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의 권력국면과 패망

중은우시 2018. 8. 6. 23:10

글: 15810700236


함풍6년(1856)은 태평천국의 판도가 가장 넓고, 군사력이 전성기에 이르렀던 때이다. 그러나 돌연 참혹한 고우층의 내분과 살륙이 일어난다. 역사에서 말하는 "천경사변(天京事變)"이다. 일반적으로 '천경사변'이 근대 최대규모이 하층민중이 반항운동이 멸망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나, 빙동삼척(氷凍三尺) 비일일지한(非一日之寒)이다. 태평천국의 전기에는 여러 왕들간의 관계가 미묘했었고, 태평천국의 권력국면의 변동은 이미 사변의 화근을 심어놓았다.


1. 상제회(上帝會) 초창시기(1847-1848)


상제회 창립초기, 권력계통은 비교적 간단했다. 홍수전(洪秀全)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었고, 종교지도자와 정치적 영수의 신분을 함께 가지고 있었고, 상제회에서 유일하게 신과 소통하는 역할이었다. 홍인간(洪仁玕)의 회고에 따르면, "무릇 거감, 진신등 모두 그의 위엄과 기품에 감탄했다. 그래서 가는 곳이면 모두 스스로 귀의했다. 무릇 동서 양월(광동,광서)의 부호민가가 공손하게 영접하고, 성훈을 공손하게 듣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 속으로 진명천자를 만났다며 기뻐했다." "항상 이런 천리, 물리, 인리를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우리 주인이 귀신과 괴물을 쫓는 것을 보고는 천하기인이라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소문을 듣고 귀의했다. 벙어리가 입을 벌리고, 사지마비, 괴질을 앓다가도 믿으면 치유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홍수전은 독존(獨尊)의 지위를 형성한다. 풍운산(馮雲山)은 상제회이 실제 발동자이며 조직자이다. "산하의 험준함을 겪으며, 풍우의 간난을 맛보며, 나라와 고향을 떠나, 처와 자식을 버리고, 수년동안 풍진을 겪으며 거의 초췌해졌다."(<천정도리서>). 다만, 그는 공을 주장하지 않고, 이익을 다투지 않았다. 여전히 홍수전을 교주로 받들었고, 홍수전의 종교적 지시와 행정적 결책을 받들어, 각지의 수령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상제회의 최고지시를 신도들에게 전달한다. 일원구조의 중추의사결정시스템은 행정효율이 비교적 높았고, 효과적으로 선교등 업무를 순조룹게 추진할 수 있게 해주었다.


홍수전과 풍운산은 의사결정중추의 일원구조모델을 가졌으나, 완전히 수직적인 것은 아니었다. 홍수전은 주로 교의를 저술하고 밝혔으며, 종교체계를 창건하고 보호하는 일을 책임졌다. 풍운산은 주로 일상교무의 지도, 선전과 조직을 책임졌다. 두 사람은 분엽하여 협력했다. 그래서 홍수전은 명실상무한 종교지도자와 명의상의 정치적 영수였다. 풍운산은 상제회 정치상의 실질적 의사결정권자였다. 비교하자면, 홍수전의 실제권력은 풍운산만 못했다. 그는 상제회이 중추의사결정체계에서 주변지역으로 밀려났다. 다만 홍수전, 풍운산 두 사람의 관계는 주류층면에서 여전히 단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홍수전은 풍운산에 대하여 마음을 놓았다. 풍운산은 또한 고상한 품격과 온건한 일처리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상제회 초기의 지도체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효과적이었다.


도광27년(1847년) 십일월, 풍운산은 자형산의 사신(士紳) 왕작신(王作新)에게 붙잡히고, 상제회는 위기에 처한다. 다음 해 삼월, 양수청(楊秀淸)은 천부하범(天父下凡)을 가탁(假托)하여 전언하고 회중을 다독인다. 구월, 소조귀(蕭朝貴)는 양수청을 본받아서, 천형(天兄) 예수를 맞아 인간세상에 온다. 양수청, 소조귀가 굴기하며 상제회는 권력국면에 변화가 발생한다.


2. 소조귀시기(1848-1851)


양수청과 소조귀가 굴기한 후, 상제회의 권력국면은 절대로 단순한 천부,천형과 홍수전의 2원구조체계가 아니었다.


