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속좁은" 관우(關羽)

중은우시 2018. 12. 1. 11:12

글: 위득승(魏得勝)


도원결의의 삼형제는 맹세하여 말했다: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바란다. 세 사람 가운데 둘째인 관우가 먼저 죽었다. 그러나, 유비와 장비가 바로 뒤따르지는 않았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저 말 뿐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의 결의, 의형제는 그저 허위넘치는 가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말 그대로의 맹세였다면 유비와 장비는 확실히 실언했다. 나중에 장비가 죽은 것은 관우의 복수와 관련있는 것이 아니라 부하의 손에 죽었다. 유비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 관우와 관련이 있는 것같지만(관우의 복수를 위한 전쟁), 그것도 3년이후의 일이고, 병사이다. 그렇다면, 죽어서도 유비를 따르겠다던 관우의 맹세는 어느 정도나 진심이었을까? 우리가 그것을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관우가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유비나 장비가 아니라.


관우의 용맹은 더욱 말이 안된다. 예를 들어, 옹주참화웅(溫酒斬華雄). 그러나 정사에 따르면 화웅은 손견(孫堅)에게 죽었다; 예를 들어 순간참안량(瞬間斬顔良), 그것은 관우가 기습한 결과이다; 다시 그 후의 참문추(斬文醜),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문추를 주살한 것은 조조(曹操)이다. 


관우가 지혜도 모자라고 용맹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마음이 바늘만큼 작았다. 먼저 그가 조조에 투항한 일막을 보자. 투항하면 투항하는 것이지, 뭐 꼬리를 붙이는가. "항한불항조(降漢不降曹)"(한나라조정에 투항하는 것이고 조조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든지. 조조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는데, 당시에 무슨 한인지 한이 아닌지가 중요한가. 조조는 삼국시대의 대단한 인물이다. 문재(文才)도 있고, 군사도 알고, 정치도 잘했다. 조조는 덕이 모자란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한 인재이다. 조조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 관우는 정말 소계두장(小鷄腸, 병아리의 속)의 인물이다. 무슨 한나라조정에 투항하고 나에게 투항하지 않는다는게 있을 수 있는가. 한나라조정이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한나라조정이다." 조조는 비록 속으로 관우를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흔쾌히 응락한다: "그럼 운장의 말대로 하자." 조조는 현실주의자이다. 그가 중요한 것은 행위와 결과이다. 이데올로기라는 허황된 것을 넘어선다.


아래에서는 제후에 봉해진 일을 얘기하기로 하자. 조조는 관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조정에 주청하여, 그를 수정후(壽亭侯)에 봉한다. 그리고 인(印)을 만들어 장료(張遼)를 시켜 보낸다. 그 인에는 "수정후인(壽亭侯印)"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관우가 안량을 기습한 것은 그 자체로 불의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하여 싸움을 잘 한다는 명성을 얻고, 제후에 봉해진다. 그 이득은 너무나 크다. 그러나 관우는 속이 아주 좁았다. 인을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받지 않는다.


인을 전해주러 갔던 장료는 도대체 관우가 무슨 생각인지 몰랐고, 화가 나서 돌아온다. 장료가 조조에게 보고할 때도 전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관장군은 이상합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후인(侯印)을 한번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나의 손에 돌려주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조조는 그의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신경을 쓰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구나!" 그리고 장인을 불러서, '수정후인'을 지우고, "한수정후지인(漢壽亭侯之印)"이라는 여섯 글자를 새기게 하고, 다시 장료를 통해서 보내준다. 그러자 관우는 기쁘게 받아든다.


