않는가. 첨수정, 첨수정은 신화와 같다. 아무리 달아도 길거리에 가득한 스프라이트나 콜라만은 못하지 않겠는가. 공업화된 소프트음료가 있으면 사람들은 전원을 느낄 수 있는 우물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관광을 위하여 발굴한 그 '왕부정'에는 구리로 주조한 덮개에 전고를 해석하는 내용을 써놓았다. 나는 어떻게 읽어도 이것이 북경 우물의 영광스러운 집단묘비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경의 우물은 이미 죽었다!

 

원나라때, 명나라청나라때, 전체 북경성은 모두 우물에 의존해서 마시고 윤택해질 수 있었다. 전체 북경성은 그저 방대한 우물 덮개와 같았다.

 

북경의 우물중에서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왕푸징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이미 추상화된 지명으로 변했다. 이미 고갈되었을 뿐아니라, 우물의 위치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생명의 원천이다. 그것은 또 다른 형식의 우물(상업)이 북경의 후예를 먹여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북경의 창' 내지 '중화제일가'라고 부른다.

 

4. 사업이 번창하고 사해와 통하며 재물이 흥성하는 왕푸징거리는 확실히 유명하다. 여기의 이름에 원시적인 근거를 제공한 왕부와 우물은 차례로 사라졌다. 그리고 철저히 전설로 남았다. "이곳은 원래 왕부의 저택이었다. 왕부에 유명한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당시 우물의 위에는 정교하고 영롱한 육각정자가 있었다. 우물의 입구에는 큰 돌을 파서 둥근 구멍을 만들었다. 정연(井沿)은 아주 높았다. 우물의 남쪽이 바로 왕부대원이다. 아주 컸다...."(조지충 <북경의 왕부와 문화>)

 

왕푸징의 현실은 '왕부정'의 전설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필자는 한 때 왕푸징의 왕부가 명나라때 것을 말하는지, 청나라때 것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 우연히 <명태종실록>을 뒤적이다가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황성의 동남쪽에 황태손궁(皇太孫宮)을 만들고 동안문 밖에 십왕저(十王邸)를 지었다. 집이 팔천삼백오십영(楹)이었다. 영락15년 6일에 공사에 착수하여, 완공했다."  왕푸징에는 명나라대 10명의 친왕(親王)의 집단숙사가 있었다. 친왕의 왕부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십왕부의 위치는 지금의 오리구이집이 있는 수부후통(帥府胡同)에서 장안가 일대라고 한다. 명나라때는 십왕부(十王府) 혹은 십왕부가(十王府街)라고 불렀다고 한다. 청나라때는 왕부대가(王府大街)라고 부른다. 왕푸징거리(王府井大街)의 이름은 이렇게 얻은 것이다.

 

5. 십왕부가 위치를 동안문 밖으로 잡은 것은 분명히 영락황제가 그렇게 하사한 것일 것이다. 동안문은 황성의 동문이다. 이 십왕부는 '황성근(皇城根)'에 속한다. 황성근의 아래에는 귀족이 많았다. 동안문은 1912년 '임자사변(壬子事變)'때 불에 타서 없어진다. 남단의 황성성벽은 1917년에 철거된다. 성은 이미 사라졌고, 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동안시장만이 사람들의 기억을 환기시킬 분이다. 동안시장(東安市場)의 원래 위치는 청나라초기의 왕부였다. 누구의 왕부였을까?  바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의 왕부였다. 오삼계는 순치제에 의하여 평서왕에 봉해지고 그의 저택은 아주 호화스러웠다.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패가망신한다. 한때 위세등등했던 평서왕부는 자연히 액운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뿌리가 뽑히게 된다. 평지가 된 후에 팔기병 신기영에 넘겨주어 훈련상으로 삼는다. 아쉽게도 '평사왕' 자신이 마지막에는 '평정'되고 말았다. 왕부의 유지에는 여기저기서 데려온 일군의 병사들이 주둔하게 되었다.

 

광서29년(1903년), 원래 왕부대가의 양측에서 노점상을 열고 있던 소상인들을 모조리 모아서 이비 버려진 신기영 훈련장에 수용하여 통일적으로 관리하게 되었고, '동안시장'이라 명명한다. 동안시장이라는 말은 동안문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황성근의 덕을 조금 보아 장사가 잘된다. 선통원년(1909년)의 <경화백이죽지사>에는 그 성황을 기록하고 있다: "신개각처시장관(新開各處市場寬, 매물수심불비난(買物隨心不費難), 약론번화수일지(若論繁華首一指), 청군성내부동안(請君城內赴東安)".(새로 각지에 연 시장들이 널찍하고, 물건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힘들지 않다. 만일 가장 번화한 곳을 꼽으라면, 성안의 동안시장에 가보시오). 이 시에는 부주(附注)도 붙어 있다: "각처에 시장이 만들어지는데 가까이사는 주민이 구매한다. 동안시장은 물건이 많고 시장이 번화하여, 특히 흥성했다" 이를 보면 대청제국의 시장경제는 처음에 이곳에서 불이 붙었던 것같다.

 

지금 왕푸징을 가면, 더이상 노점상(속칭 雨來散)은 볼 수가 없는 동안시장이다. 이제는 현대화된 '신동안시장'의 건물이 높이 서서 이를 대체하고 있다.

 

청나라말기 왕푸징 거리는 동안시장에 의지하여 흥성한다. 여기에 남쪽의 동교민한 대사관구역과 인접하여 서양인들의 돈을 벌기에 수월했다. 마찬가지로, 왕푸징은 다른 곳의 상점들보다 수입물건을 더 많이 판매했다. 예를 들어, 헝더리는 주로 스위스의 유명시계, 롤렉스, 론진, 오메가같은 것을 팔았다.

 

왕푸징의 명나라 십왕부는 이미 신기루가 되었다. 버려진 십왕부 유지에 청나라 옹정제때 현량사(賢良寺)를 만든다.

 

왕부는 벽돌 하나 기와장 하나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왕푸징거리는 이렇게 유명하다.

 

6. 기실 왕부가 생기기 전에도 이 거리는 존재했다. 원말명초의 웅몽상(熊夢祥)이 지은 <석진지(析津誌)>를 보면, 원나라때 명칭이 "정자가(丁字街)"였다. 주로 지금의 등시구(燈市口)에서 금어후통(金魚胡同)의 구간이다. 이 구간을 민국시대때는 '팔면조(八面槽)'라고 불렀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길중간에 청나라때 유물인 팔각평의 수조(水槽)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남북을 오가는 상인들의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때 물건을 싣고 나르든 당나귀나 말(아니면 비단을 싣고 온 낙타)는 머리를 숙여서 달콤한 우물물을 마셨을 것이다.

 

도시와 시골을 부지런히 오가던 당나귀나 말에 있어서, 이 거대한 수조는 바로 북경의 표지였을 것이다. 그것은 가장 좋은 길 한가운데의 화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우물은 동물들에게 물을 먹디던 수조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통한통 메고 오기가 얼마나 귀찮았겠는가.

 

지금 우물도 이미 사라졌지만, 수조도 남아있지 않다.

 

원래 수조를 놓았던 곳에는 교통을 지휘하는 경찰이 서 있다. 그는 차량을 오가게 할 수는 있지만 멀리 있는 말무리를 부를 수는 없다. 지나간 모든 일들은 그저 세월이 지휘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