<천형성지(天兄聖旨)>의 기록에 따르면, 도광30년 육월말, 천형은 홍수전가족을 접견하고, 아주 빈번하게 "하범이사(下凡理事)"를 시작한다. 전체 칠월, 팔월, 구월, 모두 소조귀가 잠시 수보(首輔)로 정무를 주재한다. 태평천국의 권력무대에서 활발한 주인공은 소조귀와 천형이었다. 이 시기에 무릇 상제회의 인사변동, 홍수전행적, 홍수전가족의 안치, 신도사상교육과 상벌, 군사인선, 개인생활, 깃발을 들고, 칭왕하는 시간, 중추의사결정, 금전단영등등 일체의 자잘하고 중요한 일을 모조리 천형이 결정한다. 그리고 홍수전, 풍운산은 그저 명령을 따르는 입장이 된다. 양수청은 보조적인 지위가 된다. 천부전언(天父傳言)은 날로 주변화된다. 예를 들어 도광30년 팔월초하루, 소조귀는 평남 붕화산에서 양수청과 약속한 "전요(戰妖, 상제교의 용어로, 귀신을 쫓는 것을 가리킴)"가 끝난 후, '천형'의 명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에게 명을 내린다; '넷째형, 당신이 먼저 돌아가세요. 동생은 여기에서 며칠 더 머무르겠습니다. 이 몇 곳의 요마를 먼저 굴복시킨 후에 돌아가겠습니다." 양수청은 천형의 명을 받들어 붕애산에서 붕화산으로 가서 전요한다. 그 후에 다시 소조귀의 안배에 따라 돌아온다. 이를 보면 소조귀는 이미 직접 양수청의 행동을 지시할 정도였고, 기본적으로 상제회의 중추의사결정계통을 장악했다고 볼 수 잇다.


발견된 <천부성지>는 완전하지 않으므로, 천부가 얼마나 주변화되었는지의 정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소조귀의 주인공지위는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의 상한은 불명확하다 하한은 영안봉왕(永安封王)까지이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이 단계의 하한이 <천정도리서>에 기재된 양수청의 큰 병이 나은 경술년(1850) 십월초하루가 아니라는 것이다. <천형성지>의 기재에 따르면, 양수청이 건강을 회복한 후, 여러가지 원인으로, 소조귀는 확실히 근 4개월간 함묵한다. 태평천국의 권력구조에서 "천형"에서 "천부"로 점점 이동한다. 금전의거로 나라를 세운 후, 천형이 다시 나온다. 태평천국의 신단(神壇)과 정단(政壇)에서 다시 일정한 역할을 한다. 다만 이런 추세는 이미 예전같지 않았다. 혹은 "소조귀시기"의 후기라고 할 수 있다. 영안봉왕후, 각광은 동왕의 절제(節制)를 받는다. 양수청, 소조귀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이 기간내에, 소조귀는 천형성지를 통하여, '신'의 구체적인 지시를 홍수전, 풍운산, 양수청에게 전달하여, 중추적 의사결정이 된다. 그리고 금전대본영의 핵심역량인 위창휘(韋昌輝)를 심어둠으로써, 직접적으로 각종 업무를 관리 지휘한다. 위창휘는 한편으로 중추의사결정의 형성에 참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직접 지방집행계통에 명령을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천부의 대리인인 양수청도 천부성지를 통하여 직접 홍수전, 풍운산에게 지시를 전달한다. 다만 소조귀의 강압과 배척하에 천부는 날로 주변화된다. 양수청이 '신인구통(神人溝通)'하는 공간은 날로 축소되었다. 소조귀, 위창휘가 셀제로 전체 상제회의 의사결정의 형성, 전파, 집행과정을 독점한다. 홍수전 풍운사이 원래 가지고 있던 종교권력, 세속권력은 모두 추가로 축소되고 손상된다.


