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상(趙爽), 소생문(蘇生文)
청나라 황제중 한명은 궁중에서 하마터면 암살당할 뻔했다. 그는 바로 가경제(애신각라 옹염, 1760-1820)이다. 그리고 두번이나 암살을 당했고, 모두 미수에 그친다.
가경8년(1803년) 윤2이월 이십일, 가경제는 원명원에서 자금성으로 환궁한다. 순정문(順貞門)을 들어설 때, 돌연 진덕(陳德)이라는 사람이 칼을 들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하마터면 불측의 사태가 일어날 뻔했다.
이 사건이 있은지 10년후인 가경18년(1813년) 구월 십오일, 돌연 천리교도가 두 조로 나뉘어서 자금성의 동화문과 서화문을 통해 궁내로 진입한다. 그중 한조는 융종문밖에서 계속 공격하다가 면녕(綿寧, 즉위후에 旻寧으로 이름을 고치며, 나중의 도광제이다)이 시위를 조직하여 물리친다. 이해는 음력으로 계유년이어서 "계유지변(癸酉之變)"이라고 불린다.
고궁박물원 장고부(掌故部)가 편찬한 <장고총편>에는 <가경팔년인종우자안(遇刺案)>자료에 이 사건의 시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경8년(1803년) 윤이월이십일, 가경제는 자금성으로 돌아왔다. 바로 이 날, 진덕이라는 중년남자는 자신의 15살된 큰아들 진녹아(陳祿兒)를 데리고 동화문(東華門)을 통해 자금성에 들어갔고, 그 후에 황궁의 북문 신무문(神武門) 일대를 돌아 순정문 바깥의 서상방(西廂房) 벽의 뒤에 숨어 있었다.
가경제가 가마를 타고 순정문으로 들어갈 때, 진덕이 돌연 튀어나왔다. 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바로 가경제를 향해 돌진한다. 이 돌연한 기습에 신무문, 순정문의 사이를 수비하던 백명의 시위는 깜짝 놀랐고, 그들은 하나같이 멍하니 있으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로지 가경제의 조카이며 어전대신인 정친왕(定親王) 면은(綿恩), 고륜액부(固倫額駙) 카르카친왕 라왕도르지(拉旺多爾濟), 건청문 시위 몽고 카르친공 단바도르지(丹巴多爾濟), 어전시위 자크타르(札克塔爾)등 6명이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긴급한 순간에 튀어나와 한편으로 가경제의 가마를 호위하며, 다른 한편으로 진덕을 붙잡았다.
가경제는 순정문 안으로 호위를 받아 들어갔지만, 싸우는 곳과 거리가 멀지 않아, 이미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적지 않게 놀랐다.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면은의 소매는 찢어지고, 단바도르지의 몸에도 3곳이나 찔린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진덕은 중과부적으로 결국 힘이 다하여 붙잡히고 만다. 그리고 진덕의 몸에서는 참어(讖語)등의 물건을 찾아낸다. 진덕의 아들 진녹아는 혼란을 틈타 황궁을 빠져나가 자신의 집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금방 체포된다.
진덕이 체포된 후, 가경제는 즉시 군기대신에게 명하여 형부에서 엄히 심문하도록 한다. 다음 날에는 만한대학사, 육부상서를 보내어 심문에 참여한다. 그리고 다시 구경과도(九卿科道)도 같이 심리에 참석하도록 한다. 진덕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처가 죽고, 가정의 부담이 너무 무거웠고, 게다가 실업까지 하고나니 어디에 호소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자살을 할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자살은 가치가 없다고 보고, 죽어도 한번 소리쳐보고 죽으려 했다. 그래서 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사건동기와 과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사건을 심리하는 관리들이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귀를 비틀고 무릎을 꿇였지만, 진덕은 진술을 바꾸지 않았다.
가경제는 초보적인 심문보고를 받은 후 당연히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실업한 요리사가 죽을 생각으로 황제를 암살했다니 그리고 배후에 시킨 사람도 없고, 공모하거나 도와준 사람도 없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그는 다시 황제의 입궁시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어떻게 궁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도 수상했다. 그리하여 사건을 심리하는 대신들은 하나하나 물어봐서 진덕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체포한다. 그리고 진덕에 댛나 심문을 강화한다. 그러나 얻어지는 정보는 여전히 아주 적었다.
진덕의 아들 진녹아와 그의 집주인 황오복(黃五福)을 심문하여, 관리들은 사건발생전에 진덕이 이미 이상한 거동을 보였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에 아마도 문제가 있는 것같았다. 그러나 이 정도 진전만 가지고 사건을 마무리하기는 어려웠다.
