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모용(慕容), 탁발(拓跋), 우문(宇文): 선비족(鮮卑族)의 삼국연의

중은우시 2019. 3. 20. 23:37

글: 금색연화554(金色年華)


진한(秦漢)시기에,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은 흉노(匈奴)와 동호(東胡)의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한나라초기, 흉노가 전성기를 이루고, 동호족은 흉노의 모돈선우(冒頓單于)에게 패배하여, 두 부로 나뉜다. 오환산(烏桓山)에 거주하던 동호는 오환이라 부르고, 선비산(鮮卑山)에 거주하던 동호는 선비라 부른다. 둘은 모두 흉노의 지배를 받았다.


91년, 두헌(竇憲)이 금미산(金微山)에서 북흉노를 대파하고, 이때부터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주하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부한다. 북흉노는 사상유례없는 민족대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광활한 대초원은 흉노이후 오환과 선비의 천하가 된다. 207년, 조조가 오환을 멸망시키고, 선비족이 몽골대초원을 통일한다.


서진(西晋) 영가5년(311년), 흉노인인 유총(劉聰)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회제(晋懷帝)를 포로로 잡아서 데려간다. 역사에서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그후 진나라황실은 의관남도(衣冠南渡)하여, 북방은 오호십육국이 서로 쟁탈하는 전쟁터로 바뀐다.


선비족은 바로 이 시기에 축록중원의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제1차는 모용씨(慕容氏)이다


조위 초기, 선비 모용부는 수령 막호발(莫護跋)의 통솔하에 요서(遼西)로 이주한다.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멸망시킬 때 공을 세워, 조정에서는 솔의왕(率義王)에 봉한다. 이때부터 극성(棘城, 지금의 요녕성 요양)의 북쪽에 성을 만들고, 이렇게 하여 모용씨는 선비족중 가장 먼저 중원으로 들어온 부족이 된다.


십육국시기에, 모용씨는 모두 5개의 국가를 세운다: 전연, 후연, 남연, 북연과 서연.


337년, 모용황(慕容皝)이 연왕(燕王)을 칭하고, 용성(지금의 요녕성 조양)을 수도로 삼는다. 이것이 전연이다.


나중에 전연은 전진(前秦)의 부견(堅)에게 멸망당한다. 전진이 동진을 남정하는데 실패한 후, 부견이 피살되고, 모용수(慕容垂)는 후연을 건립한다. 모용홍(慕容泓)은 서연을 건립한다.


그후 후연이 서연을 멸망시키고 모용씨를 통일한다.


이와 동시에, 선비 탁발부가 흥기하여 북위를 건립한다. 북위는 먼저 후연을 공격하여 허리를 잘라 반으로 나눈다. 남쪽은 남연이 되고, 북쪽은 북연이라 한다. 마지막에 북연은 북위에 멸망당하고, 남연은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한다.


이렇게 하여 모용씨의 연나라는 모조리 멸망당하게 된다.


제2차는 탁발씨(拓跋氏)이다.


선비 탁발부는 대흥안령 북단에서 기원한다.


386년, 탁발규(拓跋珪)는 부견이 비수지전에서 패배한 틈을 타서, 전진이 사분오열되었을 때 우천(牛川)에서 스스로 대왕(代王)이라 칭한다. 나중에 위왕(魏王)으로 고쳐 부른다.


397년, 탁발규는 후연을 격패시키고, 후연의 허리를 갈라서, 이때부터 남쪽은 남연, 북쪽은 북연이 된다.


398년, 육월,탁발규는 국호를 '위'로 고친다. 역사에서 '북위'라 부르는 왕조이다.


408년, 태무제 탁발도(拓跋燾)가 즉위한다. 탁발도는 웅재대략으로, 13차례에 걸쳐 유연(柔然)을 북정하여, 유연을 신하국으로 복속시킨다.


427년, 탁발도는 3만 기병으로 견고하기 그지없는 호하(胡夏)의 통만성(統萬城)을 함락시킨다.