소조귀, 양수청, 위창휘가 중추의사결정체계에 들어오면서, 중추의사결정의 범위가 넓어지고, 집사광익(集思廣益)에 유리했다. 그리하여 더욱 효과적이고 똑ㄸ고한 정령을 형성한다. 다만, 소조귀가 친히 만든 이 국면은 천부의 대리인 양수청의 기존신분과 권력의 간여를 배제할 수 없었다. 완전히 홍수전 교주의 명예결정권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스팀의 각 구성부분은 운영과정에서 상호견제와 균형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사무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조귀는 이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제회핵심중추지점의 이전을 실현하는 방법을 가속화하게 된다. 소조귀, 양수청, 위창휘가 소재한 자형산과 금전촌은 새로운 의사결정기지가 된다. 홍수전, 풍운산은 어절 수 없이 천형성지를 받들어 화주산인촌등지로 피길(避吉)해야 했다. 즉 명예상이 중추로 남아 부수적인 지위로 떨어진다. 양자의 모순과 갈등은 잠시 완화된다.


소조귀시기의 태평천국의 권력국면은 천형의 고압정책하에 소조귀의 정교한 기획하에, 양수청, 소조귀의 권력쟁탈전으로 인한 갈등이 잠시 완화되었다; 소조귀와 홍수전, 풍운산은 권력재분배로 인한 마찰도 인위적으로 공간상의 거리를 두어 해결한다. 태평천국은 순조롭게 반란정권 가장 중요한 준비업무 즉 금전단영(金田團營)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권력국면은 양수청, 소조귀와 홍수전 풍운산의 2원국면이 아니라, 천형 소조귀와 천부 양수청의 대립이다. 이런 구조는 소조귀, 양수청간의 객관적인 실력이 상대적으로 균형을 이룬 기초 위에서, 각종세력이 상호타협하고 이용한 산물이다. 양수청의 실력이 되살아나면서, 게다가 소조귀가 직접 조직한 권력관계네트워크의 각종 불협화음이 드러나면서, 각종세력은 기존권력국면을 타파하고 정치이익과 권력의 재분배를 실현할 필요가 생긴다. 소조귀시기의 국면구조는 점점 더 불안정해진다.


소조귀와 석달개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천형성지>에서 유일하게 한번 석달개를 기재한 것은 그가 천형에 대드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도광29년말, 귀현(貴縣) 육굴촌(六屈村)에서 상제회와 현지무장 주봉명(周鳳鳴)간의 전투가 발생한다.  상제회가 승리를 거둔 후, 천형이 병력을 회군하도록 명령한다. 석달개, 왕옥수(王玉繡), 섭향재(葉享才)는 모두 회군에 반대한다. 천형은 대노한다. "높은 하늘에서 보건데, 모두 별 것이 아니다. 너희는 아무런 담량과 식견도 없는가. 석복륭(石福隆)등의 집에 양초가 다 떨어졌다. 너희는 아직 모르는가?" 석달개가 여전히 고집한다: "우리 동생들이 뒤에서 버티겠습니다." 석달개가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소조귀에게 의외였다. 천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만 소조귀는 이걸로 끝내지 않았다. 4일후, 천형은 유문명(劉文明), 섭향재(葉享才)에게 귀현으로 돌아가 석달개에게 말해주라고 한다: 믿지 않는 자가 꼬드기는 것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그에게 사곡촌 왕가(왕옥수등은 홍수전의 사촌이다. 소조귀의 주요타격대상이었다)와 거리를 두라는 말이었다. 이를 보면 소조귀와 석달계의 관계는 화목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석달개는 소조귀의 압력과 고립하에 다시는 천형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도 말하지 못하게 된다.


소조귀는 홍수전에 대한 겁박과 통제를 통해, 풍운산에 대한 배척과 타격을 통해, 석달개에 대한 압박과 고립을 통해, 양수청에 대한 합작과 투쟁을 통해, 위창휘에 대한 회유와 육성을 통하여 그다지 조화롭지 않은 태평천국 핵심층의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각종 세력의 소장(消長), 불협화음으로 인한 갈등과 충돌은 소조귀시기의 태평천국의 권력국면이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운명을 만든다. 소조귀시대는 의거의 승리를 거두면서, 태평군이 영안으로 돌진하는 휘황함을 얻는 동ㅅ에, 한걸음 한걸음 해체의 심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3. 양수청시기(1851-1856)


