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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석륵(石勒): 영웅불문출처(英雄不問出處)

by 중은우시 2018. 12. 30.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 석륵은 일자무식한 노예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중원의 주인이 되고, 나라를 세워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역사에 일름을 남긴다. 그가 건립한 후조(後趙)정권은 도광검영가운데 30년간이나 존속하였다. 이것은 전설이고, 중국역사뿐아니라, 세계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석륵은 274년에 태어났고, 흉노의 별부(別部)로 갈족(羯族)이다. 석륵은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 글자를 못읽었다. 처음에는 성씨조차 없었다. 그저 단명(單名)으로 "굉(訇)"이었다. 14살대, 석륵은 부족사람을 따라 '낙양으로 장사를 하러 다닌다." 한가할 때는 동문에 올라서 소리를 쳤다. 이 점은 어느 정도 영웅의 기개가 보인다. 서진황실의 친척인 왕연(王衍)은 석륵을 본 후에,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큰 뜻이 있는 것같다. 남겨두면 천하에 후환을 남길 것같다"고 여기고, 사람을 보내어 붙잡으려 한다. 석륵은 아주 기민했다. 약간의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자 바로 도망친다. 얼마 후에 '팔왕의 난'이 일어난다. 서진이 종실은 권력다툼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태안 연간에 북방일대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다. 천재인화로 석륵은 부득이 부족사람들과 흩어져, 안문으로 가서 영구(寧驅)에 의탁한다.


석륵은 어려서부터 외지를 떠돌다보니, 좋은 몸을 가지고 있었고, 무술도 뛰어났다. "자라면서 몸이 건장하고 담력이 있었다. 무예를 잘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서진 북택도위(北澤都尉) 유감(劉監)은 석륵을 붙잡아서 돈받고 팔고자 한다. 그러나 영구가 암중으로 보호해주는 바람에 붙잡혀가지 않을 수 있었다. 나중에 석륵은 도망가는 도중에 곽경(郭敬)을 만난다. "울면서 절을 하며 춥고 배고프다고 말한다. 곽경은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가지고 있던 죽을 그에게 먹인다. 그리고 의복도 주었다." 당시 병주자사 사마등(司馬騰)은 "호족을 붙잡아 산동에 팔아서 군비로 썼다. 사마등은 장군 곽양, 장륭에게 호족을 잡아서 기주로 보내게 한다." 스무살이 조금 넘은 석륵도 같이 붙잡힌다. 곽양, 장륭은 사고가 날까 우려하여, 붙잡은 호인들을 모조리 묶어서 칼을 채운다. 그리고, '두 호인을 한 칼에 채운다' 그리고 "여러번 장륭에게 모욕을 당한다." 적지 않은 호인들은 도중에 굶어죽는다. 석륵이 당한 고초가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곽경은 석륵이 가련하다고 보고, 형인 곽양을 찾아가서 여러번 사정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석륵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기주로 가는 길에서 굶어죽지 않았던 것이다.


기주(冀州)에 도착한 석륵은 피로하여 잠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나보니, 석륵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이미 "임평 사람 사환(師歡)의 노예로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예로 전락한 후, 석륵은 자유를 잃었다. 매일 하는 일은 '밭에 나가서 경작하는 것이다." 사환은 지주이지만 그래도 인자한 편이었다. 나중에, 석륵의 신세내력을 들고, 다시 석륵이 의표가 당당한 것을 보고 자비심이 들어 그를 풀어준다. 이렇게 하여 노비에서 다시 평민으로 되고, 석륵은 자유를 회복한다. 그러나, 일이 없으니, 먹을 것도 없고, 다시 위기에 처한다. 사환의 집 근처에는 마장(馬場)이 하나 있었는데, 석륵은 갈 곳이 없자, 그곳에 가서 자신이 말을 잘 본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장에 들어간다. 마장의 주인은 급상(汲桑)이다. 새로운 일도 석륵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얼마 후, 석륵은 무안(武安)에서 일을 하다가, 떠돌이군인들에게 붙잡힌다. 다행히 이때 한 무리의 사슴이 지나가서 군인들이 사슴을 쫓아가느라, 석륵은 풀려날 수 있었다.