"수정후인"과 "한수정후지인"은 도대체 뭐가 다른가. '한(漢)'자를 하나 덧붙인 것밖에 없다. 그렇다고 너는 한나라조정의 후이고 조조의 후는 아니란 말인가? 사람들은 모두 분명히 알고 있다. 관우의 이 후는 바로 조조가 내린 것이라는 것을. 너는 남의 밑에 있는 것이다. 한나라조정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조의 밑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인에 있는 '한'자는 무슨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관우가 원칙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가 사소한 것까지 따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속이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조의 대범한 성격과 비교하면 관우의 행위는 아녀자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관우는 인을 가지고 조조의 군영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형인 유비를 찾아간다. 조조는 그를 포기하지 못하고, 중간에 달려와서 그에게 금포(錦袍)를 기념으로 하사한다. 관우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청룡도로 금포를 걷어올려 몸에 걸친다. 너는 뭐가 겁나는가? 너는 화웅을 참하고, 안량을 참하고, 문추를 참하지 않았는가. 이 장수도 죽이고 저 장수도 죽이는 무적영웅이 아닌가. 그런데 조조를 두려워하는가? 이것은 그저 관우라는 사람의 마음 속이 극도로 음암(陰暗)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유비가 군대를 이끌고 번성(樊城)으로 들어간 그 해를 애기해 보자. 유비는 유필(劉泌)의 외조카 구봉(寇封, 나중에 劉封으로 고침)을 양자로 삼는다. 관우가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분나빠 하면서, 유봉을 막고 말한다: "아이야. 나에게 절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아주 불쾌한 얼굴로 유비에게 말한다: "관모든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형님은 자시 아들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유비도 아주 불쾌해 하며 반박한다: "운장은 왜 나의 집안 일에 간섭하는가? 나는 이 아이를 아들로 대하고, 이 아이도 나를 아비로 대하는데, 무슨 혼란이 생긴단 말인가?" 관우는 유비를 손가락을 가리키고, 장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분노하여 말한다: "우리 세 명은 머리를 땅바닥에 같이 박았고, 우리는 한 집안 사람입니다. 이제 어찌 다시 형님의 집안일이라고 하십니까. 우리의 집안 일이 아니라." 말을 마치고 화가나서 돌아간다. 나관중은 여기에서 유비와 관우의 관계에 대하여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이 원한을 맺은 일이다." 


219년,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에 오른다. 유비는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는데, 그중에는 오호대장(五虎大將)이 있다. 관우는 당연히 그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관우는 황충(黃忠)도 역시 오호대장의 한 명이라는 말을 듣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초는 그만큼 강하지 못하고, 황개도 그와 비견할 수 없다. 관우는 바로 이렇게 흉금이 좁은 사람인 것이다.


오(吳)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는 것에 관하여, 제갈근(諸葛瑾)은 손권에게 아이디어를 낸다: "제가 듣기로 관우의 슬하에 1남1녀가 있다고 합니다. 딸이 어려서 아직 혼사를 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가 형주를 한번 가서, 주공의 세자와의 혼인을 청하겠습니다. 만일 관우가 이 혼사에 동의하면, 우리는 그와 함께 공동으로 조조를 칠 일을 논의하고, 만일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계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갈근을 사신으로 하여 형주에 청혼하러 보낸다. 관우는 성격이 불과 같아서, 그 말을 듣자 대노한다: "호랑이의 딸을 어찌 개의 자식에게 시집보내겠는가? 손권은 제가 뭐라도 괴는 줄 아는가?"


제갈근은 문약한 사람이다. 관우가 이렇게 짐승처럼 화를 내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거두어 들인다: "관장군 화를 거두십시오.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합시다." 관우는 그래도 화가 덜 풀렸다: "늙은이, 빨리 꺼져라. 내가 당신 동생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더라면 즉시 너의 미리를 베어서 개에게 먹였을 것이다!" 그리고 좌우를 불러서 말한다: "이 늙은 이를 끌고 나가라!"


제갈근이 돌아와 오후(吳侯) 손권을 만나, 감히 이를 숨기지 못하고 하나하나 사실대로 고한다. 손권도 대노한다. "아니, 너 관우가 이번 혼사를 거절하면 그만이지, 어찌 그리 무례하게 본후를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결심을 내린다. 형주를 공격하기로. 관우는 이때부터 "앞에는 오나라병사가 뒤에는 위나라병사가 있는" 곤란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동오에 패배당해 참수당하는 처참한 결말을 맞이한다.