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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희휘(郗徽): 황제의 구혼을 거절하고 신동과 결혼했는데, 20년후 그 신동이 황제에 오르다.

by 중은우시 2018. 12. 25.

글: 격와랍(格瓦拉)





납북조시대는 극도의 난세이다. 시국이 불안했지만 이에 따라 기인이사도 계속 나타났다. 이들 중에서 남량(南梁) 덕황후(德皇后) 희휘의 인생은 감히 전설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희휘는 어떤 전설적인 경력을 지녔을가? 그녀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희휘는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희엽(郗燁)은 유송(劉宋)에서 관직이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올랐고, 모친은 송문제(宋文帝)의 달인 심양공주(尋陽公主)이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심양공주가 희휘를 임신했을 때, 꿈속에서 자신이 아들을 낳았으나, 실제로는 딸을 낳았다고 한다. 희휘가 출생했을 때, 방안에는 붉은 빛이 비치고, 모든 기물이 아주 빛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희씨집안의 남녀는 모두 놀라워했다.


희엽은 이것이 복인지 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사(相士)를 부러 길흉은 점치게 한다. 그 결과 상사는 희휘의 몸에는 광채가 빛나서 나중에 방해가 될 것이니 물가에서 발제의식을 해야만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희엽은 그 말을 믿고 시키는대로 했다. 과연 그 후에 집안이 평안무사했다.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희휘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아주 총명했다. 역사서, 문학서를 읽기를 좋아할 뿐아니라, 예서도 멋지게 썼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의 필수과목인 바느질도 아주 능숙하게 해냈다. 정말 수외혜중(秀外慧中)의 보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다재다능한 여자였다.


희휘가 10살이 되기도 전에, 어린황제 유욱(劉昱) 즉 송후폐제(宋後廢帝)의 눈에 들어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려 한다. 그러나 희엽은 그가 혼폭잔인(昏暴殘忍)한 것을 보고 딸이 너무 어리다는 것을 핑계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남제(南齊) 초기,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의 조가치자, 안륙왕(安陸王) 소면(蕭緬)이 희휘에게 반해서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려 한다. 그러나 희씨집안에서는 희휘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하여 거절한다. 마지막에 희휘는 당시에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듣던 소연(蕭衍)을 마음에 두게 되고, 둘이 결혼을 하여 부부로 된다.


소연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고, 독서를 좋아했다. 그는 박학다식한 소년이었다. 특히 문학방면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대학자 심약(沈約)등 7명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라 칭해졌다. 이들은 경릉왕 소자량(蕭子良)의 문하에서 모여 글을 짓고 노래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희휘는 시집을 간 후에 부군과 시를 논하고 부를 짓고 부창부수하며 공통의 주제가 있었다. 그래서 관계는 아주 친밀했다.


희휘가 비록 소연의 사랑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연속으로 딸만 3명을 낳고,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만다. 고대에는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말이 있다. 희휘가 계속하여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미 서른이 넘은 소연은 가족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옹주자사로 있는 동안, 평범한 집안출신의 관리 정도천(丁道遷)의 딸 정령광(丁令光)을 첩으로 들인다. 그렇게 하여 아들을 하루빨리 낳기를 바랬다.


희휘는 비록 총명하고 다재다능했으나 질투심이 강했다. 비록 남편이 첩을 들인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질투심에 불탄 희휘는 소연이 다른 여자를 안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령광은 소연에게 시집온 후에 희휘에게 갖은 괴롭힘을 당한다. 걸핏하면 욕을 하고 하인부리듯이 부렸다. 소연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관청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희휘는 정령광을 학대한다. 그녀에게 매일 쌀 오곡(斛)을 갈도록 시켰다. 이렇게 힘든 일을 시켜서 그녀의 마음을 지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정령광은 매번 짧은 시간내에 시킨 일을 마치곤 했다. 그래서 희휘는 이상하게 여긴다. 정령광은 희휘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조심조심하며 그녀를 모셨다. 시간이 흐르자 희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악유악보(惡有惡報)인지 정령광이 들어온지 2년후에 희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32살이다. 당시는 남제 영광원년(499년)이었다. 사랑하는 처가 죽은 후, 소연은 애통해 마지 않았고, 여러 해가 지난 후까지도 잊지를 못했다. 2년후, 소연은 남제의 강산을 빼앗아 남량을 건립한다. 사랑하는 처 희휘를 추념하기 위하여, 그녀를 황후로 추존하는 동시에 그후에 황후를 세우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희휘는 죽은 후에 용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후궁의 우물 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자주 남편의 꿈 속에 나타났다고 한다. 매번 소연이 병이 들 때면, 우물물이 격렬하게 요동쳤는데, 그것이 바로 희휘가 현령한 것이라고 했다. 소연은 처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궁전을 만들어 우물을 둘러싼다. 그리고 희휘가 즐겨입던 의복을 전내에 놓아둔다. 그리고 은으로 만든 녹로, 금으로 만든 병에 각종 맛있는 음식을 담아서 제사지냈다. 그후에는 궁안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이것도 기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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