이십삼일에 이르러, 군기처는 다시 사건심리상황을 보고한다. 약간의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하여 심문한 끝에 진덕은 자신이 요 몇년간 두번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했다. 꿈해몽과 참어등에서 자신이 '조정에 복분(福分)이 있다'고 생각하여, 나쁜 생각을 품게 되었고, 황제를 납치하여 뭔가를 얻어내고자 했다.
이런 진술은 혹은 진실일 것이고, 혹은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일 것이다. 다만 여전히 사건심리관리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말은 듣지 못했다. 배후의 주모자가 누구인가?
그날, 다시 진덕의 옛주인 승격포(僧格布), 맹계기(孟啓基) 및 관련인원인 황이(黃二), 장흥국(蔣興國)등을 심문한다. 모두 진덕이 암살행동을 하는 것을 몰랐다고 말한다. 이렇게 큰 사건을 실업한 요리사의 독자행동이라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가경제는 다시 명을 내려 구경, 과도가 함께 사건심리에 참여하도록 한다.
이십삼일부터 이십사일까지, 회심에 참여한 신하들이 공동으로 심문한다. 그리고 진덕에게 고문강도를 높인다. 그래도 진전이 없었다. 사건을 심리하는 관리들은 방법이 없었다. 이런 진퇴양난의 순간에 그들은 돌연 이십사일 가경제의 유지를 받는다. 심문을 중지하고, 사건을 끝내라는 것이다.
그날 신하들은 진덕을 능지처참에 처하고, 두 아들은 교결(絞决)에 처하며, 장모는 나이가 이미 80이 넘어서 처형을 면제해준다. 집주인 황오복은 장 100대, 유기징역 3년의 형을 내린다.
이렇게 하여, 이 조야를 뒤흔든 황제암살사건은 심문에서 결과를 얻지 못한 상황하에서 종결한다. 진덕에게 정말 아무도 막후에서 지시한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가경제는 왜 깊이 파고들지 않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했을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두 가지 일이다. 첫째,가경제초기 건륭제때의 권신 화신을 붙잡아 백릉사사(白綾賜死)했다. 그러나 화신의 일당은 수가 많았고, 진덕이 혹시 화신의 일당이 보낸 자객은 아닐까? 둘쨰, 가경원년부터 구년까지, 청나라조정은 거의 전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2억냥의 백은을 써가면서 백련교의 난을 진압했다. 진덕은 혹시 백련교의 잔당으로 복수하러 온 것이 아닐까?
첫째 가능성에 대하여 야사에서는 일찌기 이런 말이 있었다. 가경제가 화신을 사사한 후, 궁중에서 여러번 가경제를 암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번은 측근시위가 차를 바쳤는데, 가경제가 이를 마시기 전에 일이 생겨 자리를 떠났는데, 한 어린 내시가 차를 마셨다가 즉시 목숨을 잃었다. 진덕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사회에서는 이미 화신의 일당이 황제를 모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금 황제암살사건이 정말 발생했고, 그렇게 되니 화신과 관련이 있으면서 가경제로부터 용서를 받은 관리들은 모두 안절부절 못했다. 가경제가 이 사건을 빌어 자신들을 처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둘째 가능성은 야사에 따르면, 진덕은 무예가 뛰어난 무림의 인물이다. 발길질 한번으로 땅에 깊이 박은 12개의 나무말뚝을 부러뜨릴 수 있으며, 민간비밀결사(특히 백련교)가 보낸 자객이라는 것이다. 진덕이 가경제를 암살할 때 1:6으로 싸우면서 대내시위에게 상처를 입힌 상황으로부터 추측해보면 분명 어느 정도 무공이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무공이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다. 그저 살 길이 없고, 빈곤한 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야사에서 말하는 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백련교의 난은 9년동안 지속되고, 가경9년에 이르러 비로소 모두 진압되었다. 진덕사건이 발생한 가경8년은 조정이 반란진압에 쓴 재력, 물력이 아무 많아, 이미 피로에 지쳐 있었을 때이다. 백련교가 황제를 암살하려는 것이라면, 가경제도 가급적 빨리 마무리짓고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이 좋을 수 있다.
진덕사건이 발생하고 난지 10년만인 가경18년 구월 십오일 아침, 약 100여명의 천리교도가 궁내에 물건을 배달하는 상인, 짐꾼으로 위장하고, 삼삼오오 경비가 삼엄한 동화문으로 다가간다.
사람들이 다 모이기도 전에, 돌연 한 사건이 발생한다. 몇몇 교도와 궁중에 목탄을 보내는 사람과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서로 밀고 밀치는 가운데, 한 교도가 부주의하게 몸안에 감춰둔 칼을 드러낸다. 수비병사들이 이를 보고는 급히 궁문을 닫아버렸다.
