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동림당(東林黨): 절사(節士)는 국가에 얼마나 중요한가?

중은우시 2018. 12. 5. 11:54

글: 정만군(程萬軍)


당대의 사학애호가들 중에는 동림당을 무시하고 오히려 위충현을 크게 칭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동림당이 잘난체 하다가 나라를 망쳤고, 위충현은 현실적으로 나라에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실 용속사관(庸俗史觀)이 빚은 결과이다.


한 국가의 정치엘리트에게 절조(節操)만 있어서는 부족하다. 그러나 절조가 없다면, 만사개휴(萬事皆休)이다. 반드시 부패한다.


금분동남십오주(金粉東南十五州), 만중은원속명류(萬重恩怨屬名流)

뇌분압객조전산(牢盆狎客操全算), 단선재인거상류(團扇才人躆上流)

피석외문문자옥(避席畏聞文字獄), 저서도위도량모(著書都爲稻粱謀)

전횡오백인안재(田橫五百人安在), 난도귀래진열후(難道歸來盡列侯)


이것은 명나라가 망한 200년후에 중국의 선비들에 대한 묘사이다. 청나라때 사인(士人) 공자진(龔自珍)의 <기해잡시(己亥雜詩)>이다. 전체 시의 뜻은 선비를 탄식하는 것이다. 중국사대부는 간이 쥐새끼같이 작아서,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는 사람들이 상류인물이 되어 있다. 그들은 춘추대의도 없고, 책을 쓰는 건 그저 밥을 먹기 위함이다. 제나라 사람 전횡과 그 오백명의 용사와 같이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정복자에게 투항하지 않는 열사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구나.


공자진의 시에서 쓴 말이 거짓이 아니다. 근대 중국의 선비들은 담량이 작아졌을 뿐아니라, 지향도 없다. 그리고 점점 존엄과 발언권도 잃어간다. 우리는 북송시대를 보자. 선비의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은 승상이다. 그는 군주의 앞에서도 어느 정도 발언권과 의사결정권이 있었다. 예를 들어, 북송초기의 전연지맹에서 황제 송진종이 사자 조이용에게 100만세폐를 협상의 하한으로 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이용이 나서자마자 승상 구준이 불러세운다. 그리고는 말한다. 네가 만일 30만을 넘기면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승상이 감히 황제의 사신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이를 보면 그의 권력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명청에 이르러, 내각수보, 군기대신중에서 황제의 사신에게 감히 그렇게 지시할 사람은 없어졌다. 하물며 사신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황제와 그 사신의 앞에서 아무리 혁혁한 사대부라 하더라도 그저 손을 공손히 모으고 명을 듣는 수밖에 없다. 만청사대부들 중에서 우수한 인물인 증국번도 청나라조정을 위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다. 당초 그가 처음 무한전투의 승리를 고했을 대, 조정은 그에게 서리호북순무를 내렸고, 그는 조정에서 내린 직위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연히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함풍제는 화를 내며 욕했다: "나는 네가 사양할 줄 알았다!" "명성을 좋아하는 건 작은 죄지만, 황상의 성지를 어기는 죄는 크다." 그는 증국번이 명성을 낚는 자라고 욕한 것이다. 승리를 거둔 대신이 스스로 겸허하게 관직을 사양했는데, 오히려 황제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그런데도 대신은 한마디 반항을 못한다. 황제에게 욕을 먹은 후, 증국번은 동생에게 편지를 써서 같이 참자고 한다: "이빨이 꺠지더라도 그 피까지 함께 삼켜야 한다." 억울함과 모욕감으로 이빨과 피까지 뱃속으로 삼켜야 했던 것이다.


우수하고 전공이 있는 사대부조차도 황제의 앞에서 이렇게 전전긍긍하는데, 하물며 평범하고 업적이 없는 선비야 어떻겠는가. 군신이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옛말이고, 군존신비(君尊臣卑)의 국면에서는 '먹을 것이라고 구하는게' 현실적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국의 사대부들은 세번에 걸쳐 기세를 떨쳤다. 선진시대. 그리고 선진후에는 삼국시대, 삼국후에는 청말민초시대. 


