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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이암(李巖)은 실존인물인가?

by 중은우시 2018. 12. 12.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중에 만일 가장 아까운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암'을 꼽을 것이다.


<명사.유적전(流賊傳)>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현(杞縣) 사람 이신(李信)은 역모사건중에 상서(尙書) 이정백(李精白)의 아들이다. 일찌기 곡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고,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려서 '이공자(李公子)'라 불렀다." (이암은 이신이라고도 한다. 이정백은 산동순무 겸 병부상서를 지냈고 나중에 해임당한다)


이암은 어떤 인물인가? 역사상 이암에 관한 기재는 아주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거의 이 다섯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왕좌지재(王佐之才), 문무쌍전(文武雙全), 성정경직(性情耿直), 강개호상(慷慨豪爽), 정의화신(正義化身)!


<명계북략>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숭정13년(1640년), 이자성과 이암이 처음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 얘기하며 아주 즐거워했고, 너무 늦게 만났다고 한탄했다." 그후, 이암의 도움을 받게 된 이자성은 호랑이에 날개를 단 듯이 즉시 더욱 놀라운 에너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4년후에는 대순을 건립하고 북경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그러나, 북경에 들어간 후, 이자성은 이암의 명나라관리들을 그대로 기용하라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기반을 공고히 하지 못해서 결국은 멸망한다. 여진인들이 과실을 따가도록 만들었다. 나중에 이암은 우금성(牛金星)에게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암을 죽인 후, 이자성은 부하들과 더 이상 한 마음이 아니게 되고, 결국은 동산재기에 실패한다.


이암의 경력에 관하여,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런 가설까지 내놓는다. 만일 이자성이 이암의 건의를 들었다면, 이자성은 절대로 지지 않았을 것이고, 대순정권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암은 비극적인 인물이고, 사람들에게 동정을 산다.


그러나, 이런 역사명인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이암이 실존하지 않은 허구의 인물"이라고 말한다.


가장 먼저 이암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얘기한 사람은 명말청초의 정렴(鄭廉)이다. 소년때 나여재(羅汝才)의 반란군에 참여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는 <예변기략>에서 이렇게 썼다. '기현의 이암은 그런 사람이 없다. 나의 집은 기현에서 백여리 떨어져 있고,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주 많다. 그런데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불행히 적군에 들어간 사람도 적안에 이장군이라는 기현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그것은 실제로는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나, 나중의 연구자들은 정렴이 의거에 참가할 때 겨우 15살이었고, 군대내의 지위가 높지 않아서, 이암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대의 많은 문인들의 필기에서 모두 이암의 사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암은 존재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암을 기록해놓은 것은 어떤 필기서적들일까? <남명사>의 작자인 고성(顧誠)은 이암에 대하여 고증해본 바 있다. 1978년에 <이암질의>라는 글을 써서 이암의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표한다. 그가 보기에 최소한 당시의 증거로 보면 이암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성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암의 자료를 찾기 위하여, 그는 여러 당시에 재직했던 관리의 글, 관련기록, 자료와 지방지를 찾아보았다. 지방지만 하더라도, 반란군이 지나간 부, 주, 현지를 고성은 1000여부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암의 존재에 관한 한 한줄의 사료도 찾지 못했다. <기현지>에는 <이공자변(李公子辨)>이라는 것이 있을 뿐인데, 이암이 이정백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더더구나 거인(擧人) 이암의 존재를 부정한다.


고성의 고증에 따르면, 가장 먼저 이암을 기록한 책은 <초틈소사(剿闖小史)>이다. 이것은 이자성이 북경에서 물러난 2달여후에 간행되었다. 즉 1644년에 간행되었다. 이암이 참가한지 이미 4년이 지난 후이다. 이 책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ㅇ 있고, 적지 않은 저보(邸報)등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일부분은 진실성이 있다. 그래서 나중에 <명계북략>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후에 이 책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인용되고, 최종적으로 이암은 진짜 인물로 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고성은 이자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연(李延) 혹은 이염(李炎), 이연(李兗), 이엄(李嚴)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부 자료에 기록된 '이공자'는 기실 이자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암이 존재했는지 아닌지에 관하여 한 가지가 아주 관건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이암과 홍낭자(紅娘子)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홍낭자는 이암을 구한 후에 비로소 반란군에 참여한다. 이 두 사람은 찰떡같이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무명씨의 <도올근지(檮杌近誌)>와 오매촌의 <녹초기문>에서는 모두 이암과 홍낭자에 관한 약간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서에는 홍낭자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곡응태의 <명사기사본말>, 팽손이의 <평구지>, 계육기의 <명계북략>에 모두 홍낭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점을 보면, "개료대문영틈왕(開了大門迎闖王), 틈왕내시불납량(闖王來時不納糧)"의 재자 이암은 아마도 정말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 사서에서 홍낭자를 기록하지 않을 리가 없다.


최근 들어, 다시 일부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하남 박애현 당촌에 청나라 강희55년 이원선(李元善)이 편찬한 <이씨가보(李氏家譜)>가 발견되었는데, 이암의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이암은 기현 사람이 아니라, 하내(河內, 지금의 박애) 사람이다. 그리고 기현에는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명사>에 언급한 병부상서 이정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연히 이 이암이 그 이암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이암이라는 사람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이미 300여년동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이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