매번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오면서, 석륵은 한 가지 이치를 확실히 깨닫는다: 난세에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반드시 무리를 끌어모아야 한다. 운명의 주도권을 쥐기 위하여, 석륵은 사방에서 병마를 끌어모은다. 그리하여 18명으로 된 기병대를 조직한다. "십팔기(十八騎)"라고 불렸다. 영흥2년(305년), 공사번(公師藩)이 수만의 무리를 모아서 거병한다. 급상과 석륵은 수하들을 이끌고 공사번의 군대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반진(反晋)의 깃발을 들었다. 석륵이 들어가서 얼마 지난 후, 전대독(前隊督)에 임명된다. 하급두목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휘황한 군인생애가 시작된다. 전투과정에서 석륵은 '십팔기'를 골간으로 하여, 다시 망명지도를 글어모아 용맹한 부대를 조직한다. 당시 석륵은 아직 '석륵'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급상이 그의 상사의 신분으로 모든 것을 주도했는데, 그가 "석을 성으로 하고, 륵을 이름으로 하라"고 하여 석륵은 성과 이름을 갖게 된다.


영가원년(307년), 석륵은 유연(劉淵)의 휘하로 들어간다. 독산동정토제군사(督山東征討諸軍事)로 임명된다. 그의 병사들도 점점 강성해진다. 이어진 1년동안 석륵은 가장 많이 싸웠다. 또한 전과가 가장 풍성한 한해였다. 1년동안, 전후로 위군, 급군, 돈구, 업성, 조군, 중구를 함락시켜, 명성을 널리 떨치고, 부하가 10만에 달한다.


석륵이 보기에, 한인의 지반에서 무언가를 이뤄내려면, 반드시 한인의 문화와 지력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얼마 후, 석륵은 수하에 있는 한족병사들을 끌어모아서, "군자영(君子營)"을 결성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하여 우대정책을 편다. 나중에 석륵은 다시 장빈(張賓)을 참모로 받아들이고, 그를 아주 존중하며, 그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 이후 수년간, 석륵은 계책을 써서, 전후로 왕준(王浚)을 붙잡아 죽이고, 유곤(劉琨)을 좇아냈으며, 서진의 북방 잔여세력을 철저히 소멸시킨다. 태흥3년(319년), 석륵은 조왕(趙王)을 자칭하고, 후조정권을 건립한다. 도성은 양국(襄國, 지금의 하북성 형대)으로 한다.


석륵이 건국한 후, 장빈등의 보좌하에 점차 정치제도를 건립한다. 하나는 호구를 정리하고, 세금을 정하며, 농상을 장려하여, 전란으로 파괴된 경제를 부흥시키고, 둘은 학교와 태학을 세워 교육을 창도하고, 셋은 역대 율령을 정리하여 <신해제도>를 제정한다. 이를 통해 사회질서를 안정시킨다. 넷은 관료기풍을 정돈하여, 청백리를 장려하고 탐관오리를 징치한다. 위진이래의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추천과 시험의 방식으로 각급관리를 선발 임용한다. 도잇에 동진에 대하여 목린(睦隣)정책을 실시하여, 동진의 변방사령관 조적(祖逖)의 하북에 있는 조상묘를 조리해주고, 동진을 배반하고 투항한 장수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그 수급을 조적에게 보낸다. 이리하여 양국의 변방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잠시 평안하게 살게 된다. 후조 태화원년(328년), 석륵은 전조(前趙)황제 유요(劉曜)를 붙잡아 죽인다. 그리하여 연조(燕趙)지역을 완전히 통일한다. 태화3년(330년), 석륵은 황제를 칭한다. 옛날에 노예로 있었던 갈족 청년이 결국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인생에서 성공했지만, 석륵은 과거를 잊지 않았다. 시종 겸허하고 근신한 태도를 유지했다. 후조가 건립된 초기에 석륵은 금의환향한다. "친히 고향사람들과 앉아서 환담하며 같은 음식을 먹었고, 전혀 황제의 오만한 태도가 없었다. 석륵은 일찌기 이웃 이양과 마지(麻池)를 놓고 싸운 적이 있는데, 석륵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이양이 고의로 자리를 피한다. 그러나, 석륵이 "내가 옛날에 너의 주먹을 많이 맞았는데, 너도 나한데 주먹을 많이 맞지 않았느냐"고 하며 옛날의 앙금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이양을 참군도위로 임명한다. 수성장병들이 제대로 일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그리고 법을 어기고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석륵은 잠에 미행을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수문장사 왕가(王假)가 붙잡으려 한다. 시종이 달려와서 연유를 설명하고서야 끝난다.