왜 국내국외를 막론하고 살마들은 삼국인물을 좋아할까? 그것은 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쟁의 모략이 재미있어서도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삼국의 선비들에게는 독특한 인격적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의 선비들은 가장 위무당당했다. 선진의 선비들도 양강했지만, 어쨌든 명주에 의탁하여 군주에 의지하여 비로소 일을 했다. 나중에 선비의 이런 의존성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나 삼국의 선비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천하가 대란에 빠져 있을 때, 나서서 진정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식엘리트들에게는 두번에 걸친 장거(壯擧)가 있었다. 한번은 삼국이고 또 한번은 청말민초이다. 신해혁명의 주력군은 손중산, 황흥을 대표로 하는 일본유학생, 동맹회이다.


동한말기, 황건적의 난으로 천하가 대란에 빠지면서, 백성들은 군벌혼전의 고통을 겪는다. 조조, 제갈량과 같은 선비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나라의 대사를 논의할 뿐아니라, 감히 일어나서 국가명운을 바꾸었다. 중하층 관리로서, 전군교위 조조는 간상 동탁을 암살하려 한다. 실패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거병한다. '산야촌부'인 제갈량은 말타는 것조차도 힘들어한다. 그러나 서재에 앉아서 글이나 쓰고 탄식하는 순수한 문인이 아니라, 적절한 때 산을 내려와, 운주유악, 결승천리했다.군주 유비가 죽은 후에는 그가 실질적인 국가최고지도자의 임무를 맡는다. 촉한정권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역만광란(力挽狂瀾)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린다. 이런 것은 문약한 서생, 부후(腐朽)한 관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사대부의 역사를 보면, 품격이 갈수록 떨어진다. 고대가 가장 뛰어났고, 중세기부터 하락한다. 모두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봉건역사는 역행했다. 양송이전에 중국의 선비들은 강용병진(剛勇竝進)했다. 양송이후에는 '진용(眞勇)'의 품격을 잃어버렸고, 갈수록 순화된다. 지혜는 있지만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강단은 부족했다. 명말에 이르러 중구사인의 정신상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동림의 기개는 대명왕조의 최후의 잔양(殘陽)이다.


대명왕조의 사대부는 "철견담도의(鐵肩擔道義)"의 구호를 가장 크게 냈다. 사실상 확실히 사서에 이름을 남길 사대부들이 출현한다. 예를 들어,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같은 청류사대부들이다. 다만 주류는 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대한 견유(犬儒)들이다. 명나라 중후기, 기본적으로 태감이 권력을 잡는다. 이는 문인사대부들에게 태감인격을 조성한다. 소위 태감인격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무능, 자비(自卑), 억압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탐욕 잔혹, 음험한 것이다. 확실히, 이는 비교적 어두운 인격이다. 고병겸(高秉謙)과 같은 류이다. 그는 대명 천계연간에 관직이 수보에 이른 80세의 노옹이다. 자비와 탐욕을 한몸에 갖고 있다. 영화부귀를 탐하기 위하여 50여세의 권신 위충현을 양부로 모신다. 인간의 염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인물이다.


이런 사대부가 국가위급시기에 몸을 떨쳐 일어날 수 있겠는가? 대로당(帶路黨,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 아니면 하궤당(下跪黨, 무릎꿇고 맞이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작용자는 시류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비바람을 일으킨 자이다. 즉 환경을 만든 사람이다.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은 빈농출신이고, 등극후에 보수군주전제를 추진한다. 선비의 인격은 무시한다. 선비에 대하여는 몽원제국에서도 하지 않은 정장(廷杖)과 조옥(詔獄)을 수단으로 하여, 대신들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체로 곤장을 맞아야 한다. 심지어 특수하게 만든 감옥에 갇혀서 인간증발이 된다. 주원장은 승상제도를 없애서 선비들의 권한을 축소시킨다. 그리고 특무기관에 팔고를 더하여 명나라 선비들에게 '상고(尙古)'와 '존군(尊君)'의 기조를 요구한다. 선비들의 언행은 반드시 '사서오경'을 벗어나면 안된다. 천하에 틀린 군주는 없다. 그저 잘못한 신하가 있을 뿐이다. 이런 환경하에서, 기개와 골기(骨氣)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일부 사대부들은 기개가 있지만 애탄스럽다. 황제에게 '범천(犯賤, 犯諫)'함으로써 개인의 최고가치추구를 실현한다. 황제에게 얻어맞거나 혹은 사사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아무런 반항정신이나 독립의식은 없다.