함평원년(1851) 십월십팔일, 영안성 밖에서 수두촌(水竇村)전투가 발생하고, 소조귀는 중상을 입는다. 그리하여 정치군사활동에참여할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정치생애는 끝이 난다. 그의 중상으로 홍수전은 부득이 뇌려풍행(雷勵風行), 판사간련(辦事干練)한 천부의 대리인이라는 숭고한 신분을 지닌 양수청에 완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십월 이십오일, 조서를 내려 봉왕을 하는데, 천왕은 동왕에게 여러 왕을 절제할 전권을 부여한다. 이것은 시국의 필요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때, 양수청과 소조귀를 제외하고, 다른 삼왕은 모두 전국을 통할하고, 전군을 지휘할 실력과 종교적 신분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이미 한걸음 한걸음 양수청과 대등한 지위를 차지했던 소조귀는 중상으로 생명이 위험하게 되니, 자연히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나게 된다. 태평천국의 정치권력국면은 소조귀가 중상을 입은 후 7일째 되던 날 소리없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영양봉왕은 양수청을 정치적으로 일지독대(一枝獨大)의 국면을 형성한다. 그는 천부의 뜻으로 홍수전의 종교권력을 제한하고, 홍수전의 세속권력을 배제한다. 이어서 정치(좌보정군사(左輔正軍師))와 종교(천부대리인)의 이중적인 권력신분을 갖게 되어, 서왕, 남왕, 북왕, 익왕 및 문무백관을 통할하고, 태평천국의 군민을 관리하게 된다. 다만, 천형대리인 소조귀의 종교권력계통에서의 작용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는 천형의 뜻을 통해 한편으로 천왕의 독재체제를 억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천부권력이 전체 태평천국의 종교권력계통에서의 팽창하는 것을 견제했다. 나아가 종교신분으로 양수청의 일부 정치행위를 견제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양수청, 소조귀 두 사람은 종교층면에서 일정한 견제균형요소가 존재했다. 비록 천형은 신비로운 언어체계중에서 거의 침묵했지만, 그리고 날로 주변화되고 있었지만, 남왕 풍운산은 여전히 태평천국 상하에서 인정한 상제회의 실질적인 창건자이다. 그는 홍수전의 가장 충실한 맹우이다. 태평천국에 대한 공헌과 태평천국에서의 경력은 여전히 말살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소조귀가 양수청이 종교권력계통에서 악성팽창을 막는 중요한 역량이라면, 풍운산은 그의 경력과 공로로 태평천국의 여러 왕이 세속권력방면에서 조절작용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풍운산, 소조귀가 전후로 전사한다. 이어진 것은 권력국면에서의 커다란 권력진공이다. 홍수전은 세속권력계통의 재건에 여전히 침묵을 취한다. 이것은 큰 실책이다. 동왕 양수청은 순조롭게 소조귀, 풍운산의 권력을 접수한다. 동시에 각종방식으로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및 진일강(秦日綱), 호이황(胡以晃), 진승용(陳承瑢)등 중앙실력파를 탄압하여 권력핵심체계 밖으로 밀어낸다. 북왕 위창휘는 서열이 3위로 올랐고, 후호우부군사(後護又副軍師)의 신분을 가졌지만, 그가 가장 의존했던 맹주 소조귀의 사망으로(위창휘는 소조귀가 발탁한 사람이다), 추가로 권력공간을 확장할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위창휘는 할 수 없이 여리박빙, 여림심연으로 "사동적심첨(事東賊甚諂)"(동왕 양수청을 극히 아첨으로 모신다), "양하지이음욕탈기권(陽下之而陰欲奪其權)"(겉으로는 자신을 낮추지만 속으로는 동왕의 권력을 빼앗고자 했다.) 익왕 석달개는 겨우 20살을 넘은 젊은이였다. 그리고 그는 군사(軍師)의 신분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추권력핵심과는 비교적 멀었다. 그리하여, 홍수천, 양수청의 갈등이 충분히 드러난다. "대립의 2원구조"체계가 형성된 것이다.