우두머리인 교도 진상(陳爽)은 즉시 숨겼던 칼을 빼어들고 무리를 이끌고 문안으로 돌진한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문안으로 돌진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진상등 십여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문 밖에서 막히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십여명의 궁내로 돌진한 교도는 안에서 호응하기로 한 태감 유득재(劉得財), 유금(劉金)의 인도로 직접 협화문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인원수가 너무 적어서, 그들은 호군들과 한차례 맹렬한 전투를 벌인 후, 대부분 피살된다.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은 궁내의 각 구석에 몸을 숨긴다.
거의 이와 동시에 서화문 밖에 모여있던 진문괴(陳文魁)를 우두머리로 하는 오륙십명의 교도는 내응태감 양진충(楊進忠)등의 도움을 받아, 전부 궁내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궁문을 닫아버린다. 그들은 "대명천순(大明天順)", "순천보민(順天保民)"이라고 쓴 작은 백기를 들고, 태감 고광복(高廣福)등의 인도로 일부 호위를 죽인 후, 내정에서 멀지 않은 융종문(隆宗門) 밖까지 돌진한다.
이때 융종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몇몇 교도는 낮은 곳에서 담장을 넘어 내정을 들여다본다. 담장을 따라 양심전 방향으로 이동한다. 마침 양심전에서 공부하고 있던 황차자 면녕(나중의 도광제)는 소식을 듣고 신속히 살대(撒袋), 조총 그리고 요도(腰刀)를 꺼내서 맞싸운다. 그는 조총으로 두 명의 궁벽을 올라온 교도를 죽이고, 교도들의 공세를 막아낸다.
예친왕 소련(昭槤), 의친왕(儀親王) 영선(永璇), 성친왕(成親王) 영성(永瑆)등은 변란소식을 듣고, 금군을 이끌고 신무문으로 들어온다. 그후 임시로 데려온 천여명의 화기영 관병도 융중문 아래에 도착한다. 그리하여 교도들과 격전을 벌인다. 교도들은 비록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지만, 어쨌든 역량의 차이가 커서, 중과부적으로 결국은 궤멸하고 흩어지게 된다. 일부는 담장을 뛰어넘어 궁밖으로 나갔지만, 나머지는 궁내의 각처에 숨어 있었다.
구월 십육, 십칠일 양일간, 청군은 궁내에 숨어 있던 30여명의 천리교도를 붙잡는다. 그리고 십칠일에는 대흥황촌에 앉아서 지휘하던 천리교 우두머리 임청(林淸)을 체포한다.
사건발생 당일, 가경제는 마침 궁안에 없었다. 피서산장에서 경성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황제 면녕이 보내온 최초의 "육백리가급(六白里加急)"을 받고 자금성에 변란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은 불분명했다.
가경제가 자금성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을 때 두번재 "육백리가급"이 온다. 이미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놓는다. 그리고 즉시 자금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구월이십삼일, 가경제는 친히 중남해 풍택원으로 가서 임청등을 심문한다.
임청은 개략 가경11년(1806년) 경기지구이 백양교(白洋敎, 白陽敎)에 가입하고, 나중에 다시 팔괘교(八卦敎)중의 "감괘교(坎卦敎)"에 가입한다. 나중에 그는 하남 활현의 '진괘교(震卦敎)' 우두머리인 이문성(李文成), 이괘교(離卦敎) 두목인 풍극선(馮克善)과 연락하여, 세 세력을 합친 후, "천리교(天理敎)"로 개명한다. 그리고 가정18년(1813년) 구월 십오일(윤팔월 중추절)반청의거를 일으키기로 약정한다.
그후, 임청은 능지처참되고, 300여명의 천리교도와 그 가족들은 각각 사형, 유기지역 및 유배에 처해진다.
하남의 이문성의 반란군은 십일월초에 진압되고, 이문성은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한다. 풍극선은 같은 해 십일월 십구일 하북 헌성에서 체포되고, 경사로 압송되러 걸사(磔死)당한다.
진덕의 암살사건이 먼저 발생했고, 임청의 '계유지변'이 뒤에 일어났다. 중간에 10년의 기간이 있다. 둘 간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한가지 설에 따르면, 진덕이 산동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생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찌기 산동에서 활동하던 임청과 연결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임청의 교도이고, 임청이 가경제를 암살하도록 파견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임청은 개략 가경11년(1806년), 즉 진덕사건이 발생한 3년후에 비밀결사에 가입한다. 그리고 가입하자마자 두목이 되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덕이 임청이 교도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천리교는 개략 계유지변이 발생하기 1년전인 가경17년(1812년)에 창건되었고, 진덕사건은 가경8년(1803년)에 발생했다. 그래서 진덕이 천리교도일 가능성도 없다.
현존하는 자료에 따르면, 진덕과 임청간에 무슨 관계가 있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민간비밀결사에 관한 자료는 아주 적다. 설사 있더라도 쪼가리자료들이다. 왕왕 모호하고 정확하지도 않다. 심지어 상호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양자간에 정말 관계가 없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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