석륵은 호인이지만 한인에 비교적 관대했다. 건국후, 그는 호인들이 한족에게 의관을 바꾸라고하지 못하게 엄명한다. 한번은 한족신하 번원(樊垣)이 입궁할 때, '의관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석륵이 연유를 묻자, 반원은 막 '무도한 갈적(羯賊)을 만나, 재물을 다 빼앗겼다"고 말한다. 석륵은 원래 '호(胡)'라는 말을 싫어했고, 더더구나 '갈적'이라는 말은 듣기 싫어했다. 번원은 일시에 화가 나서 석륵이 바로 '갈적'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는 말을 내뱉고 나서 놀라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석륵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웃으면서 사죄한다. "갈적이 그대의 재물을 강탈했구나. 내가 보상해주겠다." 그리고 '수레와 말 의복 삼백만어치'를 하사한다. 호인은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양식을 소비했다. 석륵은 '백성들이 이제 막 농사를 다시 짓기 시작하여 재산이 많지 않음'을 이유로 '술을 양조하는 것을 금지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모두 예주(醴酒, 단술)를 쓰라'고 한다. 그 결과 여러해동안 술을 만들지 못했다. 중원지역은 수십년의 전쟁을 겪으면서 인구가 줄어들어있었다. 어느 집에 쌍둥이사내아이를 낳으면 석륵은 바로 상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곤 했다. 당영사람 인저의 처가 한꺼번에 사내아이 세쌍동이를 낳자, 옷과 음식을 내리고, 유비(乳婢)도 한 명 보내준다. 이는 역사상 드물게 보는 경우이다.


석륵이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정은 '고시'제도를 만든 것이다. '군국에 학관을 세우고, 매 군에 박사제주 2인을 두며, 제자 백오십명을 두며, 세번 시험에 합격하면 졸업하고, 관직을 맡을 수 있다." 학생이 삼단계의 시험에 합격하면 졸업하고 국가의 간부후보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세번 시험을 보는' 방식은 나중에 향시, 회시, 정시의 전신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중국의 과거제도의 맹아단계는 바로 석륵이 그 씨를 뿌린 것이고, 물을 준 것이다. 대가 교육을 발전시킨 외에, 석륵 본인도 학습을 중시한다. 석륵은 글을 몰라서 책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지름길을 선택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는 것이다. "석륵은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여러 학생에게 책을 읽게 하고 듣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석륵이 누가 <한서>를 읽어주는 것을 듣는데, 역이기가 유방에게 육국의 후인들을 제후로 세우라는 건의를 듣고 깜짝 놀란다. 이렇게 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구나! 그 다음에 장량이 반대하는 건의를 한 것을 듣고는 '이것때문이구나'라고 한다. 다행히 장량이 있었다. 석륵은 비록 학문은 없었지만, 고금의 득실을 얘기할 때는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었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할 정도였다.


석륵은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릇 정치가는 말년에 항상 자신의 공과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혹은 전대황제와 비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후조 건평3년(332년), 석륵은 연회를 베풀어 고구려, 우문옥고(宇文屋孤)의 사신을 접대한다. 기분좋게 마셨을 대, 석륵은 근신 서광(徐光)에게 묻는다; "네가 보기에 내가 전대의 어느 황제와 나란히 비교할 만한가?" 서광은 이렇게 대답한다: "폐하는 유방보다 강하고, 황제(黃帝)의 바로 다음갑니다." 석륵이 말했다: "사람은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한다. 네가 말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 내가 만일 유방을 만났다면 당연히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칭신했을 것이다. 만일 유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와 나란히 중원을 달렸을 것이고, 누가 이겼을지는 아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재주는 유방보다는 아래이지만, 유수보다는 낫다." 그의 한 마디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만세를 불렀다. 석륵이 집권한 기간동안, 자신에 엄격했고, 잘못을 저지르면 바로 고쳤다. 그리고 여러번 신하들에게 직언하도록 격려한다. 그리하여, 석륵이 황제로 있느 동안, 정치는 맑고 깨끗했다. 민심도 그를 따랐다. 위진이래 보기 드문 새로운 기상이 출현했다.


후조 건평4년(333년) 육월, 석륵이 병석에 눕는다. 백성을 괴롭히지 않기 위하여, 석륵은 명을 내린다: "삼일장을 하고, 내외신료들은 장례를 마치면 상복을 벗어라. 결혼, 제사, 음주, 육식을 금하지 말고, 변방을 지키는 방수들은 장례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 평상시에 입던 옷으로 염을 하고, 평상시에 타던 가마에 싣고, 금은보화는 부장품으로 넣지 말고, 기물도 넣지말라." 이렇게 백성들을 생각해주는 군주는 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물다. 칠월, 석륵이 병사한다. 재위15년이고, 향년 60세이다. 묘호는 고조라 한다.


300년후, 방현령이 <진사(晋史)>를 편찬하면서, 석륵을 높이 평가한다. "이웃의 적도 그의 위명을 두려워하여 돈을 바쳤고, 절역(絶域)에서도 그의 기풍을 이어 공물을 바쳤다." 설사 고대에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린 군주라 하더라도, 석륵보다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국황제로서 석륵은 '흉잔(凶殘)'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는 '일시걸야(一時傑也)'에 부끄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