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1894년 봄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인데, 대청국에서는 한 목소리로 '싸우자'고 외치고 있었다.
다만, 청정부는 제대로된 정보가 없었다. 그들은 일본의 군사력이 어떤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인식에서 혼란이 있을 정도였다. 전쟁전에 중국내의 신문잡지는 계속하여 기존에 해오던대로 욕만 해댔고, 곧 일본을 철저히 소멸시킬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정보업무에 물샐 틈이 없었다. 1894년 청일쌍방이 선전포고한 후 27일째 되는 날, 제1기 <일청전쟁실기>잡지가 세상에 나온다.
<일청전쟁실기>를 통하여, 일본은 머나먼 적국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었다.
1894년 9월에 출판된 <일청전쟁실기> 제2편에는 <이홍장>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글은 이홍장의 신세내력부터 시작하여, 이홍장의 학습경력, 관료이력, 정치업적, 심지어 그의 용모까지 하나하나 나열했고, 구체적이고 풍부한 점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글의 말미에는 이홍장에 대한 신랄한 풍자도 들어 있다: "상하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어서, 혹은 그가 이미 미쳤다고 하고, 혹은 그가 이미 자살했다고 한다. 비록 그가 미치고 자살했다는 말이 와전이기는 하지만, 이홍장의 위치는 바로 그 유언비어가 말하는 것과 같다."
청군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쌍방의 부대가 전투를 한다면, 인원수가 같을 때 청병은 반드시 패배한다."
청일전쟁 발발전에, 일본측은 중국측의 정보를 수집하는데 주력했다. 정보수집의 중요한 방법중 하나는 바로 전쟁포로이다. 그외에 전쟁포로에 대하여는 각종 의학체력측정을 했다. <일청전쟁실기>에는 <일청양국병체격의 비교>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측정결과를 실었다. 이들 측량수치를 가지고 청군의 군기, 군용, 실력에 대하여 추가로 분석했다.
<일청전쟁실기>의 제2편에는 <청군과 군기(軍紀)>라는 글이 있다. 글에서는 청병이 1:1로 싸울 때의 능력은 인정한다. 청병은 인원수도 많고, 신체도 건장하고, 무기도 날카로우며, 사격술도 괜찮다. 다만, 청병은 부대작전능력이 모자란다고 평가한다. "구미인 1명과 중국인 1명이 싸우면 중국인이 지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부대로 전투를 벌이면 인원수가 같을 때 중국인은 반드시 진다. 이뿐아니라 4명의 구미인과 7명의 중국인이 맞붙어도 중국인이 이기지 못한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청병과 군기>라는 글의 작자는 이렇게 분석했다: "어쨌든 한마음으로 협력하지 않는다. 그저 개인안전만 신경쓴다. 부대가 어려우면,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자기가 먼저 도망친다. 그래서 부대의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쉽게 전군이 전멸하게 된다."
이 글의 말미에 작자는 일본에 유리한 예측을 했다: "인종을 개량하지 않고서는, 청군이 아군의 적수가 못된다. 군기는 원래 무형적이지만, 유형적으로 체현될 수 있다. 청일전쟁의 승부는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이때 일본군영에는 일련의 엘리트장교가 나타난다. 이들 엘리트장교들은 일본 매파의 대표인물이다. 그들은 자신만만했고, 청일결전을 극력 선동한다. 청일이 일단 교전하면, 중국이 반드시 패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자신감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량의 정치와 정보를 얻은 후 내린 결론이다. 정보공작을 통하여, 그들은 중국의 군사상황을 손바닥보듯이 알았을 뿐아니라, 중국정치의 본질에 대하여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정부의 관리들은 멸시했고, 청나라조정에 대하여는 "스스로 우루(愚陋)해져서", "일발적으로 마목불인(麻木不仁)의 관료를 만들어 냈다."
이들 일본 장군들이 보기에, 정치가 몰락한 국가는 어떻게 하더라도 무위(武威)를 선양할 수 없다. 군사적으로 반드시 외강중건(外强中乾)하다. 그래서 유구를 차지한 후 20년간 힘을 기른 일본은 마침내 대륙으로 진군하게 된다.
청일전쟁전에 일본은 군사개혁을 완성하고, 징병제를 실시했으며 육군은 7개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률적으로 유럽식 편제와 장비이다. 그기에 단발소총을 장착한다.
