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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남명(南明)은 마지막 희망을 로마교황청에 걸었다.

by 중은우시 2018. 12. 15.

글: 난냉(欒冷)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하나님의 동방의 대리인이며, 동방기독교의 보호자이며, 중원대황제의 태자이며, 조선 티벳 위구르의 보호자이며, 동아세자여러 왕국의 수호자이고, 차하르부 린단칸의 친구이며, 몽골초원의 탱그리칸, 류럽제국의 아믐속의 동방환상향의 왕자로서, 이에 교황 이노센트 10세각하에게 문안인사드리옵니다. 불행한 소식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천주교를 국교로 숭배하는 위대한 나라인 대명제국이 타타르인(만주족을 가르킴)의 남침, 농민반란, 군사귀족반란 및 네덜란드인의 공격이라는 연합공격하에, 현제 제국이 이미 사분오열되었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야만적인 타타르인이 현재 각지에서 주님의 양들을 도살하고 있사옵니다. 이들 동방의 이교도들은 계속하여 그들의 이단적인 신앙을 전파하고, 주의 양들이 마귀의 품에 들어가도록 시도하고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교황 이노센트 10세 각하에게 청하오니, 십자군을 조직하여 동정(東征)에 나서, 성전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동방에 비추게 해주시옵고, 천주께서 대명의 중흥과 태평을 보우해주시옵소서.


황태자 콘스탄틴(Constantine)

황태후 마리아(Maria)

중궁황후 헬레나(Helena) 배상


이 서신은 1650년 남명황제 영력제(永曆帝)가 왕태후(王太后)의 명의로 보낸 도움요청서신이다. 황태후 마리아는 바로 왕태후이고, 황태자 콘스탄틴은 황자(皇子) 주자훤(朱慈烜)이다.


1582년, 예수회 이탈리아출신 선교사 루기에리(羅明堅, Michele Ruggieri)와 마테오 리치(利馬竇, Matteo Ricci)는 광동 조경(肇慶)에 도착한다. 근대 천주교의 중국전래의 서막을 열린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교중국화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의 선교전략을 세웠고, 이 방법은 큰 성공을 거두어, 명말청초때 천주교도는 이미 20만명에 이르게 된다.


다만 전란이 계속되면서, 중국의 선교사들도 분열된다. 선교사들은 몇몇 적대적인 정권들 사이에서 활약한다.


당시 새로 북경에 들어와 주인이 된 청나라조정에는 아담 샬(湯若望, Johann Adam Schall von Bell)과 롱고바르디(龍華民, Nocholas Longobardi)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주교를 믿는 역국(曆局)의 천문가들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흠천감(欽天監)을 장악했다; 장헌충(張獻忠)의 대서(大西)정권에는 '천학국사(天學國師)'라는 칭호를 하사받은 예수회 선교사 부글리오(利類思, Lodovico Buglio)와 마갈하에스(安文思, Gabriel de Magalhaes)가 있었다; 남명조정에서도 천주교는 큰 성공을 거둔다.


1648년, 천주교 예수회 선교사 코플러(瞿紗微, Andreas Xavier Koffler, 瞿安德 혹은 郭福來라고도 적는다)는 남명조정의 왕태후와 그녀의 모친 마태후(馬太后), 영력제의 황후 왕씨(王氏), 황자 주자훤에게 세례를 내린다. 그리고 비빈 50명, 고관 40명 및 태감 여려 명도 세례를 받는다.


영력제는 십계명에서 요구하는 일부일처제를 따를 수 없었던 관계로 천주교에 입교하지 못한다. 그 해, 그래도 사신을 예수회 성당으로 보내어, 향로, 은화병, 은촛대를 바치고, 사은미사를 청한다. 명나라사신은 마카오에 도착한 후, 마카오의 예수회 성당에서 사은미사를 드린다. 이번 미사는 그 해 10월 31일 예수회 부성회장(副省會長) 알바로 데 세메도(曾昭德, Alvaro de Semedo)가 친히 주재하고, 규모가 아주 성대했다. 남명이 멸망한 후에도 마카오 사람들이 여전히 얘기를 할 정도였다.


영력제의 조정은 종교적 분위기가 농후했다. 1650년, 남명이 군사적으로 열세에 처하자, 예수회 선교사는 영력제의 조정에 로마교황청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자고 건의하고, 왕태후와 태감 방천수(龐天壽)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 증소덕과 여러번 상의를 한 후에 최종적으로 폴란드출신 예수회 선교사 보임(卜彌格, Mechel Boym)을 남명이 로마교황청에 보내는 특사로 임명하고, 맨앞에 쓴 <상교종서(上敎宗書)> 및 증소덕의 '교황에게 보내는 공함(公函)', '예수회총회장에게 보내는 서신'을 지니고, 진안덕(陳安德)과 함께 로마로 보낸다. 


동시에 영력제는 왕태후의 명의로 같은 천주교신자인 마카오의 포르투갈 총독에게도 구원요청을 한다. 마카오총독은 연회를 열어 사신을 환대하고, 백여자루의 화총을 선물로 준다. 그러나 포르투갈총독은 영력정권에 더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만청의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1653년 봄, 프랑스인의 도움으로, 보임은 로마에 도착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프랑스인의 개입에 로마교황 이노센트10세는 반감을 가진다. 그리고 새로 당선된 예수회 총회장 니켈(Goschwin Nickel)은 '남명사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회의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기에 빠트릴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로마교황청은 3차에 걸쳐 회의를 소집하여 '남명사신'을 어떻게 응대할 것인지를 상의한다.


1655년 12월, 보임에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이노센트10세가 사망한다. 신임교황 알렉산더7세는 마침내 남명사신을 접견한다. 알렉산데르7세는 남명조정의 어려움에 대하여 동정을 표하지만,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전혀 꺼내지 않는다. 이것은 그로서 어쩔 수 없었다. 유럽은 16세기초에 이미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로마교황청은 서구에서 정치사회적 지위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교황은 이미 유럽각국간의 전쟁과 평화에 간여할 힘이 없었다. 하물며 천리나 떨어져 있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 해 3월, 보임과 진안덕은 알렉산데르7세의 기도를 받아서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영력제는 이런 정신적인 안위조차 받지 못한다. 1658년, 그들이 섬라(暹羅, 지금의 태국)에 도착했을 때, 영력정권에게는 이미 운남땅만 남아 있었고, 마카오당국은 이미 더 이상 남명 영력정권의 중개인이 되려 하지 않았다. 1659년, 보임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운남변경에서 사망한다. 진안덕도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때 영력제는 이미 버마로 망명해 있었고, 2년후 오삼계에게 포로로 잡혀 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