431년, 탁발도는 호하를 멸망시키고, 산호(山胡)를 평정하고, 토곡혼(吐谷渾)을 서쪽으로 몰아낸다.


436년, 탁발도가 북연을 멸망시킨다.


439년, 탁발도가 북량을 멸망시키고, 이렇게 하여 선비 탁발부는 북방을 통일하게 된다.


471년, 효문제 탁발굉(拓跋宏)이 즉위한 후, 낙양천도와 한족습속을 받아들임으로써 점차 한화(漢化)된다. 이때부터 탁발씨는 원(元)씨로 성을 고친다.


북위는 150년간 존속했고, 우문태(宇文泰)와 고환(高歡)이 나눠서 갖게 된다.


제3차는 우문씨(宇文氏)이다.


선비 우문부는 처음에 지금의 요서 서랍목륜하와 노합하 일대에 거추했다. 선비 모용부와 마찬가지로, 동부 선비족의 한 갈래이다. 우문부는 일찌기 모용부와 여러번 싸움을 벌였으나, 우문부는 모용부를 당해내지 못했다. 마침내 344년, 우문부는 모용부로부터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우문부락은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탁발부가 북위를 건립한 백년후인 532년, 고환이 효무제 원수(元修)를 황제에 올리고 조정대권을 장악한다. 원수는 고환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낙양에서 도망쳐 관중의 장수 우문태에게 간다.


그후 북위는 분열한다. 고환은 원선견(元善見)을 옹립하여 업성으로 천도하니 역사에서 동위라 부르는 왕조이다; 우문태는 원수를 죽이고, 원보거(元寶炬)를 옹립하고 장안을 수도로 삼는다. 역사에서 서위라 부르는 왕조이다.


선비 우문씨는 이때부터 천하를 다투게 된다.


550년,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은 동위의 괴뢰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국호를 제(齊)라 한다. 역사에서 북제(北齊)라 부르는 왕조이다.


557년, 우문태의 아들인 우문각(宇文覺)은 서위의 공제(恭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라 한다. 역사에서 북주(北周)라 부르는 왕주이다.


576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병력을 일으켜 북제를 공격하고, 577년 북제의 도성 업성을 함락시킨다. 북제의 후주 고위(高偉)는 포로로 잡힌다. 이렇게 하여 선비 우문씨가 북방을 통일한다.


그렇다면, 선비족의 모용, 탁발과 우문의 세 부족중 우문부가 마지막에 웃었을까?


581년, 북주의 정제(靜帝) 우문천(宇文)이 양견(楊堅)에게 황위를 양위하여, 북주가 멸망한다.


양견의 부친 양충(楊忠)은 북주의 '수국공(隨國公)"이었다. 그리하여 양견은 국호를 "수(隋)"라고 하게 된다. 역사상 그는 '수문제(隋文帝)'라 불린다.


양씨는 선비족 혈통일까? 북주의 우문태는 확실히 그에게 보육여(普六茹)라는 성을 하사했다. 그러나 사성을 받았다는 것은 양씨가 원래 '양'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양씨가 대대로 대북(代北)에 살아서 선비족의 습속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양씨가 종결자인가? 아니다.


618년,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은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당하고, 수나라가 멸망한다. 양씨는 마지막에 우문씨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같은 해, 우문화급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허(許)"라 한다.


619년, 우문화급은 두건덕(竇建德)에게 피살된다. 그리고 그의 동생 우문사급(宇文士及)은 이세민에게 투신하여, 관직이 재상에 이른다. 그리고 영국공(郢國公)에 봉해진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선비족 3부족중 모용씨가 가장 먼저 중원으로 들어온다. 전후로 5개의 연나라를 세운다. 그후에 탁발씨가 굴기하여 북위를 건립하고, 연을 멸망시키며 북방을 통일한다.


북위가 건립된지 백년후에 우문씨와 고씨가 북위를 나눠갖는다. 그리고 우문씨가 고씨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한다.


우문씨가 천하를 통일하려고 할 때, 제위는 외척인 양견에게 빼앗기고, 양씨가 화하를 통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