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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뤼린(王瑞林): 중국 최후의 '감군(監軍)'

by 중은우시 2018. 12. 17.

글: 임염(荏苒)


사람의 인생에서 운명을 바꿀 기회가 있다. 그리고 '귀인'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이약용문(鯉躍龍門)할 수도 있다. 화궈펑(華國鋒), 왕둥싱(汪東興), 후차오무(胡喬木)가 모택동에게 그러했고, 리더셩(李德生)이 주은래에게 그러했고, 왕뤼린이 등소평에게 그러했다.


1952년 22살이 왕뤼린은 이미 혁명에 참가한지 6년이 되었다. 산동성이 교동 고향에서 바다를 건너 동북으로 갔다가 다시 수도 북경으로 왔다. 교동 고향의 소학교 교사에서 동북군구 기요처 참모를 거쳐 다시 정무원 기요처의 판보원(辦報員), 부고장(副股長)이 되었다. 등소평을 만나기 전에 왕뤼린은 이미 정무원에서 일한지 2년여가 되었다. 정무원의 고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같은 1952년 48세의 등소평이 서남에서 북경으로 옮겨, 정무원 부총리 겸 재경위원회 부주임이 되어, 경제전문가로 재정경제업무를 책임진다. 등소평과 함께 북경으로 온 사람은 동북의 고강(高崗), 화동의 요수석(饒漱石), 중남의 등자회(鄧子恢), 서북의 습중훈(習仲勛)이 있다. 이를 가리켜, "오마진경(五馬進京)"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해에, 청렴하며 일정한 문화수준을 갖춘 왕뤼린은 신임 부총리 등소평의 비서로 선발된다. 이때부터 자신의 운명은 등소평과 긴밀히 연결되고, 왕뤼린의 일생은 바뀌게 된다. 등소평의 딸 등용(鄧榕)이 <나의 부친 등소평>이라는 책에서 토로한 바에 따르면, 등소평의 왕뤼린이라는 여러 해동안 따른 비서에 대하여 '감정이 아주 깊었다. 이런 감정은 자신의 자녀인 골육에 대한 친정과는 달랐지만, 아주 비슷했다."


문혁후, 등소평이 중국공산당의 최고권력을 장악하면서, 왕뤼린도 수창선고(水漲船高)하게 된다. 등소평의 사후를 대비한 포석에서도 중임을 맡게 된다. 등소평이 군사위원회 주석직무에서 은퇴하고 물러날 때, 친히 자신의 군대내 최대지주 '양가장'을 내보낸 후, 등소평이 친히 격대(隔代)후계자 후진타오를 고른다. 겉으로는 그가 옛날부터의 부하 왕전(王震), 류화칭(劉華淸)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발탁하였지만, 속으로는 대비서 왕뤼린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상무부주임으로 발탁하여, 실질적으로 군대조직의 인사권을 장악하게 한다. 이렇게 양면으로 사후를 대비한 배치를 마친다.


부고의(傅高義)는 <등소평시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등소평에 있어서, 비서 왕뤼린은 그의 보청기일 뿐아니라, 그의 나팔이며, 더더구나 떨어질 수 없는 지팡이였다." 말년에 청력이 감퇴된 후, 등소평은 문건을 보는 것이 회의에 출석하는 것보다 시간적으로 훨씬 편리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회의보고서를 읽고, 기요비서 왕뤼린에게 회의상황을 듣는 것"을 더욱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왕뤼린은 등소평을 대리하여 회의에 출석하고, 다른 고관의 기요비서와 만나서 그들의 견해를 알아냈다." 등소평의 대다수의 전화도 왕뤼린이 처리했다.


이로 인하여 왕뤼린은 '등소평의 대리인'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갖게 된다. 모택동의 말년에 왕동흥과 같았다. 당연히 왕뤼린와 왕동흥은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모택동, 등소평에 대한 충성심이다. 예를 들어, '당과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왕뤼린은 등소평이 은퇴한 후 등소평 대비서의 역할을 여전히 맡았다. 이 점에서 보자면 왕뤼린은 등소평이 군대내에 남겨서 장쩌민을 견제하는 '감군'의 신분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쩌민 본인도 이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1994년 5월, 64세의 왕뤼린은 정대군구급(正大軍區級)으로 승진한지 4년, 중장(中將)으로 승진한지 6년만에,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상무부주임의 신분으로 상장(上將)의 계급으로 승진한다. 비록 1988년의 계급제도에 따르면, 1급상장(一級上將)이 최고계급이고, 등소평에게 수여하려 했지만, 등소평이 거절하는 바람에, 상장계급은 인민해방군의 최고계급이 되었다.


상장을 수여받으며, 왕뤼린은 계급에서 군인생애의 정점을 맞는다. 그러나, 금방 새로운 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중국의 관련 군사법규와 내부조례에 따르면, 정대군구급 총정치부 상무부주임인 왕뤼린은 1995년 만65세가 최고복무연한인 것이다. 반드시 현역에서 퇴역해야 했다. 전인대, 정협의 직위를 맡아 2선으로 물러나게 된다. 외부에서 잘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던 유소기(劉少奇)의 아들 유원(劉源)도 2015년 나이가 만65세에 이르면서 퇴역하고, 다음 해에 전인대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위원으로 옮긴다.


중요한 순간에, 군사위원회 주석인 장쩌민이 왕뤼린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군사위원회 회의에서 왕뤼린에게 '총부주요영도직무담임자'신분을 부여한 것이다. '총부주요영도직무담임자'의 복무연한은 전인대에서 별도로 정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전인대에서는 규정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왕뤼린은 퇴역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연히, 외부에서 보기에 장쩌민이 한 이 모든 것은 왕뤼린의 뒤에 있는 등소평 때문이었다.


1995년, 왕뤼린이 만65세가 되는 해에, 다시 사상유례없이 총정치부상무부주임의 신분으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을 맡고, 이때부터 군대지도자의 대열에 들어가, 부국급(副國級)의 대우를 받는다. 이렇게 하여 복무연한의 곤경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왕뤼린은 계속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총정치부 상무부주임을 맡는다. 2002년 정쩌민의 세번째 총서기임기가 만료되고, 등소평이 친히 뽑은 격대 후계자 후진타오가 총서기 직무를 승계한 후에 비로소 은퇴한다. 등소평과의 40여년의 정의를 저버리지 않고, '감군'의 사명을 다한 것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