혹형에 모욕까지 더하면서, 대다수의 명나라 문인사대부들은 조용해진다. 황제이 앞에서 가노와 같다. 그저 황제를 위해 몇 가지 의견을 내놓을 분이다. 주씨강산이 공고해지자, 전체 사대부계층은 활력과 기둥을 잃어버린다. 이런 사대부들이 어찌 강력한 외적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태조,성조 두 황제가 만든 공포분위기하에서, 명나라의 사대부는 숭고,존군을 제외하고 다른 자아실현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리하여 수구와 우충이 전통사대부의 품격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최후에는 건주여진의 수령인 애신각라씨가 쳐들어오자, 칼과 책을 모두 내려놓고, 순화된 선비들은 그저 배운대로 머리숙이고 받들게 된 것이다.


근대 일본이 왜 여러번 중국에 대들었는가? 감히 사탄상(蛇呑象)의 욕심을 내었는가? 근대 중국과 일본의 격차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정치, 군사, 과기, 문화에 주목한다. 그러나, '사혼(士魂)'은 보지 못하고 있다. 양국 사대부의 정신, 품성이 역사의 길에서 걷고 걸으면서 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일본의 사인은 계속하여 강성(剛性) 품성을 유지했다. 근대중국의 사인은 문약하기 그지없었다. 일본은 근대에 계속 중국을 침략하는데, 그중 중요한 원인은 바로 그들이 중국의 엘리트계층을 멸시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혼이 없는 부사(腐士)라고 여겼다.


일본의 문화학자 구와바라 지츠죠(桑原騭藏)의 한 마디는 정곡을 찌른다:

"중국에서 지위있고 지식있고, 일반민중의 지도자가 될만한 관신계층은 부패하고 타락했다. 그들은 정신도 없고, 진심도 없다. 이런 부패, 파락이 수백 천년간 누적된 페습이니, 하루아핌에 바뀌기 어렵다....정체(政體)는 죽은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없으면, 어떤 정체도 모두 그 효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사람들마다 모두 근대일본의 국세가 강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메이지유신의 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메이지유신이전에, 그들은 이미 하나의 민족정신을 건립했다. 즉 무사도를 핵심으로 하는 화혼(和魂)이다. 이런 정신이 기초로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천황이 서방의 과학문화를 받아들인 후, 국세는 즉시 강성해질 수 있었다. 나중에 일본이 전후에 이차굴기를 할 때에도 모두 이것과 관련이 있다. 다만 그들의 이런 민족정신이 어떻게 건립되었는가? 그것은 시종 썩지 않은 선비계층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설사 나중에 궁병독무하는 군국시대에도 부패는 그들과 그다지 관련이 없었다. 지금까지 일본의원의 품격은 여전히 고대의 우수한 사대부의 품격에 못지 않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밝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염치없이 부패한 관리는 아주 적다.


근대중국에서는 썩지 않은 엘리트계층을 보유하지 못했다. 당연히 양국의 큰 환경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외에 사대부 자신의 문제도 있다. 구차한 철학이 강성 품격을 부식시켰다. 부귀해지면 음탕해지고, 강대한 자를 만나면 허리를 숙인다. 일단 강권폭력에는 허리를 숙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된다.


그래서 동림당이 우리에게 남긴 고귀한 유산은 바로 절조라는 두 글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탱되는 사혼(士魂)이고, 예의염치이다. 이는 여하한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동림을 대표로 하는 중국식 청류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의 여러가지 고질도 연구해야 하지만, 절대로 그들의 기개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중국민족은 어떻든지 절대 절사(節士)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무절사국필후(堂無節士國必朽)"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절사가 될 수 없다면, 그들을 더욱 존경해주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