육군참모차장인 오가와 유지(小川又次)는 전쟁전분석을 통하여, 일본이 청나라를 이긴다는데 충분히 낙관적이었다. 그가 만든 전투계획은 2개사단이 천진에 상륙하여 직접 북경으로 향하며, 중점적으로 직예성 북양군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 노선은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청나라에 대하여 제2차아편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노선과 비슷하다
그런데, 청나라측은 일본의 전략에 대하여 지나치게 저평가하고 있었다. 일본은 여전히 탄환소국(彈丸小國)이라고 여기고,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언론이 조당을 가득 메웠다. 청나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공무원인 이소포(李篠圃)는 <일본기유(日本記遊)>라는 글을 썼는데, 이번 전쟁으로 메이지정부가 신속히 무너지고 막부정부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소포는 청나라말기의 문인으로 생졸년은 미상이다. 1880년 6월 중순 일본으로 가서 <일본기유>라는 글을 쓴다. 이 여행기는 일본의 메이지유신후 10여년간의 사회변혁기를 글로 쓴 것이어서, 어느 정도 당시 중국전통지식인이 유신변법을 대하는 보편적인 태도와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유신정치는 오늘날 멀리서 오는 사람을 막아내지 못할 뿐아니라, 극력 서양의 법을 써서, 나라는 날로 가난해지고, 가렴주구가 일어나, 백성들은 다시 도쿠카와씨가 인후했다고 그리워한다."
이소포가 일본을 여행하는 동안, 일본의 거대한 변화를 친히 목격하였지만, 어쨌든 그의 태도는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작자는 도쿠카와의 역대묘소를 참관한 후, 백성들이 다시 도쿠카와씨기 인후했다고 그리워한다"고 적었다. 이소포가 가서 절을 한 곳은 바로 세력을 잃은 구귀족과 완고한 수구파의 유민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소포와 얘기할 때 절대로 유신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이소포는 일본이 "모든 것을 서양의 법을 쓴다"는데 불만을 표시한다. 박물관을 유람하고 신식공장을 견학하는 것도 모두 호기심에서이거나 친우의 초청으로 간 것이다. 그는 주관적으로 유신이 가져온 신사물과 신기상에 대하여는 극력 말을 피했고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칭찬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가 더 주목한 것은 남녀혼욕, 명기유회(名妓遊會), 젊은 여자들이 사람을 불러서 같이 마시고 노는 것등 전통적인 일본의 모습이었다. 이는 그 스스로 '비록 대단한 여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안목을 넓혔다고는 할 수 있다."는 말에 부합한다.
이소포와 같은 사상관념이 기본적으로 당시의 국내 수구파 전통지식분자의 메이지유신에 대한 인식을 대변한다. 이들은 당시 중국에서 수가 아주 많았다. 양무구국을 주장하는 지식분자들이나 초기유신파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하여 국가발전의 저해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도대체 잘못된 것일까 아닐까? 역사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을 내렸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이소포가 동경박물원을 참관할 때, 부지불식간에 "중국제조"라는 표찰이 붙어있는 아편연구(鴉片煙具)와 옛날 병기를 본 것이다. 그는 지치후용(知恥後勇)하여, 중국이 부패몰락한 진정한 근원을 되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금치 못하며' '한탄스럽다'고 소리친다. 일본이 고의로 중국을 모욕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소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청나라조정에서는 일본에 대한 이런 평가로 가득했다:
"양인을 배척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양인을 모방한다. 각종 세수를 증가시켜, 민원이 비등하고, 도쿠카와막부시대를 그리워한다."
"복식도 서양화했다. 그들은 문명개화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은 우물안 개구리이다."
이번 전쟁에 관하여, 청나라조정은 장시간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이번 전쟁을 통하여 정무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급했던 광서제는 심지어 전쟁을 승급시켜 일거에 일군을 전멸시키기를 갈망했다.
"우리가 일본공사를 불러 대일무역을 금지시키기만 하면, 이 자원이 결핍된 소국은 곤경에 빠질 것이다. 1년도 되지 않아, 그들은 스스로 혼란에 빠질 것이니, 우리는 해금을 강화하면 그만이다."
양무, 청류의 기수인 장지동도 이렇게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결론적으로 "소일본(小日本)", "궁일본(窮日本)", 즉 작은 일본, 가난한 일본이 전쟁전 청나라사람들이 기잔 보편적인 일본에 대한 인상이었다.
이런 인상은 1년후에 완전히 깨져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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