양수청은 나아가 정치정보의 전달을 차단한다. 장덕견의 <적정회찬> 기록에 따르면; "무릇 중요한 상소도 양수청의 도장이 없으면 홍수전은 보지 모했다. 그러므로 상소문은 반드시 양수청에게 먼저 보내어 날인을 받아야 했다. 비록 위창휘라 하더라도 직접 전달하지 못했다." 폐쇄된 정보유통역역에서, 천경에 들어간 후 다시 1년여의 시간이 흐른다. 홍수전은 양수청에 의하여 완전히 허수아비가 된다. 함풍4년 영국사절 Walter Henry Medhurst가 천경을 방문한다. 그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평양과 같은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군등의 모든 통신에서 상대방은 일부러 우리에게 동왕의 뜻이라고 말했다. 그의 권력, 그의 위엄, 그의 영향이 컸다. 단지 그의 유명한 주군의 이름은 어쩌다 언급될 뿐이다. 동왕은 확실히 그들 정치와 종교체계의 원동력이다." 외국인도 분명히 봤던 것이다. 양수청이 전체 태평천국권력의 중추라는 것을. 그는 이미 충분한 카드를 가지고 홍수전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저 야심의 팽창을 기다릴 뿐이다. 권력투쟁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된다. 함풍6년, 태평천국에 내분이 일어나고, 위창휘가 양수청 및 그의 심복을 살해하고, 석달개는 홍수전의 명을 받들어 위창휘와 그의 일당을 죽인다. 이어서 석달개는 홍수전의 배척으로 떠나버린다. 역사에서 말하는 "천경사변"이다.


4. 후기태평천국(1857-1864)


천경사변후, 의거를 처음 시작했던 여러 왕은 혹은 죽고, 혹은 떠났다. 천부, 천형의 신화체계는 이제 파멸되었다. 홍수전은 권력을 독점한다. 그는 권력공백을 메우게 되는데, 홍수전이 메운 후의 후기태평천국은 복잡한 일원적 권력구조를 갖추게 된다. 최종적으로 홍인간, 홍인발(洪仁發), 홍인달(洪仁達), 몽득은(蒙得恩), 임소장(林紹璋)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친척귀족권력체계와 진옥성(陳玉成), 이수성(李秀成), 이세현(李世賢), 양보청(楊輔淸)을 우두머리로 하는 지방실력파권력체계가 형성된다.


후기권력구조의 운영모델에서, 홍수전은 직접 혹은 직접 발탁한 중앙권력귀족이 지방실력장수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정권기기를 조종하는 것이다. 다만, 중앙의 위신과 관할권은 천경사변후에 심각하게 약화된다. 군공의 경력이 없는 홍인간, 몽득은등의 권력귀족이 내린 명령은 어느 정도 중병을 장악하고 지방을 차지한 이수성, 이세현등 실력파의 저항에 부닥친다. 홍수전과 중앙권력귀족은 할 수 없이 진옥성, 이수성, 이세현등과 연합하고 의존하여, 중추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한다.이수성 자신의 말을 빌리면 홍수전은 "첫째로 유서왕(幼西王) 소유화(蕭有和)를 중용하고, 둘째는 왕장형(王長兄) 홍인발, 왕차형(王次兄) 홍인달을 중용하고, 셋째는 간왕(干王) 홍인간을 중용하고, 넷째, 부마 종(鍾)씨, 황(黃)씨를 중용하고, 다섯째, 영왕(英王) 진옥성을 중용하고, 여섯째가 비로소 이수성이다." 그리하여 중추의사결정과 집행계통에서 지방실력파가 형성되고, 엄중하게 중앙의사결정의 시행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한편으로, 홍수전은 직접 지방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직접 지방각급의 장수들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후기에 여러 왕을 분몽하여 각자 병력을 모으게 하고, 각급장수를 속속 지방의사결정체계에 편입시키고, 정책제정에 간여하게 한다. 이수성, 진옥성등 실력파는 각급장수에 대한 지휘권이 심각하게 동요받는다.


후기 태평천국의 권력구조는 바로 중앙과 지방, 중앙내부, 지방내부등 각종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당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정령이 통하지 않으며, 국가기기는 부식하고 둔화된다. 위기가 겹겹이다. 이수성은 태평천국의 실수를 이렇게 정리했다. 권력구조에 관한 것은 두 가지이다. "왕으로 너무 많이 봉했다. 이것은 큰 실수이다." "입정무장(立政無章)"


위에서 말한대로, 태평천국정권의 권력국면은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홍수전 및 태평천국의 다른 지도자들은 계속하여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권력구조를 건립하지 못했다. 이로 인한 천경사변을 대표로 하는 내부투쟁은 태평천국이 쇠퇴하고 결국은 멸망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