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간감(看鑒)
여성(女性), 여권(女權)과 같은 주제는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논쟁이 심하다. 세계각지의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여러가지 반항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 여성의 역량은 갈수록 중요해진다.
옛날에 여성은 부권(父權)과 부권(夫權)의 이중 압력하에,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국시대의 미태후(芈太后), 한나라의 여치(呂稚), 북위의 풍태후(馮太后), 여황 무측천(武則天), 청나라의 효장(孝莊)등은 모두 상당히 걸출한 여성들이다.
오늘 얘기할 이 전설적인 여인은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절대로 역사상의 그 어느 여성에 비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동진에 한 전설적인 여인이 있으니 바로 저산자이다.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예뻤다. 진서(晉書)에서는 "총명유기우(聰明有器宇)"하다고 적었다. 견식이 넓고, 흉금이 넓으며, 원근에 널리 알려진 미인이었다. 그녀는 19살때 궁으로 들어가 황후가 된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복과 화가 같이 다닌다. 사마악(司馬岳)은 2년간 황제로 있다가 죽어버린다. 그리하여 나이 겨우 3살짜리 어린 아들이 황위를 승계하게 된다. 대신들은 새황제의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저태후로 하여금 천하사직을 위하고, 여민창생을 고려하여, 임조청정(臨朝聽政)할 것을 권한다.
저태후는 재삼 고려한 후 조서를 내린다. 이 조서는 그의 신하들이 어린 주군을 잘 보살피는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자신이 나라를 위하여 임조청정하겠다는 결정을 담고 있다. 이렇게 하여 저산자는 그녀의 첫번째 임조청정의 정치생애를 시작한다.
집정기간동안 저산자는 놀라운 정치적 재능과 일처리의 박력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조정신하들의 옹호를 받는다. 권력을 잡은 후, 저산자는 자신이나 친척들을 특별히 우대하지 않는다.
그녀의 부친인 저부(褚裒)는 유명한 청류(淸流)이다. 조정의 핵심부서에서 항상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저산자가 입궁한 후, 그는 자신이 황후의 부친이라는 것때문에 내정에서 요직을 담당하지 않고 외직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청해서 나간 바 있다.
나중에 조정이 다시 저부를 불러들이는데, 그는 굳게 사양하며 관직을 받지 않았다. 조야상하에서는 모두 그의 겸양을 칭찬한다. 저부는 지방에서 재직할 때 청렴하고 근검절약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친히 처리했다.
진목제(晋穆帝)가 15살이 되었을 때, 저태후는 물러나기로 결정한다. 아마도 유전인자의 문제인지, 진목제는 친정을 한지 5년도 되지 않아 19살의 나이로 병사한다. 진목제는 아들을 두지 못했으므로 진성제(晋成帝)의 장남인 낭야왕(琅琊王) 사마비(司馬丕)가 즉위하니, 바로 진애제(晋哀帝)이다.
그러나, 진애제는 정사에 아무런 흥미가 없는 멍청한 황제였다. 방사를 미신하다가 얼마후에 죽고 만다. 그에게도 아들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진애제의 동생인 사마혁(司馬奕)을 불러와 황제에 앉힌다. 저태후는 할 수 없이 다시 정치무대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저태후의 이번 '출산(出山)'떄 조정형세가 지난번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황권이 약화되고, 군벌이 난립하며, 대군벌 환온(桓溫)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중요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부심이 강하고, 전쟁을 통하여 공을 세워서 권력을 탈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자 기존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를 세워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고자 한다.
371년, 환온은 병력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와 저태후를 핍박하여 사마혁을 황제에서 폐위시키게 한다. 그는 사마혁이 양위로 자식을 낳을 수 없으며, 총신이 후궁과 사통하여 낳은 세 아들을 모두 자식이라고 사칭하여 왕에 봉했다고 오명을 뒤접어 씌운다.
저태후는 할 수 없이 백관을 조당에 불러오은 후, 사마혁을 황제에서 폐위시켜 동해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환온은 사마욱(司馬昱)을 모셔와서 황제에 앉힌다. 그가 진간문제(簡文帝)이다.
환온이 있으므로, 저태후는 임조청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숭덕궁으로 물러가서 향불을 피우고 예불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간문제가 즉위한 후, 환온을 승상에 앉히고, 경사에 남아 보정하도록 한다. 간문제도 단명황제이다. 황제에 오른 다음해에 병사하고 만다.
간문제는 병이 위중할 때 환온을 입조하도록 명하나, 환온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후임 황제를 누구로 할지를 아무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문제는 할 수 없이 유조(遺詔)를 남겨 환온으로 하여금 보정하게 한다.
환온은 원래 간문제가 죽을 때 자기에게 황제위를 선양하거나 자시에게 섭정하게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단지 보정을 하라고 하니 그는 크게 실망한다. 울분에 싸여 있다가 얼마후 그도 병사한다.
간문제가 죽은 후, 태자인 사마요(司馬曜)가 즉위하니 그가 진효무제(孝武帝)이다. 효무제의 나이가 어리고, 환온도 죽었으니, 여러 신하들은 다시 저태우에게 임조청정을 청한다.
48세의 저태후는 다시 한번 '출산'한다. 오년후, 효무제가 성년이 되며, 저태후는 조서를 내려 효무제에게 정무를 넘겨준다. 자신은 후궁으로 물러나서 예불을 드린다. 384년, 저태후가 사망하니 나이 61세이다.
저산자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6명의 황제를 겪으면서, 3번 임조청정한다. 그리하여 동진 후기의 장문인이 된다. 19세에 입궁한 그녀는 이렇게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낼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녀를 선택했고, 그녀는 앞세웠다.
일대여황 무측천과 비교하자면, 권력의 문제에서 저산자는 가질 때는 가지고 버릴 때는 버릴 줄 아는 기도가 있었다.
어쨌든 동진의 황실자제는 대부분 능력이 부족했다. 이치대로라면 권력과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엄청난 권력에 대하여 손에 쥘 때는 쥐고 놓아줄 때는 놓아주었다. 이런 기도는 많은 남성권력자들이 부끄럽게 여겨야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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